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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61화 (61/176)
  • 61화

    바이올렛이 평생을 지켜 주리라 마음먹었던 배내옷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그 순간이 떠오르자 심장이 녹아 그대로 줄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바이올렛은 그 이후 무슨 말을 들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글린은 제가 또 눈치 없이 너무 떠들었다고 생각하며 슬그머니 집무실을 떠났다.

    이글린이 떠난 후에도 바이올렛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몸에 힘이 쭉 풀려 반응할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블루밍 부부에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그 역시 이 상황에 휘말린 피해자였으니 오히려 연민해야 하나 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그날 제가 느꼈던 지옥 같은 아픔이 다시 떠올랐다.

    바이올렛은 한동안 집무실 벽만 바라보며 꼼짝을 하지 못했다.

    *

    아내에게 일을 시켜 놓고 윈터는 뻔뻔하게도 제가 사고 싶은 것을 실컷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예 손수레까지 사서 그 안에 필요한 것들을 듬뿍 담았다. 밀짚모자와 예쁜 원피스를 얻은 리나는 손수레를 타고 앉아서 과즙을 넣고 얼려서 간 슬러시를 마시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리나가 손수레를 끄는 윈터를 보며 물었다.

    “거봐, 나랑 노니까 재미있지?”

    “네가 재미있는 거겠지, 꼬맹아.”

    “그것도 맞아.”

    리나가 헤헤 웃었다.

    한껏 행복한 상태의 리나를 핌에게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알아서 꺼지라는 윈터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집이 비어 있었다.

    그는 손수레를 집 앞에 두며 투덜거렸다.

    “어떻게 손수레 하나가 없냐, 이 여자는.”

    제 혼잣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손수레의 존재는 아나?”

    모를 확률이 커 보였다. 그러니 매일 마차까지 그 짐을 들어 나르지.

    윈터는 손수레에 들어 있는 짐들을 가져다 집으로 옮겼다. 아직 완벽히 낫지 않은 몸으로 돌아다니고, 성질을 낸 데다가, 일까지 하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비록 제가 내는 것이긴 하지만 아내의 목소리가 계속 귀에 들리는 것이 좋았다.

    시장에서 산, 고기와 치즈를 넣고 말아서 만든 두툼한 빵을 뜯어 먹으며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바이올렛이 들어섰다. 일을 떠맡겨 제 발이 저린 윈터가 리나가 양 갈래로 묶어 준 제 머리를 흔들어 보이며 능청을 떨었다.

    “옆집 꼬마가 해 주더군. 귀엽지?”

    “…….”

    바이올렛은 반응이 없었다.

    윈터는 제가 무표정일 때 저렇게 재수 없게 생겼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는 바이올렛에게 걸어가며 평소보다 훨씬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일 떠맡긴 건 미안했어. 오늘따라 유난히 일을 하기 싫더군. 게다가 당신이 맡아 주면 좋을 것 같은 일이 많아서…….”

    “언제 말할 생각이었죠?”

    “뭐를?”

    “당신 부모님이 나에게 약을 먹인걸요.”

    그 말을 듣자마자 사색이 된 윈터가 서둘러 제 몸의 팔을 잡으며 몸을 다시 바뀌었다. 그 즉시 윈터는 바이올렛이 사라지지 못하게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떻게 알았어?”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이혼하면 그 이후에 말할 생각이었어. 당신이 약속한 세 달을 채우지 않고 도망쳐 버릴까 봐 걱정돼서.”

    “아, 윈터…….”

    “내 탓 하지 마. 당신은 이 일로 1년을 사라졌었어. 충분히 벌줬잖아. 이혼도 해 준다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 내 탓 하지 마.”

    바이올렛은 남편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계획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윈터는 제 탓을 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바이올렛이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 주며 말했다.

    “내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했지?”

    그의 표정을 마주한 바이올렛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윈터는 제가 감당할 수 없는 파도를 코앞에서 마주친 사람 같았다. 대응할 생각 없이, 그저 체념 상태였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말없이 바라보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날 떠났잖아. 알아. 아니까 이혼해 준다는 거야.”

    바이올렛은 이곳이 행복하다고 말했고, 제 곁이 지옥이라고 말했으며, 그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윈터는 아직도 지나치게 자주, 바이올렛이 죽는 날의 꿈을 꿨다.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나면 윈터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을 거라는 침통함에 잠겼다.

    당신은 내가 밉잖아.

    나를 1년 동안 떠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잖아. 내가 이곳에 온 것을 안 후에도 만나기 싫어했잖아. 내가 그날 죽지 않았다면, 당신은 영영 날 만나 주지 않았을 거잖아.

    순간 모든 게 미워진 어린아이처럼, 윈터는 속에서부터 복잡하게 들끓어 버린 괴로움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때, 바이올렛이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등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윈터가 바이올렛을 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직 나는 화도 안 냈는데 혼자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요, 당신은.”

    “…….”

    “물론 당신에게도 화가 나요. 하지만 그보다, 내가 화를 내야 하는 첫 번째 대상은 당신 부모님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 다음의 일이죠. 일단은 잠시 동안,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요.”

    무슨 의미인가, 생각하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 당신을 찾아오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군.”

    “네, 맞아요. 시간이 필요해요.”

    그녀는 무섭도록 침착했으므로, 저와 정반대 형식의 분노는 윈터로 하여금 도무지 아내의 분노의 양을 종잡을 수 없게 했다.

    “오픈 파티 전까지는 어떻게든 결정해.”

    “명령하지 말아요.”

    “강요하는 거야.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로 쳐들어올 테니까.”

    “빨리 결정할게요.”

    그녀가 대답하자 그제야 윈터가 별수 없이 그녀의 집을 떠났다.

    바이올렛은 문을 잠근 후, 지쳐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윈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몸은 이전보다 아픈 곳이 늘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덴 듯이 아프던 마음은 그 상태로 날이 밝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블루밍 공작 부부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제가 남편에게 주지 못했던 것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계획했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그녀는 집을 나섰다. 옆집의 핌이 그녀를 발견하고 따라나섰다.

    “바이올렛, 어디 가요?”

    “키론 우체국에 다녀올까 하오.”

    “잘됐네! 같이 가요. 대륙 간 우편 보내는 법을 잘 모를 테니 도와줄게요. 바이올렛이 어제 우리 리나한테 사 준 원피스 있잖아요. 애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때도 잠옷 대신 그걸 입고 자겠다고 우겨서 결국은 옷도 안 갈아입고 잤다니까?”

    윈터가 리나를 데리고 시장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의 허락 여부와 상관없이 핌이 그녀를 따라 걸었다.

    “편지는 어디로 보내게요?”

    “시부모님께 보낼 생각이라오.”

    라크라운드에서 키론으로 편지를 보내려면 배편뿐이라, 운 좋으면 일찍 도착할 때도 있지만 배를 잘못 타면 항로에 따라서 1년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반대로 강한 마력으로 감싸여 있는 이 대륙에서는 우체국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편지를 목적지로 도착하게 할 수 있었다. 가격은 비쌌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바이올렛은 핌과 함께 우체국으로 가 블루밍 공작 부부에게로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조만간 그들이 직접 이곳으로 올 테니 답은 곧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

    블루밍 가문의 분위기는 아주 좋지 않았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며 캐서린 블루밍 공작 부인은 티 파티를 열었다. 그녀는 거의 주말마다 열던 이 티 파티가 얼마나 막대한 돈을 필요로 했는지를 차츰 알아 가고 있었다.

    화수분 같던 윈터의 재산이 끊긴 데다 디에브에게 넘겨주던 바이올렛의 롱 리우드 땅의 소작료 절반도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매주 화려한 파티를 열어서는 재산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티 파티 손님들은 키론 호텔의 오픈 파티가 다가오자 더욱 캐서린의 환심을 사려 애썼다.

    “카닉 호텔 소셜 클럽 회원들은 전부 초대장이 왔다더군요? 오픈 파티로 이동하는 기차도 배도 직접 운행하고 심지어는 체류비까지 전부 카닉 호텔에서 내 준다고 들었어요.”

    “이번 호텔에서도 가장 좋은 객실에서 가장 처음 묵는 건 캐서린 부인이시겠네요. 부러워라…….”

    캐서린은 물론이고 티 파티에 참여한 제임스 블루밍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는 있지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손끝이 조금 떨렸다.

    아들이 주는 중요한 선물 중에는 카닉 호텔 VIP이며 사교계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카닉 호텔 소셜 클럽 회원권이 있었다. 카닉 호텔의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릴 수 있으나 1년 단위로 갱신해야 하고, 상당한 돈이 필요한 검은색 명함 크기의 회원권이 부부에게는 매년 열 장이 도착했다.

    이 회원권이 남부 귀족들이 그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게 만드는 힘 중에 하나였는데, 올해는 그것이 올 거라 장담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공으로 얻던 것이라, 이제야 그 소중함을 알았다.

    티 파티가 끝나고 제임스가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오픈 파티 초대장도 보내지 않았소.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니지 않소.”

    “그래도 우리 아들은 우릴 사랑하니까 정작 만나면 화를 풀 거예요.”

    “꼭 그래야 할 텐데…….”

    두 사람이 염려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로 집사가 달려왔다.

    “주, 주인어른! 마님! 자, 작은 마님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뭐?”

    제임스가 인상을 쓰며 집사를 따라나섰다.

    집사가 내민 편지를 받아 그 자리에서 확인한 제임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악마 같은 계집…….”

    “무, 무슨 일이에요?”

    “이것 좀 봐요, 부인. 우리 가문을 망가뜨리려고 작정을 한 것 아니오!”

    제임스에게서 편지를 받아 든 캐서린의 표정 역시 분노로 얼룩졌다.

    블루밍 공작 부부 귀하.

    의사를 통해 저에게 질 나쁜 약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화가 나고, 두 분이 왜 그런 짓을 하셨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아마 저희 부부가 이혼을 하길 바라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남편이 이 사실에 분노하여 두 분께 보내는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남편에게 화를 낼지, 아니면 연민하며 용서할지를 고민하는 중입니다.

    제 선택은 남편에게 큰 영향을 미치리라 확신합니다. 제가 용서하고 부탁한다면 남편은 재정 지원을 다시 이어 갈 겁니다. 선택은 두 분에게 달렸습니다.

    저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리고 대가는 하나입니다.

    두 분께서 결혼식 당일, 제가 남편에게 줄 수 없었던 한 가지를 대신 주시기를 바랍니다.

    윈터 블루밍 경을 블루밍 공작 작위의 제1후계자로 삼아 주세요. 그는 두 분의 장남이며, 뛰어난 인재이고, 가문을 번성시킬 후계자입니다. 또한 두 분의 사교 생활을 유지해 줄 힘을 가진 유일한 아들이기도 하지요.

    협상은 없습니다. 확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바이올렛 블루밍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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