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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54화 (54/176)
  • 54화

    도스 남매가 떠난 후, 바이올렛과 윈터도 집으로 향했다. 바이올렛의 집이 있는 참나무 숲의 길이 좁아 마차가 집 바로 앞에 설 수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숲속을 걸어 들어갔다.

    바다 냄새와 나무 냄새로 뒤덮여 집 근처로 들어섰다. 윈터가 나무에 드문드문 달린 등불들을 보며 말했다.

    “라크라운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군.”

    “그렇죠? 라크라운드에서는 소방법에 걸리니까요.”

    “여긴 전부 마법석이라 괜찮군. 불이 날 일이 없으니.”

    윈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호텔에 적용해야겠어. 마법석은 이 대륙의 특징이니까.”

    “좋은 생각이에요.”

    근사한 분위기였다. 두 사람이 흙길을 사박사박 걸어 바이올렛의 집에 도착했다.

    바이올렛이 문을 열며 말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잠깐만.”

    윈터가 무슨 핑계로 그녀의 집에 들어가서 차를 얻어 마시나, 고민하는데 갑자기 뭔가가 바짓단을 당겼다. 내려다보니 옆집 꼬마의 손이었다.

    “아저씨.”

    “저리 가. 놀아 줄 시간 없다.”

    “그게 아니라 엄마가 갑자기 배가 아파 가지고, 아빠랑 같이 병원 갔어요. 바이올렛이랑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리나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윈터를 보며 말하다가 너무 높아 목이 아픈지 두 손으로 제 뒷목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문 열린 집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바이올렛을 향해 말했다.

    “바이올렛. 엄마가 아파서 아빠랑 병원 갔어. 바이올렛이랑 있으라고, 엄마가 그랬어.”

    핌이 아프단 소식에 깜짝 놀란 바이올렛이 손짓하자 리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많이 아프대?”

    “조금 아프대.”

    아이가 대꾸하더니 종이 인형을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거 아까 축제에서 봤는데!”

    “아, 응. 거기서 샀어.”

    “엄마가 비싸다고 사면 큰일 난다고 했어. 강아지랑 집 바꿔야 된다고.”

    리나는 대답하는 와중에도 종이 인형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자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거 바이올렛 거야. 내려놔.”

    윈터가 짜증스레 말하고는 아까 산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작은 동전 주머니를 꺼내 돈을 담아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서 부모님한테 나중에 사 달라고 해.”

    “돈이다!”

    “큰돈이다. 잃어버리지 마.”

    여섯 살짜리와도 돈으로 타협하는 윈터를 보니 바이올렛은 그 한결같음이 이제는 좀 신기해졌다.

    바이올렛이 제 옆으로 돌아온 리나에게 인형을 들어 보였다.

    “일단은 이거 가지고 놀까?”

    “응! 나는 이 옷이 좋아.”

    “와, 예쁜 옷이네.”

    집에 찾아왔을 땐 겁먹어 울 것 같더니 금방 신이 났다. 윈터가 어이없어하며 멋대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능구렁이 담 넘듯이 집에 들어와 버린 윈터를 차마 아이 앞에서 쫓아내지 못한 바이올렛은 애써 그를 모른 척하며 리나와 인형 놀이를 해 주었다.

    한참 놀던 리나가 다시 쪼르르 윈터에게 가더니 말했다.

    “무서운 아저씨, 목말 태워 주세요!”

    “내가 왜?”

    “엄청 높을 것 같아서!”

    “넌 이미 얼추 다 커서 안 돼. 그건 아가들만 하는 거야.”

    “리나 아직 아가인데?”

    리나가 당당하게 반박했다. 윈터가 어이없어 코웃음을 치더니 천장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천장이 낮아서 안 돼.”

    “내가 이렇게 허리 숙일게요!”

    리나가 말로만 하면 못 알아들을까 봐 걱정이 되는지 허리를 폭 숙여 보였다.

    윈터가 헛웃음 짓더니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리나가 신나서 집 밖으로 뛰어나가자 윈터가 아이를 들어 목말을 태워 주었다. 리나가 신이 나서 들썩였다.

    “바이올렛, 이거 봐! 엄청 크지?”

    “와, 정말.”

    바이올렛이 신기하다는 듯이 두 사람을 보았다.

    아이들이야 솔직하니 윈터의 특출한 외모에 금방 호감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까칠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던 윈터가 아이와 잘 놀아 주는 것은 의외였다.

    그들은 잠깐 집 앞을 돌아다니다가 금방 집으로 돌아왔다. 윈터가 아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리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윈터에게 소곤거렸다.

    “테이블에 올라가면 바이올렛한테 혼나요.”

    아이의 말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고 웃더니 대꾸했다.

    “알아, 나도 이미 여러 번 혼났어.”

    그러더니 둘 다 바이올렛을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바이올렛은 리나를 테이블에서 내려놓으며 아이 어르듯이 말했다.

    “올라가면 안 될 곳에 올라가지 말라는데 왜 둘 다 그런 표정일까?”

    “이런 꼬맹이한테도 잔소리를 하셨을 줄은 몰랐군.”

    “아이니까 더더욱 알려 줘야 하는 거예요.”

    “나와 교육관이 다르군.”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집을 뒤져 아이가 먹을 간식거리를 찾아 꺼냈다.

    잠시 후 핌이 아이를 데리러 왔다. 다행히 축제에서 차가운 걸 너무 먹어 배탈이 난 거였다며 깔깔거리고 웃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돌아갔다.

    아이가 떠나고 나니 두 사람 사이가 조용해졌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이제 돌아가요.”

    “아직도 모르나? 난 가라고 하면 더 안 가는 사람이야.”

    “이상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바이올렛이 진심으로 말했다.

    윈터가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

    “왜요?”

    “주면 갈 테니까 줘 봐.”

    “가져가지는 말아요.”

    바이올렛의 소소한 농담에 윈터가 키득거리고 웃었다.

    바이올렛이 손을 내밀어 윈터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윈터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바라보자 바이올렛이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당신 손 잡는 거 좋아하잖아.”

    “이제 안 좋아해요.”

    “요즘은 내가 좋아해. 물들었나.”

    윈터가 가만히 손을 감쌌다. 그리고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놓았다.

    “슬슬 가요.”

    바이올렛이 말을 꺼내더니 배웅을 해 주겠다는 듯 먼저 문을 나섰다. 그녀를 따라 나온 윈터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늦었는데 자고 가라고 말이나 하지?”

    “빈말인데 진짜 자고 갈까 봐요.”

    “내가 빈말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빈말도 자기 필요할 땐 이용하는 남자라고 생각해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혀를 찼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농담하듯 말을 건넸다.

    “늦었는데 소파에서라도 자고 갈래요?”

    “됐다.”

    윈터가 투덜거리며 휙 돌아서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웃던 바이올렛이 서둘러 집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 정신 차려야겠네.”

    축제에서 데이트를 하고 나니 연애라도 하는 기분에 빠져 이것이 이혼을 위한 숙려 기간임을 잊을 뻔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테이블 쪽을 보니 건방진 자세로 앉아 있던 윈터가 잠깐씩 아른거렸다. 아이와 놀아 주던 모습도, 폭죽으로 다 터트려 버리겠다며 투덜거리던 모습도.

    그가 수없이 제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던 과거가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자꾸만 잊혔다.

    “……요망하기도 하지.”

    그녀가 혼잣말하며 고개를 휘저어 머릿속을 비웠다.

    *

    신기한 일이었다. 바이올렛과 재회한 후부터 윈터의 사라졌던 모든 감각, 감정들이 돌아왔다.

    윈터는 모처럼 잘 자고,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했다.

    감각과 감정이 돌아온다는 것이 긍정적인 일만은 아니었다. 부정적인 것들도 똑같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렛과 재회하기 전보다 훨씬 더 들떴다가, 훨씬 더 우울해졌다. 그 간극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오늘의 식사는 훌륭했다. 키론의 식사는 라크라운드 수도의 음식보다 훨씬 윈터의 입맛에 맞았다.

    사원들에게도 다행이었다. 그는 본래 성격이 더러웠으므로, 다정한 성격을 바라는 사람은 애초에 없었다. 다만 그저 얼마 전처럼 언제 화를 낼지 몰라 사람을 미치게 만들진 않았던 것이다.

    매일 만나자고 하면 바이올렛이 고통스러워할 것 같아 어느 정도 간격으로 만나자고 해야 하나 고민하며 일 처리를 하던 때였다.

    집무실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하옐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들어섰다.

    “저, 대표님.”

    “뭐.”

    윈터가 묻자 하옐이 심호흡을 크게 하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의 어머님께서…… 오셨습니다.”

    “…….”

    그의 호칭으로 윈터는 하옐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알았다. 블루밍 부인, 즉 캐서린 블루밍의 호칭은 마님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대표님의 어머님’은 분명 윈터의 생모였다.

    “……그 여자가 왜?”

    “저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일단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옐은 당장 쫓아내라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윈터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에 분노하며 복도를 걸었다. 그가 문이라도 부술세라 플립이 서둘러 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응접실로 들어서서 우뚝 멈춰 섰다.

    테이블 앞에는 피곤해 보이는 회색 눈의 아름다운 중년 여자가 있었다.

    20년이 넘어서 만났음에도 윈터는 단숨에 그녀가 제 생모인 리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생을 해서 일찍부터 하얗게 센 머리칼을 한쪽 어깨로 넘긴 리네가 윈터를 보았다.

    “세상에. 정말 많이 컸구나.”

    윈터는 어처구니가 없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다섯 살짜리를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대륙을 넘어가서는 연락 한 번 없었다. 5년 전에만 찾아와 줬어도 그는 어머니를 완벽히 용서할 자신이 있었다.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분노보다 우울함이 먼저 그를 휘감았다. 윈터가 곧 눈을 뜨고 구두 소리가 나게 걸어 리네의 맞은편에 앉았다.

    “용건이 뭡니까.”

    그의 서늘한 말에 리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용건은. 그냥 어떻게 지내나…….”

    “이제 와서요?”

    “잘 지내는 거 알고 있었단다. 오히려 내가 앞에 나오는 게 더 폐가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용건이 없으십니까?”

    윈터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자신을 찾아왔을 때는 분명히 이유가 있으리라.

    그에게 아주 조금의 재산이 생겼을 때부터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건너, 건너 알았던 온갖 치들이 어떻게든 빌붙어 보려고 찾아왔었다.

    그 이후부터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면 윈터는 불신부터 하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윈터는 아무 말을 못 하는 리네를 무심히 보다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가 한 모금을 피우고 물었다.

    “돈 빌리러 왔습니까?”

    리네는 대답도, 행동도 없었지만 그 무언이 긍정임을 윈터는 알 수 있었다.

    한참 후 리네가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살아남기는 너무 힘들었어. 알잖니. 이방인인 여자가 살아가기 얼마나 힘든지.”

    “결론부터 말해도 됩니다.”

    “알리카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했어. 사내아이 쌍둥이를 낳았는데 둘 다 심장이 많이 안 좋다더구나. 올해 열여덟 살이 되었는데, 두 아이 약값이 도무지…….”

    “아.”

    “염치없는 거 알아. 나는 용서 못 하겠지만, 그 애들은 네 동생이기도 하잖니.”

    윈터는 웃음이 나와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신이 나를 증오하는 건가. 그래서 나를 괴롭히고, 내 아내마저 괴롭게 한 건가.

    윈터가 다시 담배 한 모금을 깊게 피우고 말했다.

    “버린 자식한테 돈을 달라니요. 제가 돈이 남아도는 건 사실이지만 어머니께 드릴 돈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리네가 다급하게 말했다.

    “네 친부에게는 주고 있지 않니?”

    리네 역시 이러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지만, 제 아이가 죽어 가니 눈이 뒤집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윈터가 유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모르겠지만, 지난달부턴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스물아홉 생일을 맞아서 부모님을 독립시켜 드리려고요.”

    “윈터…….”

    “어쩌나. 조금만 빨리 찾아오시지.”

    신이시여, 나를 죽여 주소서. 신이시여, 나에게 벼락을 내리소서.

    윈터는 일생 찾지 않던 신을 지금 이 순간 간절히 찾고 있었다. 제발 나를 죽여 달라고, 신이 있다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지고 싶었다.

    리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이든 하마. 내가 뭘 하면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어머니. 그 쌍둥이는 그냥 그럴 운명인 겁니다. 나는 다섯 살에 버려질 운명이었고. 그냥 자식 운이 없었구나, 하세요.”

    윈터가 낸들 어쩌란 거냐는 듯 말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못 견딘 리네가 손을 들어 윈터의 뺨을 세게 때렸다.

    고개가 돌아간 윈터가 그대로 짜증을 냈다.

    “아, 젠장. 망할 인생.”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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