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잠시 후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섰다. 윈터는 그녀가 제가 심어 놓은 스파이인 핌 델루아라는 것을 얼핏 알아차렸다. 그것과 상관없이 지금은 시끄러움이 짜증나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바이올렛! 어디 아파요?”
대답할 힘도 없는데 자꾸 사람이 늘어난다. 윈터가 여전히 대답이 없자 핌이 리나가 한 것처럼 이마에 손을 올리고 깜짝 놀라 말했다.
“열이 있는데?”
뛰어내린 건 저인데 왜 열은 아내에게 있나 모를 일이었다. 안 그래도 윈터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몸에 열이 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윈터는 당장 꺼지라고 한 소리 할까, 하다가 바이올렛이라면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드러누웠다. 그러자 여자가 기겁을 해서 침실을 나갔다.
이제 됐지,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북적북적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이올렛이 아파?”
“아휴, 딱 봐도 약골이니 이제야 아픈 게 기적이지.”
“저 상냥한 사람이 대답도 못 해 줄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거람.”
윈터는 그냥 자는 척을 했다. 도대체 바이올렛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기에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나타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빚이 그렇게 많다잖아요. 늘 그렇게 바쁘니 병이 나지.”
“여기 수프를 가져왔어요. 이거면 되나? 부족하려나?”
“어머, 나도 가져왔는데!”
“많이 먹이면 되지 뭐. 에그, 이게 다 우리 애들이 맨날 와서 귀찮게 굴어서 그래요.”
“우리 애들은 뭐 안 놀러 왔나? 저 앞에 나무 판이 다 깨졌잖아요.”
돈이 많아진 이후부터 윈터는 높고, 깊은 곳에 살게 되었다. 소음에서 한동안 멀어져 있던 그는 사방에서 떠드는 소리가 지독히 신경에 거슬렸다.
그나저나 이불이 점점 두꺼워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윈터가 표정을 찌푸리니 다들 저희가 너무 시끄러운 걸 알았는지 하나둘 침실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나간 걸 확신한 후 눈을 뜬 윈터는 제 위에 겹겹이 놓인 이불에 욕설을 퍼부었다.
“이불로 압사시킬 셈인가?”
그래 놓고 이마에는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아 동상이 걸린 기분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종류의 수프가 있고, 빵도 놓여 있었다.
거기에 바이올렛이 꽃을 좋아하는 걸 온 동네 사람들이 아는지, 침대 위며 바닥이며 꽃잎이 가득했다.
“마을 전체가 제정신이 아니군.”
윈터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분노가 우울함을 이겼다. 그가 수프 그릇을 내려다보며 성질을 냈다.
“무단 침입도 모자라서 뭔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여? 애들은 또 뭐야? 게다가 어디서 또 이따위 잡초를 뽑아 와? 여기가 쓰레기통이야, 시장 바닥이야!”
윈터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쳤다. 그는 우울함에서 비롯된 신경질적 태도로 1년을 보냈다. 이렇게 무작정 성질을 부려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다 뒤집어엎으려 들기 직전에, 그나마 여기 남자도, 아이도 흔적이 없음을 알았다. 모든 물건이 하나씩 있는 걸 보니 같이 사는 사람은 없는 게다. 이 와중에 그건 또 좀 만족스러워 뒤집지는 않게 되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약한 몸에 지쳐 금방 안락의자에 풀썩 앉았다. 손이 닿는 곳에 책장이 있었다. 창문 밖으로 옆집과 동네 아이들이 보였다.
“은퇴한 노인이야, 뭐야.”
윈터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가는 아이들과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또 뛰어 들어올까 봐, 의자에 완전히 드러누웠다. 그러자 정면 거울에 얼굴이 비쳤다.
윈터는 홀린 듯이 몸을 일으켜 거울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울에 손을 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 눈매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제가 예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알아야 되는데 말이야.”
투덜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마을 사람이 두고 간 담요 하나를 두르고 주방 살림을 살피니 그다지 요리를 즐겨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출출해져서 사람들이 두고 간 빵을 수프에 찍어 먹었다. 보기에 밋밋하더니 맛도 밋밋했다. 그래도 출출해서인지 쑥쑥 들어갔다.
아무리 좋은 걸 먹어도 어릴 때 먹던, 재료가 빈곤한 식사들이 입에 달았다. 그럴 때마다 윈터는 제 존재 자체에 혐오를 느꼈다.
대충 식사를 우물우물거리며 집을 둘러보았다. 크지 않은 집이지만 밖으로 나와 있는 물건이 거의 없어 깔끔하게 느껴졌다. 1년 만에 이렇게 정리를 잘 하게 된 것이 놀라웠다. 그러나 바이올렛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멋대로 서랍장을 열자마자 실상이 보였다.
“정리를 잘 하게 된 게 아니라 정리할 물건이 없는 거였군. 답다, 다워.”
텅 빈 바이올렛의 집을 둘러보다 보니 완전히 진이 빠졌다. 윈터는 두껍게 쌓인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몸이 바뀔 줄이야…….”
바이올렛이 알면 나 보라고 이 근처에서 죽은 거냐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떠나도 죽지 못하던 것은 그녀가 혹시 제가 떠나서 죽은 거라고 죄책감을 느낄까 봐, 였다.
바이올렛이 자신을 불행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맹독처럼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그러고도 죽지 못하다니, 이렇게 끔찍할 수가 있나.
바이올렛은 그런 상태로, 지금 제 마음과 같은 상태로 제게 와서 죽을까 생각했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미안하게 됐군.”
거기다 대고 엄살 부리지 말라고 했다. 지금 자신에게 엄살 부리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몸이 깨져 버릴 것 같았다. 제가 아내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아이가 생겼다고 믿게 된 후부터는 그 상태에 만족해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아내에게는 아이가 유일하게 열린 문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제가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이.
힘이 완전히 빠져 침대에 누운 채로 태양이 움직이며 창문을 넘어오는 햇살의 변화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질 때까지 그냥 그곳에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집에 들어선 바이올렛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윈터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아파요? 괜찮을 텐데.”
“아파.”
바이올렛이 몸을 숙여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열을 채 느끼기도 전에 두 사람의 몸이 다시 바뀌고, 윈터의 손에 따끈한 바이올렛의 미열이 전해졌다.
“아프네, 당신.”
“전혀요.”
“당신이 어떻게 알아. 방금 전까지 내 몸이었는데.”
윈터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핀잔했다. 바이올렛이 침대에서 내려서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몸이 바뀐 거죠? 성벽 아래 쓰러져 있었다는 건 또 뭐고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도 없군.”
“이게 더 급해요. 설명부터 해요.”
윈터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제가 거울로 본 그녀의 눈빛보다, 지금 온전히 그녀로 있을 때의 그녀의 눈빛이 훨씬 더 강렬했다. 밤하늘에서 쏟아진 별빛을 담아 둔 것 같았다.
지난 1년 동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더니, 바이올렛을 만나는 순간에는 이런 미열에도 신경이 쓰이고, 걱정과 분노가 뒤섞여 주름이 잡힌 미간도 보게 되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지축이 흔들리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뀐다.
모든 것이 강렬했다.
내가 지금까지 찾은 것이 당신이었던 걸까. 돈이 아니었었나.
제가 그녀의 지옥이라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윈터가 슬쩍 입꼬리를 늘여 보였다.
“카닉 일족이 있는 곳에 가서 몸이 바뀌는 약초를 발견했어.”
“네에?”
“시험 삼아 먹어 봤더니 바로 바뀌더군. 이렇게 바로 바뀔 줄은 나도 예상 못 했지.”
“그런 거예요?”
“왜. 내가 죽기라도 한 줄 알았어? 이렇게 많은 걸 두고?”
윈터가 둘러대는 말을 바이올렛은 믿었지만, 가속이 붙어 쉽게 달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아이처럼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해 눈가가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울까 봐 윈터는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기며 불퉁하게 말했다.
“난 당신처럼 약해 빠지지 않아서 죽지 않아. 애초에 가진 게 이렇게 많은 놈이 뭐가 부족해서 죽어.”
“하옐이 당신이 무리하게 사업 확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놀랐어요. 회사에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큰일 안 나. 안잘리가 돌연사라도 하면 모를까.”
“사표를 내던걸요? 그래서 늦었어요.”
그 말에는 윈터가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큰일 날 뻔했다.
안잘리는 집안에 빚이 많으니 웬만큼 굴려선 그만두지 않을 줄 알고 있었다. 윈터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하자 바이올렛이 그를 흘겼다.
“심지어 당신이 멱살을 잡았다면서요?”
“그 자식이 잔소리하잖아.”
“그렇다고 폭력을 쓸 필요는 없잖아요.”
“……알았어.”
윈터가 못마땅해하면서도 얼떨결에 대꾸했다.
아내 앞에서 약해져 버린 제가 민망해 윈터가 괜히 목덜미를 문지르며 물었다.
“어떻게 지냈어?”
“힘들지만 즐거워요.”
“이런 손바닥만 한 집에서 뭐가 즐거워.”
윈터가 질색을 하며 제집처럼 걸어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시원한 거나 한 잔 줘. 더워.”
“아직 덥지 않아요.”
“마을 사람들이 당신 아픈 줄 알고 이불이란 이불은 다 가지고 왔어. 기분이 더워.”
침대를 돌아본 바이올렛이 작게 한숨을 푹 쉬었다. 저걸 다 돌려줄 게 걱정이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미리 우려 둔 찻물에 차가운 물을 부어 그에게 내밀었다.
“마시고 가요.”
“그렇게 보내려고 안달하면 더 안 가. 억울하면 위치를 들키시질 말았어야지.”
“몸이 바뀔 줄 알았겠어요?”
그녀의 핀잔에 윈터가 어깨를 들썩이고 웃더니 차가운 차를 들이켰다.
목울대를 움직이며 시원하게 차를 들이켠 그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냈다.
그리고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그는 눈에 주름이 잡히도록 웃었는데, 여전히 특유의 비틀림은 있었으나 이전과는 다른 침착함이 느껴졌다.
모처럼 만난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하던 틈에 동네 아이들이 울먹거리며 바이올렛의 집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 다 나았어?”
“죽지 마, 바이올렛…….”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하던 아이들이 멈춰 서더니 눈이 커져서 윈터를 살폈다.
어른이 보기에도 위협적인 윈터의 체격은 아이들의 눈엔 거의 나무처럼 보였다.
“크다…….”
“엄청 커…….”
아이들이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윈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희 집 가서 놀아.”
그러자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바이올렛의 뒤로 숨었다. 바이올렛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거죠?”
“내가 언제 겁을 줬어, 쟤들이 멋대로 겁먹은 거지. 여기가 놀이터야? 남의 집 애들이 왜 멋대로 들락거려.”
“당신 집도 아니니 참견 말아요.”
“아, 이렇게 나오시겠다.”
윈터가 싹 비운 잔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린 아직 부부야. 참견할 자격 정도는 있지.”
아이들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윈터가 말을 이었다.
“바이올렛과 나는 결혼한 지 오래됐어.”
그 말에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충격받은 얼굴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 바이올렛, 진짜야?”
“진짜로 저 무서운 아저씨랑 결혼했어? 왜 그랬어?”
아이들이 충격받은 얼굴로 묻자 윈터가 대신 대답했다.
“진짜로 결혼했고,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 나가.”
아이들이 겁먹어 움츠러들더니 쪼르르 달려 나갔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 실수한 거예요.”
“뭘.”
“이 동네가 얼마나 좁은데…….”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두 사람은 다수의 사람들이 몰려오는 소리에 문 쪽을 보았다.
아이들이 달려가며 말했는지 인근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오는 중이었다.
“바이올렛, 남편이 왔다는 게 사실…… 어머나!”
마을에서도 유난히 초라하게 지내는 바이올렛의 남편이란 사람은 누가 봐도 부티가 흘러넘쳤다. 고급 원단을 최신 유행에 맞게 재단한 세련된 정장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구두를 신었고, 덧붙여 말 걸기 힘든 엄청난 미남이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얼어서 바이올렛 쪽을 보니 그녀가 주민들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소. 이 사람, 다신 안 올 테니까.”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