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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52화 (52/176)

52화

윈터는 셔츠만 입으면 끝이었는데도 곧바로 목욕을 하고 싶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거듭 끼얹고 나온 그의 표정이 잠자기 전보다도 피곤해 보였다.

그사이 바이올렛은 몸에 딱 맞는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들은 낡았지만 색감이 화사했다. 진주색 원단에 안감은 새빨간 색이라 묘하게 야릇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어두운 옷들에 질렸기 때문에, 자유를 얻은 지금은 그런 색의 옷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윈터는 결혼 생활 내내 아내가 어두운 옷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베릴의 편지를 받던 날, 윈터는 한동안 그것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부모에게 보내던 재정적 지원을 전부 끊은 후에는 라크라운드 본사에 남아 있는 부대표 이글린에게 베릴을 찾아 이 편지 내용을 확인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알릴 생각이었다.

바이올렛이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하던 그 많은 행사들에 진작 같이 가 줬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런 일이 생겼을까.

윈터가 씁쓸함에 잠겨 있을 때, 바이올렛이 그를 돌아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너무 좋은 옷을 입었네요.”

그러자 윈터가 바이올렛 쪽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당신이 낡은 옷을 입은 거지. 주제에 안 맞게.”

“…….”

잠시 그의 말을 곱씹은 바이올렛이 물었다.

“당신은 왜 똑같은 말을 굳이 기분 나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

“방금도 그랬잖아요. 당신 말은 한참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쁜 말이 아닌데, 처음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져요.”

“기분이 나빴으면 개새끼구나, 해야지. 한참 생각씩이나 하는 당신이 이상한 거야. 뭐 하러 용서할 구석을 자꾸 만들어 줘?”

윈터가 투덜거리더니 들고 있던 펜을 휙 테이블 위로 던져 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바보.”

“뭐?”

“됐어요.”

바이올렛이 휙 고개를 돌려 턱을 치켜들고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따라 집을 나섰다.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걷던 바이올렛이 뒤늦게 제 무례를 떠올리며 멈춰 섰다.

“안부 묻는 걸 잊었네요. 블루밍 공작 부부 두 분께서는 어떻게 지내세요?”

“매일 전보를 보내시지. 돈 보내라고.”

“매일이요?”

“어, 안 보내거든.”

바이올렛이 신기하다는 듯이 윈터를 보았다. 남편이 영원히 시부모의 편인 줄 알았었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

“이제 곧 봄 정원 파티를 열기 시작하시면 돈이 엄청 들 텐데요.”

그녀의 말에 힐끔 아내를 본 윈터가 대꾸했다.

“그게 걱정이었으면 당신한테 좀 더 잘했어야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조금 웃었다.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 몰랐네요.”

그러더니 마차 앞에서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 주면 감사하겠군요.”

“……물론.”

윈터가 그녀의 손을 잡아 마차에 타는 것을 에스코트했다. 그리고 옆에 올라타 앉으며 아내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기분이 은근히 좋아 보였다.

윈터는 그런 그녀를 따라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의 즐거움을 위해 앞으로도 가족에게 재정 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

국경을 넘으면 나오는 코르시카의 해변은 유명한 관광지라 축제 기간이 되면 제법 사람이 몰렸다. 온 사방에서 구운 해산물 냄새가 나고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으로 두 사람이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윈터는 커다란 챙이 있는 밀짚모자를 하나 골라 바이올렛에게 흔들어 보였다.

“모자 필요하지?”

“아, 귀엽네요.”

바이올렛이 걸어와 모자를 쓰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

윈터가 코르시카의 주화를 건네 상인이 잔돈을 꺼냈지만 윈터는 아예 무시하고 받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윈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

이 정도 선물은 괜찮구나, 하고 윈터는 마음이 놓였다.

3개월 후면 그녀는 굉장한 재벌이 될 테니, 그때까지 어느 정도는 재력에 익숙해져야 했다.

몇 걸음 걷다가 바이올렛이 멈춰 섰다. 윈터가 힐끔 그녀가 보는 쪽을 바라보니, 종이에 그려진 인형 그림과 그 인형에게 입힐 수 있는 다양한 종이 옷이 있었다. 윈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옆집 꼬마?”

“네? 아…….”

“……당신이 가지고 싶어?”

크게 당황하는 모습에 윈터가 재차 묻자 바이올렛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어릴 때 큰오빠랑 같이 가지고 놀던 게 생각이 나서요. 그냥 본 거예요.”

바이올렛의 말을 들은 윈터가 걸어가 가판대를 턱짓하며 말했다.

“종류별로 다 넣어.”

“저, 전부 다요?”

“몇 개 되지도 않네. 더 없어?”

“어, 없습니다…….”

“우리 한 바퀴 돌고 올 동안 더 그려. 장당 돈을 짭짤하게 쳐주지.”

직접 옷을 그려 팔던 상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더니 옷과 인형을 챙겨 건네고 돈을 받은 후 3단으로 된 색연필을 전부 펼쳐 다시 옷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윈터가 문득 바이올렛의 반응이 살짝 걱정스러웠는지 재빨리 말했다.

“내 거야.”

“이게요?”

“응. 내가 가지고 놀 거야.”

윈터가 그리 말하며 종이 인형 하나와 종이 옷을 꺼냈다. 그리고 도저히 어떻게 쓰는지 몰라 뚫어지게 보고만 있으니 바이올렛이 종이 옷을 받아 어깨와 허리의 접는 부분을 반듯하게 접었다.

그리고 종이 인형에 입히고는 추억에 잠겨 말했다.

“어릴 때 친구랑 친구 오빠랑 셋이 소꿉놀이를 많이 했어요. 큰오빠가 몸이 안 좋아서 같이 놀지는 못하니까 항상 이런 걸 구해다 주고 옆에서 보고만 있었는데.”

“…….”

“큰오빠 생각이 나네요.”

바이올렛이 종이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웨인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항상 내 편이고, 다정하고, 잘 웃고……. 그런데 몸이 약해서요. 그래서 나는 살면서 속에 단단한 뼈대를 가진 사람이 좋았어요. 그래서 당신의 청혼이 싫지 않았었나 봐요.”

“나를 이상적으로 여겼나?”

“네. 정확한 표현이네요.”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했다.

윈터가 무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실망했겠군. 알고 보니 심지가 약해 빠진 놈이라.”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에요.”

“당신은 그런 편이야.”

“네?”

“당신은 뿌리가 깊은 수초 같아. 물이 세차게 흘러도 뽑히지 않는.”

“왜 하필 수초죠?”

“당신 식물 좋아하잖아.”

“나무도 있고.”

“나무라기엔 작잖아.”

윈터가 놀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바이올렛은 축제 마지막 날을 맞아 사방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와 재고 처리를 위한 가격 인하와 춤과 노래와 술판이 뒤섞인 소란스러움을 무척 즐거워했다. 윈터가 물었다.

“남부 축제는 간 적이 있나?”

“아뇨.”

“축제가 재미있으면 그런 것도 가 보지 그랬어.”

“나중에요.”

바이올렛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전환했다. 윈터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어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축제를 갈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3년 내내.”

“나에게 말했어야지.”

“또 그거예요? 말했잖아요. 난 항상 필요한 게 있으면 당신에게 말했어요.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 줬어요. 나는 그래서 미련이 없어요. 당신이 집에 오지 않아도 식탁에 앉아 기다렸고, 필요 없을지 몰라도 손수건에 자수도 놓아 봤고, 식사 준비에, 가진 모든 장신구를 걸치고 당신의 배웅을 나간 적도 있어요.”

“…….”

“다시는 그따위 말하지 말아요. 당신에게 말했어야 했다고.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이 이상 할 수 없었어요.”

바이올렛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하고 제 팔을 붙잡은 윈터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더니 검지를 펴 그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줘서 날 당기지 말아요. 당신 마음대로 나를 움직이려 하지 말아요. 다시는.”

윈터가 자신을 무섭게 보고 있는 바이올렛을 마주 보았다.

아내를 허리도 펼 수 없는 작은 상자에 한참 가둬 놓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도망친 후, 한참이 지나서야 허리를 펴는 방법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제가 3년에 걸쳐 차근차근 망가뜨렸던 바이올렛 로렌스가 아니었다.

윈터는 이전에도 제가 아내를 썩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후, 그는 제가 아내에게 가진 마음이 고작 내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첫날, 바이올렛을 마주치던 그 날 아내가 싫어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의 강직함, 보수적임, 정의 같은 것들을 동경했다. 그가 가장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을, 저보다 한참 어린 제 신부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다. 자신은 아직도 다 자라지 못한 어른이었다.

“앞으로 주의하지. 매번. 매 순간.”

그가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해야 한다면 좀 더 언성을 높여 싸울 생각이었던 바이올렛은 그가 곧바로 수긍해 버리자 다소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나올 줄 몰랐네요. 고마워요.”

“불꽃놀이 보러 가자.”

말을 마친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가락 끝을 간당간당 잡았다. 어울리지 않게 애교가 섞인 듯한 행동에 바이올렛은 별말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호텔이 지어지고 있는 언덕으로 바이올렛을 데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풀밭 위에 풀썩 앉거나 누워 있었지만 바이올렛은 그런 행동을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윈터는 그런 바이올렛을 알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 손으로 제 손수건을 옆에 툭 던졌다. 그리고 자신은 풀밭 위에 대뜸 드러누워 버렸다.

바이올렛이 그런 그를 가만히 보더니 몸을 숙여 손수건을 집어 풀밭 위에 펼치고 그 위에 앉았다.

날씨가 적당한 날을 골라 왕성 정원에서 크고 좋은 천을 깔고 피크닉을 즐긴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 곳에나 대충 앉아 본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불꽃이 화려했다. 넋을 잃고 불꽃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눈이 동그래져서 말했다.

“이렇게 작은 축제인데 폭죽을 저렇게 많이 써도 되나…….”

말하다 보니 이상했다. 저 정도 불꽃을 터트리려면 이 축제 수익을 다 더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바이올렛이 휙 윈터를 보자 그가 태연히 이실직고했다.

“예쁘니까 됐잖아. 다들 즐거워하고.”

“정말이지.”

“모처럼 데이트하는데 사내놈이 어떻게 빈손으로 와. 비싼 거 사 주면 또 다 팔아 버릴 거 아냐. 못 팔게 다 터트려 버릴 거야.”

윈터가 손으로 폭죽을 가리키며 고집스럽게 말했다. 바이올렛은 기가 찼지만 선물을 사 주면 팔아 버릴까 봐 폭죽으로 대신한다는 그의 마음이 어쩐지 가엽고 귀여워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녀가 웃자 윈터가 만족한 듯 저도 따라서 입꼬리를 늘였다.

불꽃놀이가 끝날 즈음, 두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윈터가 그녀를 불렀다.

“바이올렛.”

그녀가 돌아보자 윈터가 말했다.

“호텔 오픈 하면 라크라운드로 돌아가자.”

윈터는 수도의 제 집에 언젠가 바이올렛이 오면 보여 줄 온갖 좋은 것들을 채워 놓았다. 정원에는 진귀한 식물들이 가득하고 수십 종의 동물들이 뛰어놀았다.

바이올렛이 대답이 없으니 윈터가 짓궂게 말했다.

“집에 공작도 있어.”

“공작이 있다고요?”

“어, 엄청 화려한 놈들로.”

“농담이죠?”

“왜 농담이야?”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불꽃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라크라운드가 당신의 고향이잖아. 라크라운드 사람치고 자기 고향 떠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물론 다른 나라의 사람들도 고향이 멀어지면 그리워하기 마련이겠지만.”

“…….”

“어차피 이혼하면 당신은 라크라운드에서 살게 될 거잖아. 그러니 돌아가자.”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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