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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59화 (59/176)

59화

시퍼렇게 부어오른 발등을 보고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진 윈터가 짓이겨 가져온 약을 발등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풀리지 않게 붕대로 발목을 한 바퀴 감아서 단단히 묶은 윈터가 몸을 일으켰다.

바이올렛이 저도 일어서려고 두 발을 디디다가 한쪽으로 무너지자 윈터가 한 팔로 그녀의 몸을 감아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녀를 침대에 내려 둔 윈터가 허리를 숙여 바이올렛의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에이든 가문에서 다쳤다고 들었는데. 그 가문 여자가 던진 잔에 맞았다며?”

“네. 그래서 오는 길에 경관에게 물건에 맞았고 돈도 못 받았다고 신고를 했어요.”

“……그게 다야?”

“달리 해야 할 것이 있었나요?”

윈터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 바이올렛의 고지식함이 우스우면서도 부러웠다. 그는 경관에게 말해 봤자 소용없으리란 걸 알았다. 그게 소용이 있었다면 제가 어린 시절 그렇게 두들겨 맞고 지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바이올렛의 머리 옆에 손을 두고 말했다.

“오픈 파티 못 오게 할 거야. 에이든 가문 어느 누구도.”

“이미 초대장 보냈잖아요.”

바이올렛의 대답에 윈터가 픽 웃더니 아내의 뺨을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래서 뭐. 내가 아무리 호구여도 아내를 다치게 한 사람과 파티에서 웃고 떠들 정도는 아니지.”

바이올렛이 당황한 표정을 지은 채 제 뺨을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행동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다쳤으니까 나오지 마.”

“아, 고마워요. 잘 가요.”

윈터가 돌아간 뒤, 한참을 멍하게 있던 바이올렛이 뒤늦게 몸을 일으켜 붕대가 감긴 제 발을 보았다.

“……확실히 나보다 잘 묶네.”

바이올렛이 중얼거리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려 손부채질로 열을 식혔다.

*

며칠 뒤 에이든 가문에서는 저녁 만찬이 열리고 있었다.

새로 왔다는 카닉 호텔 오픈 파티 초대장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엘자가 두 번째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직도 초대장이 안 왔다고요? 며칠 전에 카닉 호텔에서 직접 사람을 보내 가문마다 방문했는걸요?”

“누락된 거 아닐까요? 찾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엘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었으나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근처 가문들은 홍보 목적이라고는 해도 거의 다 파티 초대를 받았으니 정말로 누락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락이라는 것도 가문 입장에서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주의 깊게 볼 만한 가문이 아니라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세력을 가늠할 때, 재산 규모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맥이 오고 가는 사교계 권력 역시 매우 중요했다. 엘자의 표정에 점점 초조함이 드러났다.

내일이라도 당장 호텔에 찾아가 봐야겠다고 고민하고 있을 때, 집사가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무슨 손님?”

“카닉 호텔의 대표이신 윈터 블루밍 경이십니다.”

그 말에 엘자가 벌떡 일어났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집사의 안내로 윈터 블루밍이 들어서자 사람들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는 머리를 반듯하게 갈라 넘겼고, 완벽한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큰 키에 긴 팔다리는 제가 입은 정장에서 빛이 나게 했다.

엘자는 순간 그 남자에게 이성으로서 걷잡을 수 없는 호감을 느끼는 동시에, 소문으로 듣던 카닉 일족의 눈을 발견하고는 깔아보는 표정을 지었다.

카닉 일족은 그들이 살던 이 대륙에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려 라크라운드로 이주한 것이었으므로, 이 지역에서는 오히려 라크라운드에서보다 더한 차별을 받았다.

엘자가 그런 차별이 여실히 담긴 눈으로 윈터를 살피며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죠?”

“새 초대장을 드리러 왔습니다.”

윈터의 말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엘자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왜 직접 오신 거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윈터의 무덤덤한 표정에 엘자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 근방에서는 맹세코 본 적 없는 근사한 사내였다. 다혈질을 억누른 서늘한 분위기가 야릇하게 느껴져 심장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때, 윈터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초대장을 건네며 말했다.

“두 번째 초대장을 드리긴 하겠지만 꼭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주 불편해질 테니까.”

“……네?”

엘자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묻자 윈터가 말을 이었다.

“내 아내에게 무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내분이 누구신데요?”

“내 아내를 모르나? 웬만한 귀족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러기에는 너무 한미한 가문인 게로군.”

윈터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딴 가문에 제 아내가 모욕당했다는 게 어이없었다.

한편 엘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누구에게 무례했는지 떠오르지 않아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난 그런 기억 없어요. 다른 사람과 착각한 거 아닌가요?”

“내 아내가 다쳤는데 어떻게 기억을 못 해?”

윈터가 결국 욱해서 말했다.

엘자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지만 애써 부정했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그런 적 없다니까?”

“어느 부분이 말이 안 되지? 애초에 일을 했는데 대금도 안 치르다니, 동네 양아치도 이딴 식으로는 장사 안 해.”

역시 바이올렛의 이야기였다.

엘자가 억울해 눈물까지 글썽이며 소리쳤다.

“몰랐어요! 알았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그러자 윈터가 불쾌감 가득한 눈으로 엘자를 내려다보았다.

“나야 뭐, 원래 태생이 천한 놈이라 그쪽이 뭘 하셨든 상관없지만, 우리 아내분은 무례한 걸 정말 싫어하셔서. 내 호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윈터는 그렇게 제 할 말만 끝내고 그곳을 떠나 버렸다. 엘자는 분노와 두려움을 느껴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

“아이 참, 작은 마님! 걷지 마시라고요!”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걷지도 못하게 하니?”

“덧난단 말이에요!”

바이올렛은 젠에게 있는 대로 혼나고 별수 없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바이올렛을 유난히 따르는 플립은 휴일에 굳이 젠을 따라와서 묵묵히 청소 중이었고, 젠은 침대 시트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테이블 맞은편에는 하옐까지 와서 앉아 있어, 이 좁은 집이 북적북적거렸다.

하옐은 너무 지친 얼굴로 여기에 도망쳐 와 있었다. 술을 거의 못 마시는 하옐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중얼거렸다.

“작은 마님을 찾기 전까진 그렇게 일을 벌이더니 이제는 아예 일을 손에서 놔 버리셨어요. 아, 이제 정말 그만둘 때가 됐나 봐요. 대표님 성격은 점점 더 더러워지고 속도 얼마 썩이시는지 몰라요.”

평소 능청맞다뿐이지 말이 많지는 않던 하옐이 맥주 한 모금에 취해 구시렁거렸다. 바이올렛을 상대할 때의 윈터는 늘 어느 정도의 내숭을 깔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가 이렇게까지 욕을 먹을 정도인가, 싶었다.

어쨌든 하옐이 너무 힘들어 보여 하소연을 들어 주던 바이올렛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플립이 달려왔다.

“뭐가 필요하십니까?”

“하옐이 취한 것 같아 물이라도 한 잔 줄까 하고.”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플립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바이올렛이 하옐의 손에서 맥주를 뺏었다.

“취했으니 그만 마시게. 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대표님 혼자 알아서 하시라고 해요.”

플립이 하옐에게 물을 가져다주자 그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술이 깨진 않는지 테이블에 엎드려 투덜거렸다.

“저도 지쳤다고요. 이직할 거예요. 직장인의 꿈과 희망 이직…….”

“자네가 고생이 많네.”

바이올렛은 하옐의 주정이 다소 피곤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져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도 세상에 남편을 자네만큼 챙겨 주는 사람이 어디 있나. 남편이 자네를 만난 건 큰 축복이지.”

“그거 꼭 대표님께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구걸하고 다닐 때 구해 주시지만 않았어도 옛날에 그만뒀다고요…….”

하옐이 그렇게 웅얼거리는데 순간 바이올렛이 현기증을 느끼는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고는 곧 세상에 뭐 이런 시장 바닥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하옐의 말에 아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작은 마님의 안위만 걱정하던 플립뿐이었다.

그가 걱정하며 바이올렛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는데, 순간 하옐이 고개를 번쩍 들고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두 분이 다시 만나시는 건…… 역시 어렵겠죠?”

그러자 젠이 나서서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비서님은 대표님이 작은 마님께 뭐라고 하셨는지는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작은 마님이 왜 이혼하기 싫으시냐고 했더니, 대표님이 자긴 이 결혼을 흑자로 전환할 자신이 있다고 하셨대요.”

“……진짜요?”

“그렇다니까요? 세상에 그런 말을 듣고 결혼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냐고요?”

그 말에 바이올렛의 표정이 굳었다. 한참 후,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뭐, 꽤 시간이 지나서 하는 말인데. 그게 그렇게까지 나쁜 말도 아니지 않나? 어쨌든 가치가 있다는 말이잖아.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 말에 세 사람이 동시에 얼굴이 창백해져서 바이올렛을 보았다.

“마음 약한 소리 마세요, 작은 마님.”

“맞아요, 저도 젠의 말을 듣고 마음 바뀌었습니다. 재결합 반대입니다, 작은 마님.”

젠과 하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옆에서 플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반응에 확 짜증이 솟구쳤는지 바이올렛이 테이블 다리를 퍽 걷어찼다. 그 순간 젠과 플립은 기겁해서 바이올렛의 발을 살폈지만, 하옐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표님!”

“대표님?”

젠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하옐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몸이 바뀐 것이 분명한 작은 마님을 보았다. 성질난다고 걷어차기부터 하는 이 행동을 보니 윈터가 틀림없었다.

예상대로 아내의 몸을 차지한 윈터가 잠시 생각하더니 생긋 웃으며 하옐에게 말했다.

“어머나, 실내에서 큰 소리를 내다니. 무례해라.”

“우리 작은 마님은 그렇게 남에게 책임 전가 안 하십니다.”

“누가 ‘우리’ 작은 마님이지?”

그때, 젠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휴, 그보다 작은 마님 지금 세게 부딪치셨죠?”

바이올렛이 스스로 뭔가를 걷어찰 리 없으니 분명 일어나다 충돌한 거라, 젠은 확신했다.

플립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확인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윈터는 꺼지란 말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안 돼.”

“아…… 예.”

플립이 의아해하면서도 물러났다.

윈터는 제 발에서 눈을 못 떼는 플립에 혀를 찼다. 원래도 플립은 성실하고 다정다감한 편이라 많은 직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 바이올렛에게 대하는 건 저에게 할 때와 완전히 달랐다. 윈터가 빈정거렸다.

“그보다 난 너같이 생긴 얼굴 싫어해. 가까이 오지 마.”

그러자 플립은 기분 나빠하기보다 바이올렛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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