62화
며칠째 바이올렛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윈터는 하루하루 바짝 말라 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날 이후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집무실 발코니에서 담배를 꺼내 문 윈터가 물끄러미 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보자기를 두른 제 어머니, 리네가 서 있었다.
잠시 후, 예상대로 하옐이 집무실로 들어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머님께서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
하옐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윈터가 입을 열었다.
“그냥 가라고 해.”
“예, 대표님.”
하옐이 대답하고 나가려는데 그가 돌아섰다.
“아니다. 내가 가야겠군.”
“기분 안 좋으실 텐데 그냥 저 시키시죠?”
“됐어.”
다른 스트레스라도 받아야 바이올렛이 좀 잊힐 것 같았다. 윈터가 불쾌함을 느끼는 짐승처럼 슬렁슬렁 걸어 밖으로 나갔다.
윈터가 나오는 것을 발견한 리네가 서둘러 달려왔다.
“윈터!”
“왜 또 온 겁니까?”
윈터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리네가 우물쭈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네가 준 돈으로 쌍둥이가 많이 좋아졌단다. 고맙단 인사를 하려고…….”
“전보나 보내시지. 시간 아깝게.”
윈터의 냉정한 말에 리네가 눈을 꾹 감았다.
“어머니, 이해는 하는데.”
“…….”
“그래도 그날은 너무하셨습니다.”
리네가 고개를 못 들고 어깨만 떨었다. 윈터가 혀를 한 번 차고 물었다.
“뭐, 지나간 일은 됐고, 돈이 더 필요한 거면 일단 이것 좀 답해 주고 받아 가세요. 혹시 몸 바뀌는 거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그, 글쎄. 바뀌는 경우가 몇 가지 있는 걸로 듣긴 했는데…….”
“그럼 몸이 바뀌는 건 됐고, 정말로 궁금한 건.”
그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죽을 수가 있습니까?”
“어, 어? 왜…… 그런 걸 물어보니? 죽다니?”
“석 달 뒤에 죽을 생각입니다. 그런데 죽으면 자꾸 몸이 바뀌니까 죽을 수가 없어요.”
“위, 윈터!”
“가진 게 너무 많으니 그것도 나름 지겨워서요. 아, 당연히 전부 아내에게 주고 갈 거니까 한 푼 건드릴 생각 마시고요.”
“네, 네 아내도 알고 있는 거니?”
“그럴 리가요. 어디 가서 말씀은 마세요. 아이들한테 가는 돈 끊기고 싶지 않으면.”
“왜, 왜 그런 생각을 해. 이, 이 건물 다 네 거 아니니? 이렇게 많은 걸 가졌는데 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
리네는 윈터가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식당에 있을 때도 아이가 얻어맞고 마구간에 갇히는 걸 보면서도 살아 있으니 됐다, 나와 사는 것보단 저기가 낫다 믿었었다. 금방금방 자라서 제 몸은 거뜬히 지키고 남겠다, 싶을 때 알리카로 떠났다. 아이를 낳고서도 윈터의 소식을 궁금해하다가 그 애 결혼 소식과 작위가 날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결혼은 유지가 되었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윈터가 말했다.
“죽는 방법이나 그냥 말해 주고 가시죠.”
“모든 사람이 몸이 바뀌는 건 아니라서…… 그래도 사고사나 병사라면 바뀌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단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는 안 된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윈터가 혀를 찼다.
그럼 어쨌든 제 의지가 없어야 죽을 거라는 것이었다. 뭐 지금까지 원한을 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비만 허술해지면 충분히 살해당하고도 남을 것 같긴 했다.
우연을 노려봐야 하나. 세 달 뒤에 죽어 줘야 하는데 어쩌나. 윈터가 고민하고 있을 때, 리네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런 말 말고 이거 받으렴. 네가 어릴 때 좋아하던 거…….”
윈터가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보니 남부에서 자라는 하얀 콩이 들어 있었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주머니 속의 콩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자는 한곳에 오래 있지 못했다. 호의를 베푸는 자들 중에는 리네 자체를 대가로 얻으려는 사내들이 가득했다.
내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얻을 수 있는 그나마 좋은 간식이 하얀 콩이었다. 늘 한 주먹씩 삶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한 알씩 집어 먹었다. 좋아해서 먹은 게 아니라 그것밖에 없었다.
윈터는 제가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했던 어린 시절을 갓 쪄낸 하얀 콩 냄새로 다시 떠올렸다.
그는 이끌리듯 콩 한 줌을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따듯하고 고소한 맛에 어린 시절 기억이 났다.
좋은 기억도 없는데 이상하게 그리웠다. 윈터가 주머니를 닫았다.
“오셨으니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아, 아니다. 밥은…… 괜찮아.”
“아.”
윈터가 안주머니에서 미리 챙겨 온 돈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리네가 봉투를 챙기고도 주춤거리자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됐으니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어차피 세상에 나한테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해 줄 사람은 없…….”
“손을 잡고 싶어요.”
순간 윈터는 바이올렛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필요한 건 없고, 대신에 하고 싶은 게 있다면서. 아내는 윈터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자신에게 바라는 게 손 잡는 일인 사람은. 윈터는 제 손아귀에서 사라져 버린 바이올렛의 하얀 손을 떠올리며 제 거칠고 커다란 손바닥을 보았다.
리네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으려는데 윈터가 짜증을 내며 그대로 몸을 돌려 버렸다.
*
늦은 밤, 윈터가 호위도 없이 호텔을 나서자 하옐이 따라와 물었다.
“이 밤에 어디 가시는데 경호도 없이 가십니까? 그래도 타지인데 데려가시죠?”
“참견하지 마.”
윈터가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은 외곽의 어두워 보이는 거리로 향했다. 길 입구부터 우범 지대이니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표지판이 있었고, 불빛도 드물었다.
윈터는 태평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간쯤에 술집이 있어 바에 앉아 싸구려 맥주를 주야장천 들이켰다. 그리고 껄렁거리며 몰려서 술을 마시고 있는 청년들에게 걸어가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이, 이 새끼 뭐야!”
술병을 든 청년이 바닥에 술병을 던졌다.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체격 차이가 커서 때려도 타격이 약할 거라고 예상했는지 바로 반격하지 않고 씩씩거릴 뿐이었다.
일단 멱살을 잡기에 윈터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까지 숙여 가며 잡혀 주자 뒤에서 무리 중 하나가 제 무리의 어깨를 당겼다.
“야, 그냥 가자. 이상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다들 황당해하면서도 뭔가 꿍꿍이가 있나, 싶어 오히려 슬금슬금 물러났다. 윈터가 이럴 때를 대비해 챙겨 온 접이용 칼을 꺼내 내밀었다.
“자. 찔러.”
칼을 건네주면서도 혹시 제가 칼을 건네주면 이것도 자살인가, 망설여지긴 했다.
안 그래도 미친놈인가, 싶던 윈터가 칼까지 내밀자 청년들이 경계하는 얼굴로 욕설을 퍼부으며 우르르 일어났다.
무리 중 많이 취한 사내 하나가 칼을 뺏더니 재빨리 그의 목에 들이댔다. 날카로운 칼에 찔리자 피가 투두둑 떨어졌다. 그러자 윈터가 청년의 팔을 움켜쥐며 말했다.
“용감하군.”
그는 진심으로 칭찬했으나, 다른 이에게는 전부 위협으로 들렸다.
붙잡힌 팔에서 느껴지는 완력 차이에 청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서 더 찌르기는커녕 그대로 칼을 떨어뜨리고 필사적으로 빠져나와 무리에 섞였다.
“뭐, 뭐야.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그러게 그냥 나가자니까! 저런 또라이랑 얽혀서 좋을 거 없어.”
무리가 욕설을 하며 테이블이며 의자를 뒤집어 엉망으로 만들더니 그대로 술집을 나가 버렸다.
첫 시도를 실패하자 윈터가 제 눈썹을 슥슥 문지르며 욕설을 퍼붓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가 손수건으로 상처를 틀어막고 말했다.
“맥주 가져와.”
술집 주인도 한 덩치 했지만 방금 칼이 오가는 상황을 봐서인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소, 손님. 술집에서 칼은 좀…….”
윈터가 돈을 내던지며 말했다.
“술 가져오란 말 안 들려?”
큰돈에 눈이 휘둥그레진 술집 주인이 서둘러 달려가 술집에 있는 술 중 나름 가장 좋은 술을 가져왔다.
윈터는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저와 사선으로 앉아 술을 한 모금씩 같이 마셔 주던 바이올렛이 아른거렸다.
그 악랄한 공주님은 복수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를 떠올리지 않으려 술을 마시는데, 그 순간마저도 멋대로 점령해 버린 것이다.
*
죽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쉬운 게 객사는 아님이 분명했다.
다음 날 윈터는 멀쩡한 상태로 호텔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손에 잡히는 푹신한 감각에 윈터가 표정을 구겼다.
“젠장, 호텔 짓는 것보다 뒈지는 게 더 어렵네.”
한 박자 늦게 숙취가 올라와 상체를 일으켰을 때, 벌컥 열린 문으로 미간에 주름이 잡힌 하옐이 들어왔다.
“대표님, 어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 안 나시죠?”
“날 리가 있나.”
“술집에서 완전히 뻗으셔서 술집 주인이 거기다 재웠더라고요. 그리고 지갑에서 명함을 찾았다고 해 아침에 와서 데려가라고 해서 모셔 왔죠. 몸값은 정확히 5,000라크네였습니다. 싸게 끝냈죠.”
“더럽게 비싼 술을 마셨군.”
“원하시는 게 뭡니까? 뭘 해 드리면 이딴 사춘기 반항 같은 짓을 그만하실 거냐고요. 수습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옐이 죽일 듯이 윈터를 보며 말했다. 원래도 쌀쌀한 인상이긴 했지만 지금은 윈터가 좀 더 속을 긁으면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윈터가 대꾸했다.
“죽으러 갔어. 다음부터는 몸값 주지 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죽게 놔두라고.”
윈터가 인상을 쓰고 말하자 하옐이 입술을 꾹 물었다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다시 이러셔도 똑같이 몸값 내서 모셔 올 거고, 그 다음에 바로 그만둘 겁니다. 그런 줄 아십쇼.”
그러더니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그대로 쿵쿵거리며 침실을 나가 버렸다.
윈터가 뒤늦게 떠올랐는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바이올렛에게 절대 말하지 마!”
그 소리에 화를 못 참고 다시 들어온 하옐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시면 저 바로 작은 마님께 자살이었다고 이를 겁니다! 그럼 작은 마님은 아마 대표님 장례식장에도 안 오실 거라고요!”
그래 놓고는 겁을 먹어 재빨리 침실에서 도망쳐 버렸다.
윈터는 성질을 내고 싶었으나 죽고 싶을 정도의 숙취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라 객실에 설치된 벨을 눌러 사람을 불렀다.
*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스트레스가 있는 대로 폭발한 하옐은 그대로 호텔을 나왔다. 수도에는 제 집이 있는데 여기 출장을 와서는 호텔이 집이니 갈 곳이 한 군데뿐이었다. 어차피 자신 말고 젠과 플립도 멋대로 살다시피 하는 데다 집주인도 손님을 껄끄러워하지 않는 곳.
그는 바이올렛에게 뭐라도 하소연하기 위해 재량껏 햄과 과일 바구니를 사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문을 연 바이올렛이 놀라서 물었다.
“하옐? 무슨 일인가?”
“일단 이것 좀 드세요.”
“또 뭘 이렇게 많이…… 게다가 안색은 또 왜 이렇게 안 좋아?”
바이올렛이 걱정하는데 안에 있던 리나가 톡 튀어나와 그녀의 다리에 매달려 하옐을 보았다.
“하옐이다!”
리나가 이름을 아는 게 신기한지 바이올렛이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 이름은 모르는데 하옐의 이름은 알아?”
“응. 우리 집 와서 맛있는 거 사 줬거든.”
그러더니 다시 테이블에 있던 엄마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오늘 새벽, 치안 나쁜 뒷골목 술집에서 돈을 주고 만취한 데다 체격도 큰 윈터를 데려와야 했던 하옐은 화목한 분위기에 벌써부터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집 안에 과일 바구니와 햄을 내려놓으며 우는소리를 했다.
“작은 마님, 저 진짜 그만둘까 봐요.”
“남편이 또 테이블이라도 뒤집었나?”
“네. 그것도 엄청 큰 테이블을요.”
“저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