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리나가 돌아가고 정리까지 마치니 바이올렛의 집 근처로 짐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윈터가 물이 들어 묵직한 꽃 항아리가 가득한 상자들을 들고 잠옷 차림으로 느긋하게 마차로 향하며 물었다.
“에이든 가문까지 가? 너무 멀잖아.”
“그렇게 멀리서 일이 들어오니까 오히려 반가운걸요. 그보다 잠옷 차림으로 어디까지 갈 생각이에요?”
“마차 있는 곳까지.”
“잠옷 입고 그래도 되는 거예요?”
“내가 그러고 싶다는데 뭐.”
“나도 시도해 볼까 봐요.”
“이게 시도씩이나 해야 하는 일인가?”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신기해하며 짐마차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바이올렛이 집 열쇠를 윈터에게 쥐여 주며 말했다.
“문 잠그고 열쇠는 두 번째 화분 아래에 두면 돼요.”
열쇠를 쥔 윈터가 대답 대신 출발하라며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떠나고도 윈터는 제 손에 들린 열쇠를 한참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한데, 정확히 어떤 기분인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때 멀찍이 마차를 대고 걸어온 하옐이 물었다.
“대표님, 여기서 뭐 하세요?”
그러자 윈터가 바이올렛의 집 방향을 턱짓하며 말했다.
“아내의 집을 라크라운드로 옮기는 게 좋겠어.”
“예?”
“어차피 아내도 곧 라크라운드로 돌아갈 것 아냐. 저 집도 옮길까 하고.”
“도대체 왜요?”
“잠이 잘 와. 해체해서 우리 배에 실을 수 있나 확인해야 하니 목수를 불러와.”
하옐은 하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어차피 제 돈 나가는 것이 아닌지라 그냥 대꾸했다.
“예, 그러시죠. 작은 마님 댁이니까 작은 마님께서 허락하시면요.”
“아내도 좋아할 거야.”
윈터는 확신했고, 하옐은 작은 마님께서 확실하게 반대하실 거라 확신했다. 이내 그가 충격적인 윈터의 계획에 잠깐 잊었던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아, 참. 이글린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윈터가 기다렸던 편지를 휙 낚아채 바로 펼쳤다.
베릴이란 의사 놈이 하도 꼭꼭 숨어 있어서 찾느라 좀 걸렸습니다. 붙잡아 물어보니 전부 사실이래요. 실제로 임신 증상이 유발되는 약을 작은 마님께 먹였고, 대표님의 부모님께 임신이라고 거짓말하라는 명령도 받았답니다.
경관에게 넘기진 않았습니다만 법적으로 처리하실 계획이시면 답신 주십쇼.
윈터가 편지를 받고 굳어 있자 하옐이 물었다.
“작은 마님께 바로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습니까? 작은 마님께서는 아직 작은 마님께서 임신을 너무 간절히 바라서 생긴 일로 알고 계실 텐데요.”
윈터는 바이올렛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여는 티 파티에 한 번을 가 주지 않아서 그녀가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몰랐고, 제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을 숨겼으므로 이 상황이 벌어졌다. 어쩌면 말을 꺼내는 순간 자신을 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윈터가 물러나라며 하옐을 향해 손을 휘젓고는 바이올렛의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혼하고 말할 거야.”
이기적이라는 걸 알아도, 겨우 얻은 이 찰나의 행복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
윈터에게는 이 일을 구한 것이 좋은 일처럼 말했지만, 사실 바이올렛은 오늘 단단하게 마음을 먹고 에이든 가문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리지야의 정원에서 새끼손가락을 올리면 안 된다는 지적을 받았던 이후, 엘자 에이든은 몇 번 바이올렛에게 일을 맡겼다. 그런데 마치 그 목적이 괴롭힘이었다는 듯 엘자는 끊임없이 그녀를 못살게 굴었다.
이 악순환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큰 문제는 엘자가 그녀의 꽃 장식을 좋아한다는 데 있었다. 덕분에 엘자는 바이올렛을 고용하는 것을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신 그녀를 불러냈다.
코르시카 사교계 전체가 카닉 호텔의 오픈 파티로 술렁이고 있었고, 그것은 에이든 가문도 마찬가지였다.
엘자는 파티에서 입을 가봉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가 거만하게 바이올렛을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카닉 호텔 초대장에 코르사주를 권장한다고 적혀 있어. 이 파티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는 거지?”
“그랬군요.”
담담히 답한 바이올렛이 상자를 내려놓은 뒤 코르사주 하나를 꺼내며 물었다.
“일단 이것부터 해 보시겠어요?”
“아니, 마음에 안 들어.”
엘자는 보지도 않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하곤 거울 속 제 얼굴을 살폈다. 바이올렛이 다시 한 번 엘자가 가진 레이스를 겹쳐서 들어 보였다.
“이렇게 겹쳐서 하면…….”
“마음에 안 든다니까?”
예상대로 엘자는 무조건 트집을 잡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래도 급여는 받아야 하니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다른 코르사주를 꺼냈다.
“화려한 것이 싫으시면 이렇게 아예 흰색으로 하시는 건 어떤가요? 진주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호텔 로비가 흰색이라는데 흰색을 어떻게 써? 보이지도 않을 것 아냐.”
엘자가 짜증을 내며 그제야 바이올렛 쪽을 보았다. 블루밍 가문에서 3년간 타인의 짜증과 비난에 익숙해진 바이올렛이 담담히 하얀색의 여러 꽃으로 만든 코르사주를 내밀며 말했다.
“한번 달아 보기라도 하는 건 어때요?”
“싫다고 하잖아.”
“어떤 분위기를 원하세요? 꽃을 몇 종류 더 가져왔으니 이것저것 조합해 보겠습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 일이니까 네가 알아서 내가 좋아하는 걸 만들어야 할 것 아냐?”
엘자는 당장 머리채라도 잡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뭘 가져오든 트집을 잡을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어떤 걸 원하시는지 조금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알아서 해 오라는 말 못 알아들어? 부모에게 교육을 못 받은 거야? 내 태도는 예의 없다고 하더니?”
엘자가 결국은 제가 바이올렛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를 내뱉었다. 바이올렛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미안했어요. 하지만 예의가 없다고 말한 건 아닙니다. 다만 아직 어리니 앞으로를 생각해서 알아 두시는 게 좋지 않을까…….”
그 순간 엘자의 드레스를 입혀 주던 하녀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엘자가 앞에 있던 유리잔을 바이올렛에게 집어 던졌기 때문이었다. 유리잔은 그녀의 어깨를 맞히고 발등에 떨어져 깨졌다.
엘자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 좀 더 잘하는 자를 불러야겠어.”
“그럼 꽃값은…….”
“이런 쓰레기들만 가져와 놓고 무슨 돈을 달래!”
바이올렛의 속에서 여간해선 뭉치지 않는 화가 끈끈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그녀가 상자를 들고 나가려 하자 엘자가 말했다.
“하긴, 자존심도 없이 남 밑에서 일할 정도로 돈이 없지? 거기 놓고 저거 치워. 다시 봐 줄 테니까.”
엘자가 우아하게 손가락으로 깨진 유리잔을 가리키며 상자가 놓인 쪽으로 걸어갔다.
상자에 반듯하게 놓인 코르사주는 솔직히 엘자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가난뱅이라 별것 아닌 것을 가져올 줄 알았는데, 파티에 많이 가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 근처에서는 구할 수도 없을 높은 수준의 드레스용 코르사주를 만들어 왔다. 그 옆에는 파티 당일 새로 코르사주를 만들 수 있도록 스케치한 것이 놓여 있었다.
엘자가 스케치 중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빼돌리고 모른 척했다.
그사이 바이올렛은 깨진 유리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혼자 살게 된 이후에도 행동이 얌전한 덕에 잔을 깨 본 적이 없었다. 태어나서 깨진 것을 치워 본 적이 없다 보니 그녀는 겁도 없이 맨손으로 덥석 커다란 유리 조각을 집었다.
에이든 가문의 하녀들이 그 모습에 움찔거렸다. 서툴기 짝이 없어 보는 사람이 더 불안했다.
결국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긁혀 손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유리 조각이 이렇게 날카로운 줄 몰랐던 바이올렛이 뒤늦게 손을 뗐다.
그러자 하녀 하나가 달려와 빗자루로 유리 조각을 쓸어 담으며 핀잔했다.
“아주 천년만년 하시겠네.”
“도와주다 혼나겠소. 내가 할 테니…….”
“빨리 하고 치워 버리는 게 나아요. 이러다 우리 아가씨 다치시면 무슨 사달이에요.”
하녀가 재빨리 물걸레질을 하고 양동이를 집어 들려는데 엘자가 다가왔다.
“누가 도와주래? 너한테 시켰어?”
“아, 아뇨, 꽃 일 하는 아가씨가 일이 서툴러 보여서 유리 조각이 남으면 우리 아가씨께서 다칠까 봐요.”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시켰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에 말대꾸까지 해?”
“죄, 죄송해요, 아가씨!”
“필요 없으니까 둘 다 내 집에서 나가. 당장.”
그녀의 매몰찬 말에 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엘자가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오지랖 넓게 참견하면 안 되는 거야. 주제를 모르고.”
엘자의 비꼬는 말에 바이올렛은 제가 리지야 예핌추크를 통해 찻잔을 들 때 약지를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전했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큰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바이올렛은 왠지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3년 동안 겪은 따돌림과 사기꾼, 사기 결혼이라는 비난을 들어 온 날들은 그녀를 이런 상황에 무감각해지게 만들었다.
잠시 후, 돌아갈 짐마차도 없이 바이올렛과 하녀는 에이든 가문 밖으로 내쫓겼다.
정문 앞에서 짐을 챙겨 울며 나오는 하녀를 기다리던 바이올렛이 자신을 보고 멈춰 선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힐라…… 예요.”
“힐라, 달리 머물 곳은 있소?”
“이제 구해 봐야죠. 무슨 일로 이렇게 화가 나셨는지 모르지만 기분 나아지시면 다시 받아 주실 거예요. 전에도 몇 번 이러셨거든요.”
힐라가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렇다고 해도 그쪽 아가씨가 더 걱정 아닌가요? 여기서 꽃 일 못 구하면 굶어 죽기 딱 좋아 보이는데. 이 근처에선 일 구하기 힘들어요. 에이든 가문에서 해고된 사람을 가문 눈치 보느라 웬만하면 안 써 주니까요. 기다렸다가 나랑 같이 싹싹 빌어요.”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조금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해고된 데는 내 탓도 있으니 변변치는 않지만 우리 집에서 지내도 괜찮소. 그리고 가까이에 카닉 호텔이 있는데, 그곳에 가 보는 것이 어떻소? 그곳은 외지인의 회사라 에이든 가문도 어쩌지 못할 거요.”
“그, 그게 될까요? 가능만 하면 다른 곳에 일을 구하고 싶긴 해요. 엘자 아가씨가 워낙 불같으셔서 고용이 불안하거든요…….”
두 사람은 때마침 키론 방향으로 가는 사설 마차를 만나 잡아탔다. 힐라는 고민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어차피 막막한 참이라 별수 없이 바이올렛을 따라나섰다.
*
바이올렛의 집은 나름 깔끔하고 괜찮아 보였으나, 일을 안 하면 그녀 역시 당장 끼니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은 빈곤함이 느껴졌다.
바이올렛과 동그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카닉 호텔의 구인 공고들을 확인하던 힐라가 물었다.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바이올렛은 정말 어떻게 할 거예요?”
“음, 정 안 되면 고향으로 돌아갈까…….”
바이올렛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차차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등까지 떠밀리니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
플립의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힐라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예요? 웬 작은 마님?”
“남편 회사 사람이라오.”
바이올렛이 문을 열어 주자 플립이 꾸벅 인사를 했다.
“작은 마님, 오늘…… 아, 손님이 계시는군요.”
“고맙게도 날 도와주다가 에이든 가문에서 해고를 당해 초대를 했네. 안 그래도 카닉 호텔의 구인 공고를 보는 중이었는데 같이 봐 주겠나?”
“그러셨군요.”
플립이 반색하며 힐라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저 역시 감사드립니다. 대표님께서 반드시 사례하실 겁니다.”
힐라는 작은 마님이라고 부른 바이올렛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옷을 입은 플립을 멍하니 보다가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나, 남편분이 무슨 회사를 운영해요?”
“아, 호텔업을…….”
“자, 작게?”
변변치 않은 귀족 가문 출신이리라 생각하고 천년만년 하겠다며 구박까지 했던 힐라가 제발 작게 사업한다고 대답해 달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데, 플립이 카닉 호텔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정중히 대답했다.
“매우 크게 하십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