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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56화 (56/176)

56화

즐거우려고 시작한 이야기였는데, 슬픈 이야기로 끝나 버리자 바이올렛의 표정이 어딘가 시무룩해졌다. 뒤늦게 그녀의 표정을 읽은 윈터가 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손님들이 식당에 잊어버리고 놓고 간 우산은 많았지. 쿠키와 우유 대신 내 몫으로 받은 빵을 잘라서 놔뒀고.”

“그랬군요.”

“다음 날 눈떠 보면 빵이 사라져 있더군. 어릴 땐 집요정이 가져간 줄 알고 좋아했는데, 생각해 보면 뭐, 남부에 흔한 주머니쥐가 물어 갔겠지.”

“자기 몫을 잘라서 집요정에게 주다니, 착하네요.”

“외로워서 집요정을 잡으면 키우려고. 미끼였어.”

윈터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 술을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그리고 말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문을 넘어 윈터의 앞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그러자 윈터가 그녀 쪽으로 몸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

“그만 불쌍해하고 잠이나 자.”

“불쌍하다고 안 했어요.”

“그런데 왜 거기서 그러고 봐.”

“외로워 보여서.”

여느 때처럼 담담한 그녀의 말에 윈터는 잠시 아내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잔을 비우고 새 술을 부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나도 한 모금 마셔도 돼요?”

다행히 윈터가 그녀에게 잔을 건넸다. 바이올렛이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을 몇 번 번갈아 반복하자 술이 약한 바이올렛은 금방 취해서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곧 윈터가 잔을 내려놓고 두 팔로 바이올렛을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잠들 듯, 반쯤 눈이 감겨 있었다. 그런 주제에 혹시 흐트러졌을까 제 옷매무새를 만지는 바이올렛을 내려다본 윈터가 중얼거렸다.

“취해서도 우아하네.”

“별로 안 취했어요.”

“취했어. 눈도 못 뜨는 주제에.”

“그건 잠이 와서…….”

“애초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윈터가 어르듯이 묻자 바이올렛이 애써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술을 너무 빨리 마시잖아요.”

“…….”

“천천히 마시게 하려구…….”

바이올렛이 이야기하다가 못 견디고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스르륵 잠이 들었다.

윈터는 일렁이는 눈동자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는 바이올렛을 한참 더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저 심한 비를 뚫고라도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늦은 아침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을 때, 윈터는 침대 아래 쓰러지듯 잠들어 있었고, 그의 손 앞에는 텅 빈 술병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병을 집어 들고 기겁을 해서 윈터를 흔들었다.

“윈터, 설마 이걸 다 마신 거예요?”

몸이 흔들리자 윈터가 괴로운 신음을 내며 그녀를 등지고 몸을 돌렸다. 바이올렛은 포기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가서 다시 윈터의 앞에 앉았다.

“이걸 다 마시면 어떡해요, 독하던데.”

“원래 그만큼 마셔.”

“그럼 더욱 심각한 문제군요.”

그녀의 잔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킨 윈터는 햇살이 눈부신지 미간을 좁히며 시간을 확인하고 물었다.

“혹시 나한테 약 먹였어?”

“아뇨, 그건 인생에 한 번으로 충분해요.”

“이상한 일이군. 이렇게 잘 자다니.”

“술을 이만큼 마셨으면 잠든 게 아니라 기절한 거예요.”

“당신은 비난도 아주 성실하게 하는군.”

윈터가 그야말로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몸을 일으키고 침실을 나섰다. 그의 말대로 바이올렛이 성실하게 그를 따라 걸으며 잔소리를 이어 갔다.

“도망치지 말고 제대로 들어요. 저렇게 큰 병에 든 술을 다 마시면 어쩌자는…….”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돌아선 윈터가 허리를 숙이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이 아침에, 이 밝은 햇살 아래에서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농염한 입맞춤이었다. 바이올렛이 당황하며 윈터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에 힘이 풀리도록 입을 맞춘 윈터가 곧바로 변명했다.

“화내지 마. 다섯 살 이후 처음 친어머니를 만났더니 슬퍼서 그래.”

무슨 짓이냐는 말과 함께 뺨이라도 맞을까 봐 아무렇게나 한 말이 잘 먹혔는지, 바이올렛의 맑은 눈망울에 순식간에 온갖 감정이 들어찼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윈터가 입꼬리를 늘렸다. 이렇게 따라다니며 걱정하는 게 귀여워서, 못되게도 자꾸만 더 걱정을 끼치고 싶어진다.

바이올렛이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세 번은 입을 맞추기로 약속했으니까. 대신 이제 한 번 남은 거예요.”

“명심하지.”

계속 보고만 있고 싶은 마음을 참고 간신히 몸을 돌려 문을 열어 보니 예상한 대로 문 앞에 크루아상과 모닝 롤, 그리고 비스킷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윈터가 그것을 들고 들어오자 바이올렛이 물었다.

“설마 여기로 룸서비스를 받은 거예요?”

이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도 잔소리만 더 들을 것 같아, 윈터는 대답도 안 하고 크림색 레이스로 장식된 실크 테이블보를 바구니에서 꺼내 바이올렛의 테이블보와 교체했다.

능숙하게 각을 잡아가며 세팅하는 모습에 바이올렛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잘하네요.”

“호텔을 운영하는 놈이 테이블 세팅을 못하면 어떡해.”

브런치를 위해 가져온, 아침에 갓 구워 폭신하고 버터 향이 물씬 풍기는 크루아상과 모닝 롤에 바이올렛의 목으로 군침이 넘어갔다. 테이블 세팅 한가운데는 바이올렛이 언제나 올려 두는, 들풀로 만든 센터피스가 다시 놓였다.

윈터가 아치형의 손잡이가 달린 코르시카풍의 네 가지 잼 플레이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부터 버터, 꿀, 살구와 사과 잼.”

마지막으로 최근 1년간 바이올렛은 보지 못했던 완벽한 형태의 하얀 반숙 달걀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윈터는 여느 때처럼 팔팔 끓인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고, 바이올렛은 아침용 홍차를 마셨다. 윈터가 일부러 끓는 온도보다 낮게 홍차를 우린 바이올렛의 잔을 턱짓했다.

“미지근한 걸 무슨 맛으로 마셔?”

“그러는 당신은 감각이 둔한 건가요? 늘 너무 차거나, 너무 뜨겁게 마시잖아요.”

“그러니까. 미지근한 걸 무슨 맛으로 마시냐고.”

둘의 확연히 다른 취향은 도저히 합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으므로, 둘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바이올렛은 오랜만에 보는 갓 구운 훌륭한 빵에 마음이 관대해져 있었다.

그녀는 우선 자그마한 크루아상을 절반으로 잘라 한쪽을 한입에 넣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머지 반쪽도 먹고 나니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반면에 윈터는 도저히 못 먹겠는지 빵을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곧바로 일어나 핌의 집에서 식재료를 얻어 왔다. 보나마나 옆집 가족이 한 달은 쓸 수 있는 돈을 챙겨 줄 걸 바이올렛도 이제는 알았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뭘 만들지 궁금하기는 했다.

“뭐 할 거예요?”

“남부식 해물찜. 남부에서 해장할 때 주로 먹거든.”

“안 먹어 봤어요.”

“당신한테 매워.”

“궁금해요.”

바이올렛은 매운 음식을 전혀 먹지 못했다. 혀가 톡 쏘는 정도이기만 해도 아파하며 접시를 밀어내 버렸다. 그런 그녀에게 매콤한 고추를 넣고 만든 남부식 해물찜은 매울 것이 틀림없었다.

남부식 해물찜은 윈터가 착취당하던 식당의 메인 요리였기 때문에 금방 만들 수 있었다. 그때 하도 먹어 한동안 먹지 않다가 나이가 드니 슬슬 어릴 때 먹던 것을 다시 찾게 되었다. 특히 남부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칼칼한 남부식 해물찜으로 해장을 했다.

윈터가 능숙하게 해산물을 손질하기 시작하자, 바이올렛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요리가 끝나고 윈터가 장갑을 낀 상태로 새우 껍질을 미리 손질하기 시작하자 바이올렛이 말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네요.”

“당신이 혼자 못 하니까 내가 손이 많이 가는 거야.”

“알려 주면 할 수 있어요.”

그녀가 찔려 하며 대답하자 윈터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핀잔했다.

“자랑이다. 이러고도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

바이올렛은 처음으로 공주님 소리에 할 말이 없어졌다.

잠시 후, 손질된 해산물들이 솥 가득 담겼다. 눈이 동그래진 바이올렛이 솥 안을 살피며 감탄했다.

“당신은 정말 요리를 잘하네요.”

“당신은 1년을 혼자 살아도 여전히 집안일에 관심이 없군.”

윈터는 이 공주님을 반드시 라크라운드로 끌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년 정도 혼자 살면 뭐라도 할 줄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옷을 꼼꼼하게 다리는 것이 은밀한 취미인 윈터만큼도 살림을 안 하고 지냈다.

윈터가 혀를 차며 웬일로 두 개가 있는 파스타 볼을 가져다 해물찜을 담았다. 세트로만 팔아서 두 개를 샀다는 건 미리부터 확인했다.

바이올렛은 어느 정도 배가 찬 상태였지만 왠지 구미가 당겨 스푼으로 빨간 국물을 조금 먹어 보곤 화들짝 놀라 혼잣말했다.

“세상에나, 매워라.”

그러더니 눈을 깜빡거리며 윈터가 먹기 좋게 손질한 새우를 집어 입에 넣었다.

“와, 굉장히 맛있네요.”

“알아.”

윈터는 하나하나 놀라는 바이올렛의 반응이 귀여워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굳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바이올렛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예의 바른 자세였으나 입술은 새빨갛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자극적인 것이라고는 한 번도 삼켜 본 적이 없어 금방 온몸으로 반응하는 건 야했고, 사랑스러웠다.

결국 너무 매웠는지 우유를 가져다 마시고 겨우 가라앉은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울어야 하는 건 당신인데 내가 눈물이 나네요.”

“대신 울어 줘서 고맙게 됐군.”

“당신도 울어요.”

“나는 다 울었어. 충분히.”

윈터가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는 지난 1년간 깊은 바다 위에 얇은 판자를 깔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언제든지 그 판자는 쪼개질 준비가 되어 있고, 죽음이 담긴 바다는 연신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어제 다시 그 판자가 완전히 부서져 몸이 가라앉고 있을 때, 바이올렛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언제나 저보다 높은 곳에 있었고, 손잡는 것을 좋아했고, 물에 빠진 사람을 두고 볼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그녀가 제 손을 잡아 줄 논거는 충분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르는데 집 안으로 리나가 달려 들어왔다. 아이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당연하다는 듯 제 전용 의자를 끌고 와 앉더니 물었다.

“무서운 아저씨가 뭐 만들었는지 궁금해서 왔어. 이거야?”

“응. 아, 리나한테는 매울 테니까 빵을 먹을래?”

“아니! 나 먹을 수 있어!”

리나가 호기롭게 말하고는 숟가락으로 해물찜을 한 숟갈 호로록 먹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했다.

“조금밖에 안 매운데? 맛있어.”

“그래? 많이 맵던데…….”

“바이올렛 매운 거 못 먹는구나?”

아이가 묻자 윈터가 놀리듯이 말했다.

“매운 것만 못 먹나, 새우도 못 까지.”

“어른인데도?”

리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바이올렛을 쳐다보았다. 그에 바이올렛은 민망한 표정으로 리나에게 빵과 우유를 내주며 화제를 돌렸다.

“리나, 빵도 좋아하지?”

“좋아하지.”

리나가 어른처럼 대답하더니 빵을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맛있는지 폭 빠져서 먹던 리나가 문뜩 생각났다는 듯 윈터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서운 아저씨는 직업이 뭐예요? 동네 어른들이 다 궁금해하는데. 코론 아저씨가 그러는데, 아저씨는 아마 직업이 부자인 것 같대.”

“정확하군.”

“내 생각에는 왕자님인 것 같아.”

리나의 진지한 분석에 턱을 괴고 아이를 보던 윈터가 픽 웃었다.

“그건 심하게 틀렸네.”

그의 냉정한 대답에 리나가 눈이 동그래져서 바이올렛을 보았다.

“아니야? 무섭고 멋있는데도?”

“음.”

대답을 잠시 생각한 바이올렛이 알았다는 듯이 탄성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혹시 정체가 비밀인 게 아닐까?”

“아! 그런가 봐!”

리나가 확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종종 리나가 하듯이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윈터를 보며 말했다.

“참고로 부자는 직업의 종류가 아니에요.”

그 와중에 틀린 부분을 지적하는 게 하도 아내다워서, 윈터는 턱을 괸 채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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