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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60화 (60/176)
  • 60화

    “……이렇게 생겨서 죄송합니다?”

    행동은 바이올렛처럼 하려고 애쓰지만 속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이거 들키는 거 아닌가, 하옐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주자 윈터가 멈칫하다가 나름 우아한 자세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난 좀 자야겠네. 너흰 일해.”

    그리고 침실로 걸어가는데 하늘에 큼지막한 날벌레가 날았다. 윈터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휙 벌레를 잡아채서 툭툭 버리자 뒤에 있던 젠이 비명을 질렀다.

    “자, 작은 마님이 귀신 들린 것 같아요!”

    그 말에 플립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윈터가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돌아보자 젠이 소리쳤다.

    “우리 작은 마님은 절대 맨손으로 벌레를 못 잡으신다고요! 넌 누구냐, 이 악마야!”

    그사이 플립이 재빨리 소금을 가져다가 젠에게 쥐여 주었다. 그들이 정말로 소금을 뿌리려 하자 하옐이 다급하게 막아서며 말했다.

    “대, 대표님이세요! 소금 뿌리지 말아요, 젠!”

    그러자 젠이 소금을 한 움큼 쥐고 멈춰 섰다. 하옐이 말을 이었다.

    “두, 두 분이 종종 몸이 바뀌거든요. 꽤 됐어요.”

    그러자 윈터가 혀를 차며 하옐에게 핀잔했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작은 마님께 악마가 씌었다는 누명이 생기잖습니까.”

    하옐이 반발했다. 윈터는 상황을 믿지 못하는 두 사람을 하옐에게 맡기고 바이올렛의 침대로 가서 드러누웠다.

    아내의 침대에 누우니 몸과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대로 바이올렛이 돌아올 때까지 늘어지게 잠이나 자 두려는데 침실로 옆집 꼬마가 포르르 들어왔다.

    “바이올렛, 자고 있어?”

    윈터가 눈도 안 뜨고 대꾸했다.

    “보면 몰라?”

    “엄마도 낮잠 자거든. 엄마가 바이올렛한테 놀아 달라고 하래.”

    아내를 돌봐 주라고 핌에게 돈까지 쥐여 줬는데 반대로 육아를 분담시키고 있다. 윈터가 혀를 찼다.

    “싫다. 졸려.”

    평소와 달리 단칼에 거절당하자 리나가 결심했다는 듯 신발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침대 위에 올라와 비장하게 말했다.

    “나 여기서 뛸 거다? 안 놀아 주면 폴짝폴짝 뛰고 놀 거야?”

    바이올렛의 가장 큰 약점을 잡다니, 저 녀석 영악하군. 10년 뒤에 고용해야겠어. 미리 고용 계약서를…….

    무심코 악랄한 계획을 세우며 윈터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밖에 저 귀신이라도 본 듯 홀려 있는 두 사람이 번거로우니 시장을 다녀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바이올렛에게는 모든 물건이 부족했으니까.

    윈터가 상체를 일으켰다.

    “시장 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 바이올렛 가난하잖아.”

    “누가 가난해, 이 사람아.”

    그의 핀잔에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바이올렛 오늘 이상해!”

    아내가 저와 얼마나 행동이 다르기에 여섯 살짜리까지 위화감을 느끼는지 모를 일이다.

    윈터는 제가 돈을 숨겨 둔 침대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침대 아래 바닥을 똑똑 두들겨 보더니 중간 정도를 손으로 툭 밀었다. 그러자 나무 판 하나가 대각선으로 기울어지며 안에서 숙려 기간 계약서 위에 윈터가 대충 던져 두었던 돈주머니가 나왔다. 아직 바이올렛은 모르는 걸 보니 안 열어 본 모양이었다.

    윈터가 자랑하듯 리나에게 돈주머니를 흔들어 보이자 아이의 입이 절로 열렸다.

    “보물이야?”

    “비상금.”

    윈터가 하품을 하며 걸음을 옮기자 리나도 신이 나서 그 뒤를 따라 걸었다.

    *

    몸이 바뀌기 직전. 윈터의 성질을 못 견딘 하옐이 나가 버리고, 윈터는 집무실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는 오픈 파티를 위해 라크라운드에서 출발할 손님 목록을 넘겼다. 제 손으로 부모의 이름을 목록에서 제외했으므로, 블루밍 공작 부부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윈터는 문뜩 견딜 수 없는 패배감에 잠겼다. 제 부모가 아내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걷잡을 수 없이 그를 흔들었다.

    아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신경이 쇠약해져 바이올렛이 보일 최악의 반응만 상상하고 있을 때, 다행히 키론 호텔의 총지배인 니사가 들어섰다.

    “대표님.”

    올해로 쉰을 넘긴 그녀는 오랜 시간 호텔 일에 잔뼈가 굵었고, 사람을 가려 쓰지 않는 윈터가 룸 메이드에서 총지배인까지 단계적으로 승진시킨, 회사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정작 제 생모는 내쫓았어도 윈터는 제 어머니 또래의 카닉 일족 여자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숙이고 들어가는 면이 있었다.

    그걸 아는 하옐이 도망치기 전에 니사에게 서류를 맡겨 놓았다. 그녀가 그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재확인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지금 하시죠.”

    니사가 단호히 말하고는 팔짱을 끼고 섰다. 그녀가 콧방귀를 뀌며 노려보고 있으니 곤란해졌다.

    윈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놓고 가. 나중에 볼 테니까.”

    “안 돼요. 지금 당장…… 어딜 가는 거예요?”

    윈터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집무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섰다.

    한 번 불안증이 오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아내와 닿아 있어야지만 이 끔찍한 패닉이 멈출 것 같았다.

    지금 몸이 바뀌면 그녀가 화를 내며 제 몸을 찾으러 돌아오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펌프질을 해 세면대를 미지근한 물로 채운 후, 면도칼로 제 팔을 긋고 거기 담갔다.

    “오늘만 봐줘, 바이올렛.”

    아내와 무엇이라도 닿아 있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피가 단숨에 빠져나가며 힘이 빠진 윈터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바이올렛이 왜 몸을 바꾸는 일이 쉽다고 했는지 확실히 이해가 갔다.

    이대로 죽어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세상이 희어지더니 어느 순간 장막이 닫히듯 모든 것이 사라졌다.

    *

    제 집에서 젠과 플립, 하옐에게 둘러싸여 과보호를 받고 있던 바이올렛이 심호흡과 함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윈터의 집무실에 딸린 욕실 안이었다.

    바로 앞에 거울이 있어 곧장 제 몸이 윈터와 바뀐 것을 알았다. 게다가 다친 곳에서 느껴지던 욱신거림이 사라져 순간 천국에라도 온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무슨 수로 몸을 바꾼 건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의아함과 황당함을 동시에 느끼며 욕실 밖으로 나가자 니사가 인상을 쓰고 말했다.

    “내가 이런다고 포기할 줄 알아요? 그만하고 일 좀 하세요!”

    “……일이라니?”

    바이올렛은 니사가 가리키는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윈터가 제게 일을 던져 놓고 놀러 나간 모양이었다. 하옐의 하소연으로 요즘 빈둥거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제게 일을 떠맡기는 야비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월급이라도 주든지…….”

    바이올렛의 혼잣말에 니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아니네.”

    바이올렛이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얼떨결에 보고서를 확인했다. 잠결에 날림으로 한 것 같은 윈터의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곧바로 보고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윈터가 떠맡긴 건 대부분 이해가 가능한 부분들이었다. 오픈 파티와 정원 관련된 내용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니사는 웬일로 다리를 꼬거나 의자 뒤로 기대 발을 데스크에 올리지 않는 대표의 모습에 놀라움을 느꼈다. 욕실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나온 게라 생각하니 기특해졌다.

    그때, 바이올렛이 보고서 일부를 수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니사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어디 가요?”

    “정원을 확인해야겠네. 가격이 안 맞는 게 있어서.”

    바이올렛이 의아하다는 듯이 정원 관련 서류를 흔들어 보이자 니사가 신기한 것을 보듯 보며 앞장섰다.

    잠시 뒤, 바이올렛이 정원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넓은 공간에 근사한 관상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와…….”

    대표가 의욕 넘치는 표정으로 정원을 가로지르자 니사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니, 비서님은 대표님 꼼짝도 안 하신다고 호들갑을 떨던데 엄살이었잖아요? 아, 말투가 갑자기 정중해지신 건 어색하네요. 마음가짐이에요?”

    바이올렛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정원을 걸었다. 그리고 보고서의 내용을 확인하다가 어느 나무 아래 멈춰 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노란 잎을 들어 보며 말했다.

    “흰개미가 집을 지었네.”

    “흰개미가 왜요?”

    “키론 정원에 키론 흰개미가 돌아다닌다는 건 전체 방역을 다 다시 해야 한다는 뜻이라서. 여기 벤치들까지 전부 다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방역은 충분히 하고 있는데요. 어, 어머. 혹시 정원사가 중간에 해 먹고 있는 걸까요?”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바이올렛이 다시 서류들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구매한 것 중에 가격이 너무 비싼 것들이 많아서.”

    “알아볼게요. 거봐요, 일 시작하면 이렇게 잘하시는걸!”

    바이올렛이 떠나는 니사의 뒷모습과 서류를 번갈아 보았다.

    숫자만 봐도 정원사가 횡령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을 텐데. 윈터처럼 절대 손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놓쳤을 리 없었다.

    윈터가 일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는 하옐의 말이 증명되고 있었다. 그것도 심각한 수준으로.

    잠도 잘 못 잔다고 하고, 술도 너무 많이 마신다고 하고.

    “걱정이네…….”

    바이올렛은 혼잣말을 하며 집무실로 돌아갔다.

    이래저래 남편의 상태가 우려되긴 하지만 쉬다 말고 여기 끌려와 일을 하고 있는 건 억울했다. 파티 당일 인근 해변의 사용 허가를 위해 편지를 적던 바이올렛이 도저히 억울함을 못 참고 펜을 탁 내려놓았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어야 하는 거야?”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일을 끝마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성격에서 나오는 불편함이 그녀를 붙잡았다.

    결국 다시 펜을 잡고 편지를 쓰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커다란 짐 가방을 든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다듬지 않은 긴 은발에 회색 눈을 가진 여자였다.

    바이올렛은 그녀가 아마도 하옐에게 이야기 들은 공동 부대표, 이글린이리라 생각했다.

    “무슨 일인가?”

    “다들 여기로 몰려와서 저 혼자 수도 일을 떠맡고 있다고요. 열 받아 죽겠네. 다들 바다 보고 신난 거죠?”

    “그래도 최소한 노크는 하고…….”

    “연락하고 오겠다고 하면 못 오게 하실 거였잖아요. 저도 구경 좀 하다 갈게요.”

    다행히 이글린은 자기 하고 싶은 말부터 하는 사람이라 어긋나는 이음새들을 알아서 채워 주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하옐은요?”

    “도망갔네. 내 집…… 아니, 아내의 집으로.”

    “그 녀석도 참 참을성이 있네요. 내가 사표 열 번 쓸 동안 한 번도 사표를 안 내다니.”

    한마디 할 때마다 제 입으로 정보를 술술 풀어 주는 덕에 바이올렛은 이 낯선 사람의 등장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마음이 편안해진 바이올렛이 장난을 치듯 말했다.

    “온 김에 일해야지?”

    “으, 그런 소리 마십쇼. 저 한동안은 이 근처 카닉 일족들 자주 가는 비밀 술집마다 다니면서 술 마실 거예요. 대표님도 일할 기분 아니잖아요. 술 많이 드실 거면 저랑 안 겹치게 동선 짜시죠.”

    이글린 역시 술을 무척 좋아하는지 가방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인근의 비밀 술집 위치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녀의 표정은 내내 시큰둥했지만 행동에는 열정이 넘쳐 보였다. 그런 그녀를 웃음기 고인 얼굴로 보고 있으니 이글린이 인상을 썼다.

    “왜 그런 흐뭇한 표정이십니까? 저 어디 극지방 보낼 거죠? 그렇죠?”

    “그런 거 아니니 걱정 말게.”

    “근데 왜 이러시지……. 게다가 지금 제 술집 리스트 알려 드리는데 기뻐하지도 않으시잖아요. 평소에는 알려 달라고 그렇게 윽박지르셨으면서. 아, 하긴, 베릴 그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이상하실 만하죠.”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는 이글린 덕에 바이올렛은 한동안 생각한 적 없던 이름을 들었다.

    바이올렛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예상대로 이글린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도대체 대표님 부모님 두 분은 왜 그러신 겁니까? 임신으로 속이는 약을 먹이다뇨.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며느리에게?”

    “…….”

    “베릴 그놈을 두들겨 패 놓고 싶더라고요. 그놈의 양심 고백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모르셨을 테니 감안해 주신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의 표정이 차게 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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