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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48화 (48/176)
  • 48화

    바이올렛이 말했지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졌다. 결국 한 사람이 바이올렛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빚이 있다면서? 남편은 어떻게 저렇게 번듯해?”

    그걸 엿들은 윈터가 시답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빚은 나한테 진 거니까 그만들 떠들고 꺼져.”

    “나, 남편한테 빚을 지다니?”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자 바이올렛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말하자면 그러니까…… 친정이 남편에게 돈을 많이 빌렸어요.”

    “어머나, 세상에!”

    그렇다면야 이해가 갔다. 동시에 저렇게 무서운 사내가 빚을 받으러 왔다고 하니 다들 오금이 저려 왔다.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며 마을 사람들 등을 떠밀었다.

    “여기서 이러고들 있지 말고 가세요. 다들 일해야죠.”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봐도 위협당하고 있는 바이올렛을 구해 주고 싶었지만 다들 예핌추크 가문의 소일거리로 먹고사는 연약한 소시민들이라 윈터에게 덤벼들 수가 없었다. 뱃사람들을 불러와야 하나, 고민만 할 뿐이었다.

    윈터는 운 좋게 얻은 아내와의 시간을 방해받자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내의 동네 사람들에게 밉보여 봤자 좋을 것은 없어 보였다.

    그는 자신을 경계하는 사람들에게 뒤늦게 인위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홍색의 꽃무늬가 있는 앞치마를 한 여자에게 말했다.

    “그 앞치마를 보니 과일 가게 하는 모양이군.”

    “네, 맞아요…….”

    “이 정도면 가게에 있는 과일을 다 살 수 있나?”

    윈터가 라크네 지폐를 지갑에서 있는 대로 꺼내 내밀자 과일 가게 아니스가 깜짝 놀라 지폐를 받아 들었다.

    “이거면 다음 주 화요일에 새로 들어오는 과일도 다 사실 수 있는데요!”

    “그건 알아서 하고, 오늘 과일 싹 다 꺼내서 파티라도 해.”

    “으악!”

    아니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요즘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아니스가 바이올렛을 향해 어떻게 해야 하나 간절한 표정을 짓자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윈터의 행동을 기억해낸 그녀가 한숨을 폭 쉬며 가라는 의미로 손짓했다. 신이 난 아니스가 서둘러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과일 먹어요, 과일! 오늘 복숭아가 정말 끝내줘요!”

    “복숭아!”

    “바이올렛도 얼른 마을 회관으로 와!”

    사람들이 신이 나서 달려 나갔다.

    윈터는 사람들이 나가는 것을 보며 어깨를 들썩이고 웃다가 바이올렛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을 회관?”

    돌아보는 그의 허리의 탄탄한 근육이 셔츠 위로도 느껴졌다. 바이올렛이 무심코 그의 허리선을 보았던 시선을 문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키론 사람들은 원래 틈만 나면 마을 회관에 모여요.”

    “개인주의적인 라크라운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군.”

    윈터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종종 윈터를 떠올리던 바이올렛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그의 태연함이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탄 윈터가 입을 열었다.

    “세워.”

    마차가 멈춰 섰다. 그는 창문 너머로 마을 회관 앞을 보고 있었다.

    윈터가 턱을 괴고 시선으로 바이올렛을 찾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마을 아이들이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다들 피크닉이라도 하듯이 가득가득한 과일을 꺼내 나눠 먹으며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다.

    “……웃긴 하네.”

    사람들은 바이올렛을 좋아했지만, 정작 그녀에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것들은 어린아이들뿐, 열두어 살만 넘어서도 그녀를 불편하게 여겼다.

    하기야, 온갖 좋은 것을 가진 상태의 윈터조차 바이올렛의 앞에 서면 어려움을 느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게 성장한 이들에게 바이올렛은 이질적인 존재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던 3년 내내 바이올렛이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 장면에서 아내를 오려다가 제 집에 둔다면 어울리긴 할지언정 행복할 것 같진 않았다.

    가장 좋은 것들을 쥐여 줘야만 만족하리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물질보다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았다. 그걸 멀리 떨어져서야 알았다.

    그러므로 윈터는 제가 그녀에게 결코 좋은 남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자신은 이미 모든 중심이 물질에 있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길에 널린 돌멩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이올렛은 제가 이곳의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 듯이 보였다가도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한 번 만나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윈터는 그녀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에 슬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세 달 정도. 딱 그 정도만 같이 있을 방법을 생각했다.

    *

    겨울이 끝나고 과일값이 치솟은 상태였다. 다들 신이 나서 과일을 먹어 영양분 보충을 하더니, 이내 술이 나타나고, 키론에서는 흔해 빠졌지만 좋은 안주인 생선 구이도 나왔다.

    흥겨운 파티에서 실컷 먹고 밤 10시가 가까워서야 집에 도착한 바이올렛이 멈춰 섰다.

    윈터를 결국은 다시 보게 될 거라 생각했지만 오늘 당장인 줄은 몰랐다.

    그는 문에 기대앉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망가뜨렸던 나무 판이 교체되어 있었고, 벗겨졌던 도료도 새로 칠했는지 벽의 흠집들이 사라져 있었다. 그의 셔츠에 연한 분홍색의 도료가 묻은 걸 보니 기다리는 게 심심해 일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참 잘하는 게 많은 남자였지만, 바이올렛은 지금 그가 여기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굳은 표정으로 윈터를 불렀다.

    “윈터, 왜 아직도 여기에 있죠?”

    그녀의 목소리에 윈터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바로 해 물끄러미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늦었네.”

    “왜 여기 있냐니까요?”

    바이올렛이 불쾌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묻자 윈터가 태연히 대꾸했다.

    “하옐이 그만 일하고 당신 만나서 쉬라고 했어.”

    “그야…….”

    “내가 또 말을 잘 듣잖아.”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호텔로 돌아가 보니 내내 꿍하던 안잘리가 웬일로 사근사근했고, 하옐도 안도하는 눈치였다. 하옐은 하하, 하고 가증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작은 마님 뵈러 가셔야죠.’ 하며 윈터의 등을 떠밀었다.

    바이올렛이 여전히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요. 쉬고 싶어요.”

    윈터가 말없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이올렛 쪽으로 걸어갔다. 바이올렛은 그가 자신을 잡으려 뻗은 손을 피해 문으로 걸어갔다.

    윈터는 그런 그녀의 행동에 간신히 붙여 놓은 정신력에 금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몸을 돌려 열쇠로 문을 여는 바이올렛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예고도 없이 바이올렛이 돌아서 그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 당신이 여기 있어서 잘됐네요. 만난 김에 이혼 서류를 받고 싶어요. 당신이 여기 있을 때 처리하죠.”

    “…….”

    “우린 이미 누구도 부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래서는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고. 그런데 도대체 뭐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려는 거죠?”

    윈터에게 이혼을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유산을 넘겨줄 사람으로 아내 외에는 누구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니 이혼을 할 수도 없다.

    제 방식이 틀렸다는 것은 그녀가 떠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아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제가 아는 최선이었고,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공주님에게는 왕국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자신이 만든 왕국을 그녀에게 줘야만 했다.

    예전부터 유서는 모든 것이 아내 앞으로 갈 수 있게 작성되어 있었으므로, 이제 제가 죽을 방법만 찾으면 되었다.

    윈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해 줄게. 세 달 뒤에.”

    “세 달 뒤요?”

    “응. 세 달.”

    죽을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세 달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결정했다. 세 달. 100일 정도.

    “그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그러니 그동안만 참아.”

    “외로워요? 잠자리라도 필요한 건가요?”

    바이올렛의 냉정한 말이 윈터의 가슴에 수천 개의 바늘처럼 쏟아져 박혔다. 그가 시간을 길게 잡아 늘린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인 후 대답했다.

    “이혼하자며. 내 재산이 하나둘인 줄 알아? 아니, 당신 가문과 우리 가문이 이혼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고작 서류 한 장 우리 마음대로 서명했다고?”

    “…….”

    바이올렛이 입을 단단히 다물고 그를 보았다.

    윈터는 감정들이 전부 식어 증발해 버린 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그리고 욕하고 싶으면 해. 얼굴에 다 적혀 있으니까.”

    윈터가 온종일 생각한 것은 이게 다였다. 그녀의 화를 풀어 줄 자신은 없고, 돈은 안 먹히니까.

    제가 죽으면 어차피 그게 이혼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보수적임의 정점인 로렌스 가문의 바이올렛에게 사별이 이혼보다 살아가는 데 나을 것임은 당연했다.

    그가 어딘가 무너져 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통의 부부들도 이혼하려면 세 달은 숙려 기간을 가져. 그건 당연한 거야. 이 숙려 기간이 오히려 우리의 이혼을 쉽게 만들 테지. 노력해도 안 된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

    “세 달이야. 그 뒤엔 그까짓 이혼 서류, 얼마든지 서명해 주지.”

    그녀가 이것마저 거절한다면 별수 없이 그냥 오늘 밤 떠날 생각이었다. 혼혈인 저를 쫓아내든 말든 카닉 일족의 고향인 알리카로 갈 것이다. 그리고 제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수없이 시도하리라.

    그렇게 생각했을 때,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조건이 나오는 걸 보니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라, 내내 어둡던 윈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끌려 올라갔다. 바이올렛이 문을 열며 말했다.

    “돈을 주지 말아요. 돈에 상응하는 물건들도 받고 싶지 않아요. 당신은 모든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려 하니까.”

    “또 다 팔아 버리고 돌려줄 테니, 그래. 그 조건은 받아들이지.”

    윈터가 대답하며 슬쩍 그녀를 따라 걸어 들어왔다. 다행히 바이올렛은 그걸 염두에 두고 문을 열었다는 듯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 조건만 들어주면 세 달의 숙려 기간을 가지는 건가?”

    “아뇨. 이게 시작이에요. 하나하나 더 많은 조건을 각각 붙여서 계약서를 써요.”

    “누가 공주님 아니랄까 봐 까다로우시긴.”

    “공주님이라고 하지 말아요.”

    “그건 안 돼. 애칭이라.”

    “직책이에요. 이제 아니니까 부르지 말라는 거예요.”

    “입에 붙어서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잠시 입을 다물었던 바이올렛이 제 스스로 제 말을 버거워하며 물었다.

    “내가 당신에게 블루밍 가문의 후계자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난 후계자가 아니잖아.”

    “그러니까요.”

    “…….”

    윈터의 말문이 막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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