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바이올렛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키론은 좋은 곳이었지만 평생 살 수는 없을 것을 알았다. 바이올렛은 가끔 라크라운드의 싸늘한 눅눅함이 그리웠다.
바이올렛이 망설이는 표정을 지으며 불꽃놀이를 보았다. 마지막 불꽃이 터지고 조용해졌을 때,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자 그녀를 부른 청년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도스 공국의 후계자인 페런 도스였다. 그는 하얀 정복 차림이었고, 도스 공국 전통의 보석이 달린 검을 차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도 밝은 느낌이 들게 하는 산뜻한 청년이었다. 바이올렛이 금방 몸을 일으켰다.
“페런, 무슨 일이야?”
“축제 구경.”
페런이 특유의 어른스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윈터 쪽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드러누워 있었고, 전혀 인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팔을 잡아당겼다.
“소개해 줄게요.”
윈터는 못마땅한지 표정을 구겼지만 별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페런을 매우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페런은 마치 전래 동화 속에 등장하는 왕자님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깊은 진실을 담은 듯한 눈빛과 달콤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흥분하거나 거친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안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영역 다툼 중인 짐승처럼 날것의 경계를 표현하는 윈터를 조금 의아해하며 말했다.
“이쪽은…… 방금 전에 얘기한 그 소꿉놀이 같이 해 준 친구 오빠예요. 도스 공국의 후계자 페런이에요. 페런, 이쪽이 남편.”
윈터가 먼저 인사할 것 같지 않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페런이 손을 내밀었다. 윈터가 힘주어 그의 악수를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윈터 블루밍입니다.”
“예, 경에 대해 익히 들었습니다. 도스 공국 쪽에도 한 번 방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윈터의 무례한 대꾸에 깜짝 놀란 바이올렛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페런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지 담담히 대꾸했다.
“그럼 바이올렛은 별수 없이 혼자 놀러 와야겠군요.”
“…….”
그의 대답에 한 방 먹은 윈터가 쯧 혀를 찼다.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원래부터 알던 원수처럼 기 싸움을 하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페런, 샤론은?”
“마차에 있어. 불꽃놀이 보고 막 가려고 했거든.”
“아, 인사해야겠다.”
바이올렛이 마차로 가는 시늉을 하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당연히 같이 샤론에게 인사하러 갈 줄 알았는데 두 사람 다 제자리에 서 있었다.
바이올렛이 당황해하자 페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업 얘기 좀 하려고.”
바이올렛은 의아했지만 일단은 샤론을 만나기 위해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바이올렛이 마차에 올라타자 샤론이 신이 나서 오늘 축제에서 산 것들을 하나하나 뜯어 보여 주기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인형놀이를 꺼내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모처럼 까르륵거리며 장난을 쳤다.
그러다 문뜩 두 남자가 여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생각나서 바이올렛이 내다보자 샤론이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기 해? 분위기 엄청 살벌하네.”
“나도 모르겠어.”
“뭐, 서로 너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얘기겠지.”
샤론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말하자 바이올렛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페런이야 그럴 수 있지만 남편은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어. 우리 세 달 뒤에 이혼하기로 했거든. 계약서도 썼어.”
“정말? 다행이네.”
“응.”
바이올렛이 씁쓸히 대답하자 샤론이 폭소하고 물었다.
“정작 이혼 생각하니까 무섭지?”
“조금. 어릴 땐 내가 커서 이혼을 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잖아.”
바이올렛이 종이 옷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미련이 남아.”
“그럼 다시 잘해 볼 생각은 없어?”
샤론이 묻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라크라운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까 영향을 적게 미치지만 결혼이라는 게, 둘이서 하는 게 아니더라고. 두 가문이 만나는 거라서…… 둘이 죽고 못 살아도 힘든 게 결혼인데 우린 그런 것도 아니니까.”
“으음. 어렵네.”
샤론이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더니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아직도 남편이 좋아?”
“아직은 내 마음속에 남자라곤 남편밖에 없어. 그렇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들진 않아.”
1년 정도 떨어져 지내니 슬슬 그에 대한 미움과 미안함과 괴로움들이 조금은 옅어졌다.
그럼에도 남편의 곁에서 지낸 3년이 너무도 아팠기 때문에, 최근 몇 번의 만남 동안 그에게 조금만 호감이 생겨도 온몸에서 방어 기제가 발동했다.
그 방어 기제들이 그를 사랑해도 돌아오는 건 상처뿐임을 알려 주듯 제 스스로를 찔러 댔다.
“게다가…….”
“게다가?”
샤론이 재촉하자 바이올렛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뭐야, 나한테 비밀이 어디 있어?”
“술이나 진탕 마시며 말해 줄까.”
“술 마시러 갈까, 지금?”
친구가 좋긴 좋았다. 샤론이 손짓으로 술 마시는 시늉을 하자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고는 하지 말라는 듯 샤론의 손을 잡아 내렸다.
바이올렛의 웃고 있는 눈빛 속에 별수 없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게다가, 남편이 저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아주 큰 문제로 느껴진다는 말을 샤론에게 꺼내놓을 수 없었다.
제가 아니면 남편은 아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겉으론 사납고 이기적이어 보여도 가족에게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제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잘됐으니 낳아서 키우자고 한 것도 비꼬는 말만은 아니었다.
그는 아이를 바라고, 자신도 아이를 바랐다.
애초에 이런 많은 고민들은 다 무의미했다. 어차피 3개월 동안 양가 보기 좋게 노력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혼하면 그와의 관계는 끝이었다.
지금쯤이면 윈터 역시 자신만큼이나 부부로서의 끝을 받아들였으리라,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
바이올렛이 있을 때 나름 예의를 차린 건 내숭이었는지, 페런과 남게 되자마자 윈터는 곧바로 두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었다.
페런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를 경계하시는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바이올렛을 이성으로 생각한 적 없으니 안심해요.”
“내가 언제 그딴 걸 물었소?”
위협하듯 말하는 윈터 덕에 페런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궁금하실까 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 언제나 바이올렛의 친오빠 대신입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친구의 여동생은 절대 이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걸. 바이올렛을 지켜 주는 것이 내 몫이었을 뿐입니다. 경에게서 도망쳐 나올 경우 같은 때.”
그러자 윈터가 코웃음 쳤다.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친오빠가 돼. 개소리하지 마시오.”
페런은 ‘개소리’라는 말을 해군 외의 사람들에게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윈터의 저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구분 안 가는 말도 제가 공국의 후계자쯤 되니 겨우겨우 달아 주는 것임을 느꼈다.
페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웨인과 상관없이, 나와 바이올렛은 서로를 이성으로 느낀 적이 없습니다.”
“그딴 말 안 믿소. 상관도 없고.”
페런은 제가 무슨 말을 하건 윈터는 무조건 경계하고 내쫓을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바이올렛은 남편이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기억 못 할 물건처럼 여긴다고 생각하지만, 페런은 잠깐 사이에도 그게 절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그의 안에서 윈터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페런이 차별은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더라도, 살면서 거의 이방인을 만날 일이 없었던 그는 카닉 일족의 피가 섞인 윈터에 대한 희미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 사실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소용없었다.
페런은 윈터도 이 사실을 알 거라고 생각했다. 페런 이상으로 혈통 좋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던 바이올렛이 일말의 거부감 없이 그를 받아들인 것이 그녀의 인간성을 보여 준다는 것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윈터 블루밍은 남자도 넋 놓고 보게 될 외모를 가졌으니 그것도 한 역할 했을 테지만.
마차로 걸어가며 윈터가 시비 걸듯 말했다.
“도스 공국은 해군과 관광으로 먹고사는 걸로 아는데. 해군은 몰라도 관광 쪽은 나와 친해져 두면 좋소.”
“전혀 그럴 생각 없어 보이십니다.”
“난 원래 모든 사람을 싫어해서 그런 오해를 받소.”
도스 공국이 있는 도스 섬은 그리 크지 않은 섬이었고, 농사를 짓기에는 부적절한 땅이라 관광 수입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윈터의 말대로 그와 친해져 나쁠 건 없겠지만 친해진 후에 바이올렛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할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페런은 도스 공국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공국에 커다란 수익이 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윈터가 마음만 먹으면 도스 공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페런이 별말이 없자 윈터가 빈정거렸다.
“거기 도련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무례한 말 마십시오.”
페런의 말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윈터는 바이올렛에게 제가 가진 걸 전부 주고 떠날 생각이었지만, 제가 살아 있는 세 달 사이에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 사업을 제안한 것은 정말로 사업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묶어 페런이 바이올렛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할 의도이기도 했다.
페런이 윈터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내에게 그 망할 친오빠 행세, 안 했으면 좋겠는데.”
역시 질투 중이었다. 페런이 저도 모르게 실소하며 대답했다.
“거듭 말하지만 전 사심 없습니다. 친오빠 노릇도 못 한단 말입니까?”
“이봐, 도련님. 바이올렛의 진짜 친오빠 하나도 처치 곤란이오. 애초에 그쪽이 챙겨 주지 않아도 나는 아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안겨 줄 수 있소. 그쪽은 그러니까 그냥 뒷짐 지고 이득만 보면 되는 거요. 뭐가 어렵소?”
윈터는 비굴함과 강압적임을 함께 가진 남자였다. 올곧게만 자란 페런은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윈터에게 대응하기 어려웠다. 어쩐지 사기라도 당하는 기분이라 그는 일단 한 걸음 물러났다.
“정식으로 다시 이야기하죠.”
“그러지,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경께서 그렇게 부를 이유 없으십니다.”
페런의 말에 윈터는 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이라도 본 듯이 픽 웃어넘겼다.
그는 더 대화할 생각이 없는지 인사도 없이 마차에서 내리는 바이올렛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저에게 이야기할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풀어진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는 모습에 페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친 뱃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봤는데도 이렇게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 건 처음이었다.
윈터는 무엇이든 제가 원하는 쪽으로 회유하고 협박하는 것에 능숙했다.
지금까지 바이올렛을 통해 들은 윈터 블루밍은 다혈질일지언정 악랄한 사내는 단 한순간도 아니었다.
바이올렛 본인은 저 풀어진 얼굴만 봐서 윈터가 제게 얼마나 무른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