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힐라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저 손짓하는 방향에 있는, 방금 바이올렛과 구인 공고를 얻어 온 그 거대한 호텔은 아니겠지. 그 호텔 마나님이 이런 쥐구멍만 한 집에 살 리가 없지, 저기 큰 숙박업소가 있나 보다,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그런 힐라의 속도 모르고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플립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집에는 무슨 일인가?”
“보여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문 뒤에 숨어 있던, 블루밍 저택에 있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 있던 하녀, 젠이 폴짝 뛰어 나타났다.
“작은 마님!”
“세상에, 젠!”
1년도 넘어 만나는 반가운 얼굴에 바이올렛이 체면 불구하고 젠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무 반가웠는지 눈물까지 고인 바이올렛이 물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그게요, 작은 마님 떠나시고 대표님이 하도 직원들마다 달달 볶으셔서 저도 그만뒀었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대표님보다 돈을 더 주시는 분이 어디 있어야 말이죠. 게다가 작은 마님을 모셔 보니까, 다른 저택에선 도저히 일을 못 하겠는 거예요. 그러다가 작은 마님 따라서 키론에 다녀오겠냐는 연락을 받고 잽싸게 왔죠.”
돈 되는 선물은 팔아 버릴 테니까, 윈터는 이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일에 돈을 쓰고 있었다. 대륙을 건너온 젠을 돌려보내는 것은 바이올렛에게 불가능했다. 약은 수를 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바이올렛이 반가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물었다.
“어디서 묵기로 했어?”
“호텔에 따로 직원 기숙사가 있어요. 라크라운드에서 살던 제 집보다 더 좋더라고요. 듣자 하니 거기 작은 마님 도와주신 언니도 이제 카닉 호텔에서 일하겠네요? 안 그래도 경력 있는 직원들 구하기 어렵다던데 잘됐네요.”
젠이 재잘재잘하는 말에 힐라는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가져온 젠의 짐들을 집 안으로 옮겨다 준 플립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힐라에게 말했다.
“일단 카닉 호텔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대표님이 작은 마님 댁에 불시에 찾아오실 때가 있으니 불편하실 겁니다. 기숙사 내 드리겠습니다.”
“그, 그래도 돼요?”
“예. 저는 직원 인사를 담당하고 있어서 기숙사 정도는 제 재량으로 내 드릴 수 있습니다. 대표님도 바라실 거고요.”
그러자 바이올렛이 아쉬운 듯 인사했다.
“같이 지내면 좋을 것 같았는데…… 생각해 보니 플립의 말대로 남편이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갑자기 나타나면 힐라가 불편하긴 할 것 같소.”
“아…… 그, 그럼 가 볼게요, 일단.”
힐라는 상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얼떨결에 플립과 집을 나섰다. 플립이 힐라의 짐을 들고 카닉 호텔 전용 마차로 향하며, 호텔의 모든 직원들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에이든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정확히 여쭤도 될까요?”
그러자 힐라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글쎄…… 에이든 가문 아가씨께서 꽃 일 하는 아가씨한테 유리잔을 던졌거든요. 도와주지 말라고 했는데 하도 유리 조각 치우는 데 오래 걸리고 못 미더워서 도와줬다가 해고당했지 뭐예요.”
“그러셨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대표님께 보고드려야겠군요.”
플립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일로 평생 바라지도 못했던 연봉을 받으며 카닉 호텔에 뼈를 묻게 될 것을 모르는 힐라는 그저 영문 모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뿐이었다.
*
젠은 바이올렛의 집에 오자마자 온갖 잔소리를 하며 집을 휘젓고 다녔다. 뭐가 없다면서 시장만 세 번을 다녀와서는 마무리로 식사를 마련했다.
순식간에 모든 빨래가 밖에 내걸리고 집 안이 금세 반짝반짝해졌다. 도와주려 했다가 방해된다고 핀잔만 들은 바이올렛이 구두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을 때, 잠깐 일에서 관심을 뗀 젠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작은 마님 발등이 좀 이상…… 으앗! 이거 왜 이래요! 손은 또 왜 이러고!”
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더니 응급조치만 해 놓은 손을 살피며 기겁을 해서 물었다.
“서, 설마 그 망할 에이든 가문이 이랬어요?”
“으, 으응…….”
젠의 박력에 밀려 바이올렛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젠이 열이 받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약 가져올게요, 식사하세요!”
그녀까지 떠나자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집이 고요해졌다.
바이올렛은 참 정신없는 하루라고 생각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안 그래도 귀찮고 배고팠던 터라 식사를 차려 준 젠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버리는 부드러운 미트볼이라 열심히 씹을 필요도 없었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친 후 욕조에 찰랑찰랑 물을 받고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욕조 목욕은 꼭 하고 싶었기에 나무로 된 자그마한 목욕통을 샀다. 좋은 나무 향이 물씬 나는 목욕통에서 여유를 부리고 목욕을 하다 보니 제가 잠옷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내가 오늘 정신이 없긴 없구나.”
바이올렛이 혼잣말하며 욕조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둘렀다. 하녀들이 무엇이든 챙겨 주던 버릇을 못 버려 종종 이래 왔으므로 그리 난처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물기가 떨어지는 맨발로 욕실을 나서던 바이올렛은 정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다 자신을 발견한 윈터와 눈이 마주쳤다.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느슨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콧잔등부터 양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 밤중에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의자에 앉아 있던 윈터는 바이올렛을 보고 잠시 말문이 막혀 꼼짝을 못 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녀의 심각하게 부어오른 발등이 눈에 들어와 곤란함에서 벗어났다.
그가 들고 온 약재를 들어 보였다.
“다쳤다고 들어서.”
그러더니 난처함에 수건 이음새를 두 손으로 꼭 쥔 바이올렛을 턱짓하며 물었다.
“평소에도 집에서 그러고 다녀?”
“아뇨! 잠옷을 안 들고 들어온 것뿐이에요. 보통은 갈아입고 나와요. 거기 그렇게 사람이 있을 줄 알았겠어요?”
“문도 안 잠갔던데.”
“젠이 목욕 중간에 돌아올까 봐 그런 거예요.”
당혹스러운 마음에 말이 빨라졌다. 윈터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거기 있어. 가져올 테니까.”
“자, 잠옷은 두 번째 선반에 있어요.”
윈터가 몸을 돌려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잠옷을 꺼내 든 그가 바이올렛 쪽으로 걸어왔다. 남편이 가까워지자 바이올렛의 곧은 어깨가 조금 움찔거렸다.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우유 같은 살결을 타고 미끄러졌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손에서 옷을 낚아채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윈터는 문이 닫히자마자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바이올렛이 다쳤다는 소리에 미쳐서 달려왔는데 그 분노마저 방향성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윈터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내를 붙잡아 눕히고 싶은 충동을 짓누르며, 담배라도 피우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그가 가지고 있던, 매우 가늘지만 강철 같은 도덕적 신념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케이스에서 담배를 꺼내는 그의 손이 다급했다.
욕실에서 막 나왔을 때 본 의외로 탄탄한 허벅지가 신경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살면서 이성의 신체에 이렇게 아득해진 적은 없었다.
“……돌아 버리겠네.”
윈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벽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일 정신도 없어 그대로 굳어 열을 식히는데 그의 바로 옆, 창문이 드르륵 열렸다.
바이올렛이 밖으로 상체를 조금 내밀었다.
“입었어요.”
윈터가 바이올렛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약간 분홍빛이 도는 잠옷을 입고 창밖에 몸을 내밀어 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바이올렛은 이 해프닝이 좀 민망했을 뿐이지 윈터가 어떤 상태인지는 잘 모르는 듯했다.
창문에 두 팔을 겹쳐 올리고 순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그녀와 마주하니 윈터는 제 이성을 모난 돌 위에 갈아 버리는 듯하던 음란한 잔상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윈터가 제 마음을 감추려 인위적으로 입꼬리를 늘리고 짓궂게 말했다.
“예쁜 옷 입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그냥 잠옷…… 또 놀리는 거죠?”
바이올렛이 살며시 그를 흘겼다.
윈터는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그냥 땅에 버리고, 잔불을 끄던 습관대로 괜히 구둣발로 짓이겼다.
“일일이 허락받으려니 번거롭군.”
“뭐를…… 아.”
바이올렛이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턱을 잡아 그대로 입을 맞췄다.
바이올렛에게서는 비누 냄새와 향긋한 풀 냄새가 섞여서 났고, 윈터에게서는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냄새와 도시적인 향수 냄새가 났다.
부부는 서로 상대방의 향이 달콤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약속한 입맞춤은 세 번뿐이라 이 키스가 마지막이 될 것을 아쉬워했다.
입을 맞추던 도중에 윈터의 손이 귀로 올라오자 바이올렛이 휙 몸을 바로 하며 손으로 제 귀를 감쌌다.
“왜 귀를 만져요?”
“하다 하다 이젠 귀도 못 만지게 해?”
“기분이 이상해요.”
“이상하라고 만지는 거잖아.”
“일부러 그런단 말인가요?”
바이올렛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자꾸 뒤로 물러서자 윈터가 이번엔 제가 창문 안쪽으로 몸을 들이밀며 말했다.
“도망쳤으니까 이 키스는 무효야.”
“그게 무슨…….”
바이올렛은 말끝을 흐렸고, 윈터는 한마디 더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귀를 만진 게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그녀의 귀부터 목덜미까지가 연한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윈터는 곧 현관을 통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로 심장 박동이 거세, 윈터는 차가운 물을 여러 번 벌컥벌컥 들이켜야 했다.
어느 정도 정욕을 식힌 윈터가 말했다.
“무효로 해. 중간에 도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정말…….”
“아직 한 번 남은 거야.”
윈터가 억지를 부렸다.
바이올렛은 입맞춤으로 더 실랑이하면 마음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도한 윈터가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당신이 데려온 여자는 호텔에 숙소 마련했어. 일도 같이 줬고.”
“아…… 고마워요.”
“이런 일이 있으면 앞으로 나한테 바로 좀 말해. 나중에 남의 입으로 듣게 하지 말고. 난 아직은 당신 남편이야. 당신은 날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해. 내가 당신 옆에서 사라진 후에도.”
이혼을 하면 서로가 멀어지는 게 당연하니, 사라진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바이올렛은 그의 말이 조금 불안하게 느껴졌다.
윈터가 슬리퍼를 신기 어려울 정도로 부어 있는 바이올렛의 발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발등이 이렇게 돼서 당분간 일은 못 하겠군.”
“당신 파티의 꽃은 그래도…….”
“내 파티는 지금까지 당신이 맡은 이 지역 한미한 가문들의 티 파티와는 격이 달라. 한창 튼튼할 때도 맡길까 말까인데,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하긴 뭘 해?”
“그건 그렇군요. 그럼…… 정말 무직자가 됐네요.”
바이올렛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지금 상태로 그런 거대한 호텔 파티를 담당할 자신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바이올렛이 절뚝거리며 의자로 걸어가 앉자 윈터가 가져온 약재를 집어 들었다.
“붕대 감아 줄게.”
“내가 해도 돼요.”
“당신한테 불안해서 어떻게 맡겨.”
윈터가 지적하고는 붕대를 들고 와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을 제 허벅지 위에 올려 상처를 살폈다.
그의 행동에 바이올렛은 시선 둘 곳이 없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맨발과 닿는 옷 너머로 느껴지는 윈터의 돌 같은 허벅지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힘주어 오므렸다.
윈터는 다친 것만 신경 쓰는데, 저만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