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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55화 (55/176)

55화

리네는 자기가 때려 놓고 눈이 커져서 다급하게 윈터의 얼굴을 더듬었다.

“위, 윈터. 내가 미안하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

“하옐, 하녀들보고 어머니 모셔 가시라고 해.”

윈터가 큰 소리로 부르자 문 앞에 있던 하옐이 하녀들과 들어왔다.

“위, 윈터! 제발!”

리네가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으나 하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친모가 사라진 후, 테이블을 거칠게 걷어찬 윈터가 하옐을 불러냈다. 그가 달려오자 윈터가 음울한 목소리를 냈다.

“어머니에게 적당히 돈을 쥐여 줘.”

“네에? 친어머님께요?”

“뭐 그 집 쌍둥이가 어쩌고저쩌고 하잖아. 그냥 달라는 거 줘서 보내. 귀찮으니까.”

“……예.”

하옐이 살짝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저 같으면 안 줍니다.”

그 역시 부모에게 버려져 빈민굴에서 구걸을 하며 지냈다. 윈터가 개중 머리가 좋아 보인다며 데려가 주지 않았다면 좀도둑이나 되었을 게 뻔했다. 평소 같으면 꺼지라고 당장 소리를 쳤을 테지만, 하옐과는 부모에게 버려진 공감대가 있어서, 윈터는 부모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하옐을 봐주는 경향이 있었다.

“너희 부모는 도박 빚 갚아 달라고 온 거였잖아. 상황이 다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염치가 없잖아요.”

“아버지한테는 돈 드렸잖아. 형평성 때문에 주는 거야.”

하옐이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달려 나간 후, 윈터는 발코니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옐이 리네에게 돈을 쥐여 주는 것이 보였다. 리네는 돈을 받자마자 거듭 허리 숙여 인사를 한 후 정신없이 달려갔다.

“……돌아보지도 않는군.”

윈터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줄 몰랐던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우울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미치겠는 건, 친어머니에 대한 실망감과 동시에 제 방 창문 밖을 내다보던 바이올렛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결혼 초기에 바이올렛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 부탁을 했었다.

“외출할 때 미리 말해 줄래요? 배웅해 주고 싶어요.”

윈터는 스물넷, 결혼을 하기 전까지 누구에게 말하고 외출을 해야 한다는 개념을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낯선 개념을 주장하는 바이올렛이 번거로워서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윈터가 출발한다는 걸 눈치채기만 하면 서둘러 와서 공주님스러운 놀림으로 손을 흔들곤 했다.

그러나 남편이 배웅을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니, 얼마 뒤부턴 침대 창가에서 가만히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친어머니 때문인지 바이올렛 때문인지, 윈터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

윈터는 호텔을 무작정 나와 걷기 시작했다. 참나무 숲을 지나 바이올렛의 집에 가까워지니, 때마침 밖에 나와 있는 바이올렛이 보였다.

괴로우면 그녀에게 달려오게 되는, 어느 날 생겨 버린 이 망할 습관에 자괴감이 들었다. 염치없는 것도 유전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막 집 밖에 있는 화분이 걱정되어 옮기던 참이었다. 아직 어린 싹이 자라는 화분을 안아 든 바이올렛은 제 앞에 불쑥 나타난 윈터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위, 윈터? 뭐 하는 거예요? 비가 이렇게 오는데.”

그녀가 다급하게 화분을 집 안에 내려놓는 사이에도 윈터는 따라오기는커녕 집 앞에서 그대로 비를 맞고 서 있었다.

기둥처럼 그렇게 서 있으려니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붙잡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겨우 집에 들어선 후, 윈터는 닫힌 문에 기대 스르륵 미끄러져 앉았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앞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묻자 다행히 영 입을 안 열 것 같던 윈터가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왔었어.”

“캐서린 부인께서요?”

“아니. 친어머니.”

윈터의 말에 바이올렛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찾았어요?”

“자기 발로 왔더군. 자식들이 아프니 도와 달라고.”

“설마…….”

“돈 달라고, 나한테. 그래서, 기분이 거지 같아서 왔어.”

그의 머리칼이며 목덜미로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꺼낸 지갑 역시 비에 푹 젖어 있었다. 그 안을 확인하던 윈터는 돈이 젖어 꺼내다 찢어질 것 같았는지 지갑을 통째로 바이올렛에게 내밀었다.

“이거 다 줄게. 내 기분 좀 풀어 줘.”

“…….”

윈터의 광택 없는 잿빛 눈동자 속에 죽음에 대한 갈망이 일렁거렸다.

당장 목숨을 끊어 봤자 바이올렛과 몸이 바뀔 테니 의미가 없었다.

몸이 너무 무거웠다. 차라리 제가 종이처럼 납작한 물질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세상이 덜 무겁게 느껴질까.

윈터의 얼굴을 살피던 바이올렛이 두 손을 내밀어 지갑을 받아 들었다.

“받을게요, 돈.”

그러더니 지갑을 옆에 두고 윈터를 당겨 쓰러뜨렸다.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 둔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토닥였다. 윈터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짓인지 모르겠군.”

“당신은 필요한 건 전부 돈으로 얻으려 하잖아요. 그래서…… 돈은 일단 받기로 했고.”

“…….”

“이건 내가 제일 힘들 때 받고 싶었던 거. 외로워서, 누가 이렇게 만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마음이 아픈 건데,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하더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말대로,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바이올렛의 손이 머리칼이며 어깨를 토닥이자 코앞까지 다가왔던 죽음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온전한 만족감을 느꼈다.

수도 없이 많은 땅을 사들이고, 그 땅 위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물들을 끊임없이 지어 올렸다. 그것이 유일하게 제 행복을 위한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도 그는 불만족했고, 오히려 더 큰 욕망에 휩싸였었다.

그런데 지금, 비를 흠뻑 맞은 데다 카펫도 없는 바닥에 드러누워서는 제 덩치로도 감당하지 못해 흘러넘치는 만족감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 윈터는 제게 그런 만족을 느끼게 한 여자가 제 곁을 떠나리라는 현실 속으로 되돌아왔다.

다정히 윈터를 토닥이던 바이올렛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감아 보며 말했다.

“당신 머리가 이렇게 헝클어진 거 별로 못 본 것 같아요.”

그녀의 손길에 윈터가 멈칫하고 인상을 썼다. 표정으론 싫은 것 같았는데 행동으로는 그녀의 손 쪽으로 이마를 조금 더 들이밀었다.

잠시 후 그가 움직이지 않아 바이올렛이 손을 떼자 윈터가 인상을 썼다.

“아까 내 지갑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군. 난 이것보다 훨씬 많은 노동의 대가를 지불했어.”

“당신은 여전히 같은 말도 못되게 하는군요.”

“협상 불가야. 이것만큼은.”

윈터는 처음 이 집에 들어올 때는 없던 열망이 엉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바이올렛은 비 오는 날 유독 상대를 매혹하는 말간 눈으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윈터를 젖은 상태로 오래 둘 수 없었는지 제 팔을 당겨 빼내고는 먼저 몸을 일으켜 그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감기 걸리겠어요. 샤워해요, 어서.”

“내 몸은 내가 챙겨. 아내에게 보살핌받는 멍청이는 되고 싶지 않아.”

“그걸 왜 멍청이라고 생각해요? 똑같이 서로 챙기는 거죠.”

“당신이 나보다 훨씬 약한데 똑같이 서로 챙기는 건 당신에게 불공평해.”

그가 일어나자 바이올렛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런 줄 알 테니까 어서 씻어요. 날 걱정시키면서 고집부리는 것도 그리 똑똑한 행동은 아니니까.”

그 말에는 동의하는지, 윈터는 더 고집부리지 않고 욕실로 들어갔다.

*

그를 떠밀어 놓고 바이올렛은 화로에 불을 붙였다.

기분이 영 이상했다. 지금은 그에 대한 미움보다도 어떻게 달래 줘야 하나, 하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처음엔 세 달 내내 침대로 끌고 가려 갖은 수작을 부릴 줄 알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잠자리를 거부할 방법을 고려했었다.

그런데 예상과 전혀 달랐다. 오히려 문뜩문뜩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제 쪽이었고, 윈터는 손잡는 일이 제일 즐거워 보였다.

세 달 후에 이혼해 주겠다는 사람이, 덫에 걸렸다 도망친 동물처럼 상처투성이로 불쑥 나타나서 손길을 요구한다.

이렇게 크게 다친 남자를 어떻게 저 빗속으로 다시 쫓아낼까.

결국 오늘 밤은 여기서 재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수선한 기분에 자리에 앉지 못하고 돌아다니는데 밖에서 하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 계십니까?”

바이올렛이 문을 열어 보니 우산을 쓴 그가 커다란 짐을 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하옐이 부지런히 가방 안 짐들을 정리하며 구시렁거렸다.

“겉보기엔 멀쩡하게 나가셨는데 말입니다. 비가 오는 걸 모르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작은 마님.”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반대 아닌가?”

“안 되죠. 너무 마음 약해지셔서 잘해 주셨다가 대표님이 이혼 안 한다고 달려드시면 어떡합니까? 전 두 분 이혼 찬성이거든요.”

“자네도 참.”

바이올렛이 웃더니 이 빗속에 바로 보내기 미안했는지 나가려는 그에게 괜히 더 말을 걸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떻게 돌아가려고. 어차피 남편도 자고 갈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서…….”

“그건 진짜 아닙니다, 작은 마님. 저 평생 욕먹어요.”

하옐이 웃으며 대꾸하고 꾸벅 인사한 후 집을 나갔다.

밖에서 들어온 비바람이 차가워 바이올렛이 옷깃을 여몄다. 이 세찬 비를 뚫고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건지, 남편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윈터가 목욕을 마치고 하옐이 준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바이올렛이 따끈한 레몬차를 한 잔 내밀었다.

“자고 가요.”

“내가 그렇게 불쌍해?”

기분이 나아졌는지 윈터가 차를 받으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안도한 바이올렛이 그를 흘겼다.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켜 놓고 웃음이 나와요?”

“당신은 내가 그렇게 개새끼처럼 굴었는데 달래 줄 마음이 드나?”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신이 이 비에 우산도 안 쓰고 찾아왔으니까.”

바이올렛이 여전히 염려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윈터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물었다.

“정말 자고 가?”

그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어딘가 간절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덜 말라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이 젖은 채 헝클어져 있었다.

제 어머니가 이제야 나타나 달라고 한 게 돈이었으니, 윈터가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이 바이올렛의 마음의 벽을 얇아지게 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특별히 어디 아픈 것도 아니니까 바닥에서 자요.”

“알았는데, 하옐이 술은 안 가져왔어?”

“가져오긴 했지만…… 그냥 따듯한 차를 한 잔 마시는 게 어때요?”

“일반적인 남자는 우울할 때 차 같은 거 안 마셔.”

바이올렛은 우울한 상태의 윈터가 술을 마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막을 수가 없어 유리잔을 꺼내 얼음을 넣고 하옐이 가져온 보드카를 따라 내밀었다.

윈터가 잔과 함께 병까지 뺏어 들고 바이올렛의 침대 아래 기대앉았다. 술을 들이켜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바이올렛은 윈터가 잠시라도 다른 생각을 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우유 한 잔을 따라 들었다. 그러고는 우산을 침실에 펼친 뒤 우유를 그 아래 두었다.

윈터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집요정 주려고?”

그러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크라운드의 집요정은 우산 아래 있는 걸 좋아한다잖아요.”

“그랬지.”

“어릴 때 비만 오면 우산 아래에 쿠키와 우유를 가져다 놓았어요.”

그 말에 윈터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별 악의 없이 말했다.

“우리 공주님 참 부유하게 자랐네. 난 내가 먹을 것도 없었는데.”

“…….”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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