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바이올렛은 키론에서 세 시간이 떨어진 에이든 가문에서 급한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깊은 잠이 들었다.
예핌추크 가문에서 파티를 하며 바이올렛을 본 적이 있던 에이든 가문의 아가씨가 불러내서는 일을 시키고 온갖 트집을 잡으며 바이올렛을 괴롭혔다. 뭔지 몰라도 파티에서 단단히 눈 밖에 난 일이 있었던 게였다.
돈 버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늦게 집에 돌아온 탓에 기절하듯 잠들었던 바이올렛은 윈터의 목소리가 들리자 졸음을 쫓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아직…… 약속 시간 멀었는데요.”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말하자 그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10시 정도면 일어났을 줄 알았지.”
“일이 많아서 새벽에 집에 들어왔어요.”
“뭐? 위험하잖아.”
“그래도 이렇게 연결받는 것처럼 좋은 기회도 없는걸요. 준비해서 나중엔 가게도 차릴 생각이에요.”
바이올렛이 졸음을 다 쫓지 못해서인지 살짝 알딸딸한 상태로 바닥에 내려놓았던 단단한 종이들을 들어 보였다.
그 위에 바이올렛이 직접 쓴 근사한 필체의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아직 멀긴 했지만 나름 이름도…… 아.”
무심코 종이를 내밀던 바이올렛은 팔짱을 낀 상태로 한 손을 올려 입을 틀어막는 윈터를 발견했다. 그는 지금 바이올렛의 행동이 웃겨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안 보여 줄 거예요.”
그녀가 휙 돌아서며 종이를 치우려 드는데 윈터가 팔을 뻗어 그것을 뺏었다.
“어디 보자.”
“싫어요.”
“사업 조언은 나에게 듣는 게 좋지. 돈 주고도 못 사. 나에게 한마디라도 조언 얻어 보고 싶어 하는 멍청이들이 줄을 섰다고.”
윈터가 말하며 종이들을 확인했다.
비밀의 화원이라든지, 바이올렛 꽃집이라든지 하는 창의력이 돋보이진 않는 이름들이었다. 그게 바이올렛다워서 귀여웠다. 넘기다 보니 ‘블루밍’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윈터가 그것을 삐딱하게 들여다보자 바이올렛이 다시 종이를 뺏으며 말했다.
“그건 안 써요.”
“왜. 꽃이 핀다는 의미니까 딱 좋잖아. 당신 성이기도 하고.”
“세 달 뒤에는 아니에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약속도 했잖아요.”
“혹시 모르잖아. 그 전에 내가 다시 좋아져서 이혼 같은 건 하기 싫어질지도.”
윈터의 말이 놀림이라고 생각한 바이올렛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당신은 별것 아니라고 여길지 몰라도 나는 정말…….”
“알아.”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다른 남자 아이를 가졌다고 확신했잖아요. 그때.”
바이올렛은 허망한 표정으로 윈터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당신은 몰라요.”
“…….”
“내 배 속에 당신 아이가…… 있는 줄 알았던 그때, 그때는.”
바이올렛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윈터는 그 착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편지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피해자였다. 자신 또한 어느 정도는 억울한 면이 있지만 다짜고짜 그녀의 아이를 다른 남자의 아이라 매도하고,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 폭언을 하며 감시했던 것은 분명 제가 선택한 행동이고, 제 잘못이었다.
그녀가 제 곁에서 3년이나 버틴 것도 대단했고, 죽음 이후에 몸이 바뀌고 다시 수도에서 살아갈 마음을 먹었다는 건 더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자신이 이토록 죽음에 대해 확고한 의지를 가진 상태에서 바이올렛이 자신을 매도했다면 제가 지금 당장, 결국은 죽을 때까지 죽음을 반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을까.
제발 아니었으면 했다. 거센 우울함으로 몸에 수천, 수만 개의 균열이 생겨 바닥에 부스러질 것 같은 이 감정을 그녀는 느낀 적이 없기를 바랐다.
윈터가 말했다.
“아니면, 세 달 뒤엔 내가 세상에 없을 수도 있잖아.”
“뭐라고요?”
바이올렛의 화를 풀어 주려고 한 말이었는데 오히려 아까보다 더 화가 난 표정이라 윈터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오픈 파티에 꽃을 한번 책임져 줬으면 좋겠군.”
“당신 파티요?”
“그래. 성공하려면 인맥이든 뭐든 쓸 수 있는 건 다 사용해야지. 그곳에서 꽃을 한 번만 담당하면 유력한 가문과 연결이 될 거야.”
바이올렛 역시 그것이 큰 기회임을 알았기 때문에 거절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윈터가 가까이 걸어오더니 졸음이 잔뜩 고인 그녀의 눈을 손으로 가리켰다.
“데이트 약속은 5시니 쭉 자.”
“애초에 왜 이렇게 일찍 온…….”
그녀의 몸이 번쩍 들렸다. 얼떨결에 윈터의 어깨에 엎드려진 바이올렛이 놀라서 물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죠?”
“너무 피곤해서 걸음도 못 옮기실까 봐. 마차라고 생각해.”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휙 그녀를 눕히고 자신도 구두를 벗어 던진 후 그녀의 옆에 드러누웠다. 침대가 작아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윈터가 눕자마자 침대가 꽉 찬 데다가 장신인 그의 종아리부터 침대를 벗어났다.
바이올렛이 못 참고 윈터의 가슴팍을 톡 때렸다.
“당신 정말 왜 이렇게 무례해요?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게다가 누구 마음대로 침대에 올라와요?”
“세 달 뒤면 안 볼 사람에게 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당신은 신사잖아요. 매너가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주제에 무슨.”
“언제까지 그렇게 본인을 비하할 건가요?”
“당신 앞에서는 아마 우리 둘 중 누가 죽을 때까지 이러겠지. 게다가 어쨌든 서류상으론 내가 남편인데, 잠깐은 한 침대 쓸 수 있잖아.”
본색이 고지식한 바이올렛은 ‘서류상 남편’이라는 말에 대꾸할 말을 잊고 멈칫했다. 그러나 곧 다시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더워요.”
“난 남부 출신이라 안 덥습니다, 수도 아가씨.”
윈터가 자신을 밀어내려는 바이올렛의 모든 말을 능청스레 쳐 내 버리고 눈을 감았다.
이 좁은 침대에 바이올렛이 누울 공간을 만들고 나니 윈터의 몸 절반은 침대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이 침대에 같이 올라와 드러눕는 건지 바이올렛으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안 덥다는 건 순 거짓말이었다. 그는 오히려 바이올렛보다 더위에 약했다. 심지어 그의 몸에 딱 맞게 맞춘 셔츠도 탄탄한 몸에 휘감겨 몹시 불편해 보였다.
“셔츠 불편해 보여요.”
그녀가 지적하자 윈터가 서슴없이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을 말려야 한다고 바이올렛은 머릿속으로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는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육질의 납작한 가슴을 보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마치 햇살을 모아 만든 남신 같아 보였다. 윈터가 셔츠를 벗어 바닥에 대충 던졌는데 그의 움직임을 따라서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들이 여실히 보였다.
윈터가 다시 드러누울 즈음엔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윈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 내리며 인상을 쓰고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신사가 숙녀 앞에서 탈의를 하는 것도 무례인가?”
“당연하죠.”
“불편해 보인다며. 말을 잘 들어도 불만이야? 도대체 어떡하라고?”
“벗으란 말은 아니었잖아요. 그냥 그래 보인단 말이에요.”
“난 원래 불편하면 벗어. 당신도 그랬으면 참 좋겠군.”
성질이 나서 멋대로 말하다가 속에 있는 말까지 확 해 버렸다. 바이올렛이 세상에 두 명은 없는 저질 쓰레기를 보듯 바라보자 윈터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침대 아래로 내려가 누웠다.
“빨리 자. 잡아먹기 전에.”
“사람은 못 먹어요.”
“보수적인 시각이군.”
말을 마친 윈터가 먼저 눈을 감았다. 바이올렛은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전날 밤을 새워서 일하며 너무 진이 빠졌는지 얼마 못 가 스르륵 잠들고 말았다.
윈터는 잠시 후 눈을 뜨고 곤히 잠든 바이올렛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가 멈췄다.
*
그 후로 서너 시간 후에 눈을 뜬 바이올렛이 침대 아래를 보니 윈터가 담요를 덮고 잠들어 있었다.
바이올렛으로서는 그와 이렇게 얽혀 있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바이올렛이 윈터 쪽으로 몸을 숙여 깨우려고 손을 들었다가, 저도 모르게 진하고 곧은 눈썹을 건드렸다.
그는 나이가 들어 보이려고 늘 노력하는 편이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사업체를 운영했고, 이방인인 혼혈이기까지 하니 이런 체구에도 불구하고 얕보이기 쉬웠던 것이다.
예전엔 그가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딱 제 나이로 보였다. 각도에 따라서는 오히려 어려 보이기도 했다. 그는 상당히 제 외모 관리에 신경을 쓰는 남자였으므로 나이가 들수록 또래보다 오히려 어려 보이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이마에서 코, 인중, 입술, 턱으로 떨어지는 직선이 명화처럼 완벽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어도 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겼다. 게다가 상의를 벗고 있으니 우두머리 표범 같은 그의 몸까지 눈에 들어왔다. 가슴통이 두껍고 허리는 늘씬해 더없이 이상적이었다.
바이올렛도 그걸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를 바라볼 때 제 안에서 울렁거리는 이 감각이 성욕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극도로 보수적인 교육을 받은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깜빡 잠들었던 윈터가 눈을 떴다.
“아, 막 깨우려고 했는데.”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바이올렛이 서둘러 말하자 윈터가 납득했는지 별말 없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물었다.
“덥다며. 왜 옷을 꽁꽁 싸매고 있어?”
“당신이 있어서요.”
“없으면 벗어?”
“네.”
“없다고 생각하지 그래.”
“당신 머릿속엔 요즘 음탕한 생각밖에 없나 봐요.”
“1년쯤 외로우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더군.”
“그럼 다른 여자분을 만나지 그랬어요? 어렵지 않을 텐데.”
“돈 보고 달려드는 여자에겐 취미 없어.”
“당신에게 돈만 보고 접근하는 여자는 없을 거예요. 돈을 제외해도 당신은 괜찮은 남자니까.”
그녀의 말에 멈칫한 윈터가 인상을 쓰고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혼을 하려고 해?”
“나한테는 괜찮지 않았으니까.”
“맞는 말이군.”
고개를 끄덕이던 윈터가 그대로 바이올렛을 쓰러뜨렸다. 그러더니 놀란 그녀의 손을 깍지를 껴 잡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입 맞추고 싶으니 허락해 줘.”
“그럴 것 같았으니 허락할게요.”
“아, 우아하셔라.”
바이올렛은 세 번을 그냥 지금 다 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할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데다 매번 이렇게 이유 모를 긴장감으로 불편할 때만 키스를 하겠다고 할지 모르니까.
바이올렛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윈터는 그 상태로 몸을 낮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윈터가 바이올렛의 턱을 손으로 잡아 입술을 벌리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랫니를 힘주어 누르자 그녀의 입이 완전히 열렸다.
윈터는 그녀의 입술과 치열 안쪽을 혀로 쓰다듬으며 두 팔로 그녀의 허리와 허벅지를 감아 제 무릎으로 들고 와 앉혔다. 고개를 숙이고 입안 곳곳을 헤집던 그에게 홀려 있던 바이올렛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밀어내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예요?”
“우리가 언제 시간 정했어? 계약서 보여 줘?”
“합의를 해요.”
“그래, 합의해. 지금부터 몇 분 더 하고 싶어?”
윈터가 인상을 쓰며 묻는데 몇 분 더 하자고 말하려니 민망했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몰라요, 당신 양심껏 해요.”
바이올렛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윈터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핀잔했다.
“누구한테서 양심을 찾아.”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