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49화 (49/176)

49화

그러나 바이올렛은 윈터에게 언제나 범접할 수 없이 고귀한 공주님이었으므로 제 스스로도 그 말이 절대 튀어나오지 않을 거란 보장을 못 했다. 윈터가 확신 없는 투로 말했다.

“노력은 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는 건 그냥 넘어가. 당신이 너무 공주님스럽게 군 책임도 있으니까.”

“그러죠.”

“기한은 5월 20일로 하지. 정확히 세 달 뒤.”

“그렇게 해요.”

세 달의 기한이 생겼다.

윈터가 상상 이상의 수확에 기쁜 표정을 짓는데 바이올렛 역시 어느 정도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이 지나면 당신과는 정말로 끝이군요.”

“그렇지.”

“앞으로 만날 일도 없겠네요.”

생각만 해도 후련하다는 듯한 그녀의 말에 윈터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비웃듯이 말했다.

“만나고 싶어 해도 내가 안 만나 줄 거야.”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잠시 뜸을 들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봄 기분이 물씬 나는 연노랑 테이블보가 덮인 둥근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간단히 서로 협의한 내용들을 종이에 적었다.

결혼도 정략결혼이더니 이번엔 계약 내용이 주렁주렁 달린 숙려 기간이었다.

윈터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맞은편에 앉아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바이올렛을 즐거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죽기 전에 합법적으로 그녀와 만날 수 있는 세 달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확 좋아졌다. 그녀가 원하는 것도, 제가 원하는 것도 이루어지는 셈이다. 제가 가진 걸 전부 그녀에게 안겨 줄 수 있고, 그녀에게는 제가 사라져 주는 계약이 될 테니.

“질문이 있는데.”

“말해요.”

바이올렛이 언제나처럼 턱을 조금 들고 우아하게 허락하자 윈터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숙려 기간이란 게 최대한 이혼하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의미잖아. 노력의 방법을 정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요.”

“우리가 만나는 횟수를 정확한 숫자로 적자고. 아, 그리고 키스도.”

“만나는 횟수는 괜찮지만 키스는 안 돼요.”

키스가 거론되자, 바이올렛은 윈터가 제 도망을 그저 1년짜리 출장 정도로 느끼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말 상대 정도는 해 줄게요.”

“말 상대 안 해 줄 거잖아. 세 달 동안 당신이 싫다, 무례하다, 내 집에서 나가라, 이딴 소리만 듣다가 순순히 이혼이나 하라는 건가?”

“네.”

“세 번.”

윈터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딱 세 번만 하자. 키스.”

바이올렛은 망설였다. 그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지독히 달아 목덜미까지 저릿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녀는 윈터와의 인연을 여기서 확실하게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그런 달콤함은 그녀를 다시 그 지옥에 머물게 하는 덫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이 지나 그녀가 윈터에게 가졌던 복잡한 감정들은 아마도 희석되었을 것이고, 그까짓 입맞춤 세 번으로는 제 이혼에 대한 굳은 결심이 흔들리지는 않으리라. 오히려 그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정리되었는지를 확인할 기회일지도 모른다.

바이올렛이 한참 생각을 정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좋아요, 세 번. 대신 잠자리는 안 돼요.”

“좋아. 참고로 당신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상관없어.”

윈터가 놀리듯이 하는 말에 바이올렛이 살짝 인상을 썼다. 모처럼 보는 저 타박하는 듯한 얼굴이 반가워 윈터가 저도 모르게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그렇게 웃는 제가 어색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윈터가 펜대를 굴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스킨십은 최대한 협조적으로 응할 것.”

“나머지가 뭔지 정확히 해요.”

“악수와 포옹.”

“허락할게요.”

계약서가 확실히 완성되자 한 부는 윈터가 챙기고 다른 한 부는 바이올렛이 침대 아래에 두었다.

윈터가 꼼꼼히 계약서를 숨기고 돌아온 바이올렛을 마주 보며 짓궂게 말했다.

“계약이 발효되는 건 지금 당장인가?”

“네.”

그녀가 대답하기 무섭게 윈터가 바이올렛의 허리를 한 팔로 확 끌어안았다. 놀란 바이올렛이 숨을 날카롭게 들이쉬었다.

그녀가 두 손을 방어적으로 들어 올려 제 몸과 윈터의 몸 사이에 두었다. 윈터가 다가오자 그녀가 피하느라 유연하게 허리가 뒤로 넘어갔다. 윈터가 픽 웃었다.

“발레를 해서 유연한 건가?”

“이렇게 갑자기…….”

“바로 해 버리는 게 낫지 않나?”

바이올렛이 자꾸 피하려 하자 윈터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배꼽 근처를 간질였다. 그 덕에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 허리를 바로 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간지럼을 많이 타네?”

“지, 지금 뭐 한 거예요?”

“나쁜 짓.”

그는 원래 입을 맞추기 전에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라는 걸, 바이올렛은 이전에 내기에서 지며 알게 되었다.

바이올렛은 그게 정말로 맞지 않았다. 그 긴장감이 두려웠다.

윈터가 가까이에 있어 그의 옷에서 나는 빳빳한 새 옷 냄새나 향수 냄새, 애프터 셰이브와 아주 조금 남은 담배 냄새 같은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그에게서는 일정한 체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거의 매번 옷을 바꿨고, 향수도 툭하면 바꿔 댔으니까.

그런데 그런 수도 없이 바뀌는 것들이 합쳐지면 어째서 윈터 블루밍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을 감아도 그가 입을 맞추지 않아, 바이올렛이 다시 눈을 떴다.

윈터는 가만히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야만적이던 회색 눈동자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빛이 서려 있었다.

바이올렛으로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그는 지금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하옐이 묘사한 윈터는 악마에,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성탑 같았는데, 지금 바이올렛의 눈에 보이는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바이올렛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바로 세우고 팔을 풀었다.

“아껴 둬야지.”

“……야비하군요.”

바이올렛의 미간이 좁아지는 게 귀여워 윈터가 유쾌하게 웃었다.

*

다음 날 핌이 리나를 데리고 찾아와 바이올렛에게 호들갑스레 말했다.

“우리 집만이 아니에요, 바이올렛. 다른 집에도 다 이렇게 큰 햄이 와 있더라니까? 그런데 왜 바이올렛 집에는 안 온 거예요?”

“그러게 말이오.”

“누락 됐나? 하여튼 태어나서 이렇게 크고 좋은 햄은 처음 봐. 정육점이라도 차린 기분이라니까요?”

돈이 많이 드는 선물을 보내지 말라고 계약서에 적었더니, 온 동네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있었다. 하여튼 정말 뭐 하나 방심할 수 없는 남자였다.

바이올렛의 무릎에 올라앉은 리나가 소중히 들고 온 햄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리나랑 같이 먹자, 바이올렛.”

“그럴까?”

바이올렛이 접시를 덮은 보자기를 걷는 사이, 핌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같이 얘기하러 가요. 햄이랑 보상금도 들었어요, 공사가 시끄럽다고.”

“핌은 바쁘니 나 혼자 가도 괜찮소.”

“호텔이 뭐 얼마나 멀다고 그래요. 게다가 바이올렛은 그런 거 달라는 말 못 하잖아. 내가 대신해 줘야지.”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유가 전혀 아니었지만 쉬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핌의 힘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 가는 내내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다가 거의 도착해서야 아픈 척을 할걸, 하는 생각이 났다.

정신 차려 보니 호텔 건물 앞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일사분란하게 일하던 직원들 중 하나가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직원의 질문에 핌이 말했다.

“그 왜 보상금으로 보내 준 거 있잖아요. 우리 마을에서 딱 이 사람만 못 받았어요. 누락 됐나, 하고.”

“그러셨군요. 들어오시죠. 곧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괜찮다고 거절을 해야 하는데 타이밍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직원의 안내로 로비를 따라 걷기 시작하자 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이게 아직도 다 지은 게 아니라니!”

그러자 직원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제 시작이죠. 겉만 다 만들었지, 속은 텅텅 비었거든요. 저희 회사의 디자이너들이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포함한 세 사람은 직원에게 이끌려 빈 응접실로 들어섰다. 간단한 간식들이 먼저 나오자 리나가 두리번거리더니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바이올렛! 이게 뭐야?”

그러자 바이올렛이 몸을 숙여 리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초콜릿. 먹어 보렴.”

바이올렛이 포장을 조금 뜯어 내밀자 리나가 용감하게 한입에 다 넣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맛있어!”

“그러니?”

그러자 옆에서 핌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초콜릿이구나. 나도 처음 봤네.”

“그랬소?”

“아휴, 좀 비싸야죠.”

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윈터가 들어왔다.

바이올렛은 그가 나타날 것을 예상했으면서도 난처한 표정이었으나, 윈터에게 거리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제가 끼어들고 싶으면 어느 곳에나 끼어드는 사람이었다.

윈터가 포마드로 머리 손질을 하고 원색의 넥타이까지 매고 와서는 풀썩 의자에 앉았다.

리나가 기겁을 해서 핌의 팔을 꾹 잡았다.

“엄마! 바이올렛이랑 결혼한 무서운 아저씨야!”

“아, 아이고, 왜 여기 계시나…….”

핌이 말하더니 힐끔 바이올렛 쪽을 보았다. 바이올렛이 어딘가 억울한 표정으로 해명했다.

“남편이지만 이혼 조정 기간 중이라오. 그러니까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지.”

“그렇다는군.”

윈터가 태연히 대꾸하곤 한 손으로 바이올렛이 앉은 의자를 당겨와 제 옆에 두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리나가 소곤거렸다.

“바이올렛, 이혼이 뭐야?”

“결혼을…… 음, 안 한 걸로 하기로 하는 거야.”

“결혼을 안 한 걸로 하기로 해?”

“응, 이 아저씨는 너무 무서워서.”

“그래? 잘했어.”

리나가 이해한다는 듯 어른스럽게 대꾸하자 상황에 상관없이 어른 셋은 동시에 실소가 터졌다. 이내 윈터가 헛기침을 하더니 핌과 리나에게 말했다.

“두 분은 돌아가지? 마차를 준비해 줄 테니.”

“잠깐만요. 바이올렛도 데려가야겠어요.”

핌이 단호하게 말하자 팔짱을 끼고 앉은 윈터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시든가. 그런데 혹시 바이올렛한테 그건 들으셨나? 본인이 라크라운드 공…….”

그 순간 바이올렛이 윈터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할 이야기가 많은가 봐요. 같이 와 줬는데 미안해요, 핌. 먼저 갈래요?”

윈터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꼬마는 맛있으면 얼마든지 간식을 더 챙겨 주지.”

“그럼 라즈네 언니 거랑 카린이랑 헤나랑…….”

리나가 열심히 고사리손을 접자 윈터가 대답했다.

“그래, 그래. 동네 꼬마들 다 먹을 만큼 챙겨 줄게. 가자, 배웅해 줄 테니.”

윈터가 일어나 바이올렛이 따라나서려 하자 그가 막아 세웠다.

“당신은 여기 있어. 빠져나가려고 들지 말고.”

바이올렛이 못마땅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살면서 제 신분을 가지고 협박당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옛’ 신분으로.

그사이 윈터는 모녀를 초콜릿 창고로 데려가 각자에게 바구니를 안겨 주었다. 리나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뛰어다니며 초콜릿을 고르는 사이 윈터가 핌에게 물었다.

“재혼에 관한 건 물어봤나?”

“물어봤어요. 아마 재혼은 자기 마음대로 하기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오빠가 많이 관여할 것 같다면서.”

“……아, 그렇군.”

이혼을 하게 된다면 분명 에쉬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돈을 받고 결혼을 시켰을 때도, 바이올렛이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재혼 또한 그렇게 될까.

윈터는 종종 바이올렛이 무슨 마음으로 저와의 결혼을 허락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열여덟 살의 그녀에게, 오로지 작위를 위해 돈을 주고 결혼하자던 남자에게.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