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46화 (46/176)
  • 46화

    아침이 밝아 올 때 바이올렛은 이상스럽게 포근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부드럽다…….”

    감탄하던 그녀는 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곧바로 여기가 제 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천장에는 로즈 골드의 근사한 조명이 달려 있었고, 고개를 돌려 보니 손등에 꽂힌 링거가 보였다.

    그리고 그 손이 제 손이 아니었다. 남편과 몸이 바뀐 것을 깨달은 바이올렛이 질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제가 자는 사이에 죽은 건가?

    그 생각이 첫 번째로 들었다. 이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문이 열렸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한 하옐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대, 대표님!”

    하옐이 밤새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말했다.

    “놀랐잖아요! 왜 괜히 쓰러져 계셔서!”

    “쓰러지다니?”

    “내가 어느 날 이럴 줄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다들 쉬라고 그렇게 말했잖아요! 성벽 아래는 왜 가신 거예요. 이렇게 또 갑자기 쓰러지시면 어쩌시려고!”

    “……또?”

    “경비원들이 발견하지 못했으면 정말…….”

    바이올렛이 멍한 얼굴로 하옐을 보았다.

    하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윈터의 이야기 같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혹시 제가 아니라 윈터가 죽은 건가? 그래도 몸이 바뀌는 것이고?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윈터가 죽은 게 아니라 몸을 바꾸는 다른 방식을 알아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죽을 이유는 조금도 없으니까.

    하옐이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타박을 이어 갔다.

    “아무리 대표님이 체격이 좋으셔도 무뢰배들이 총으로 위협해서 납치하면 어쩌실 거냐고요! 몸값 엄청 부를 텐데, 그걸 어떻게 내요!”

    “하옐.”

    “아, 몰라요. 두들겨 패셔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주무세요, 좀! 한 달 정도 푹!”

    “이보게.”

    바이올렛이 두 번이나 부른 뒤에야 하옐이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흐릿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넨 정말 남편을 아껴 주는 듯하네. 이걸 본인도 알아야 할 텐데.”

    그 말에 폭주하던 하옐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경악하며 외쳤다.

    “작은 마님!”

    바이올렛이 다급하게 하옐의 입을 막았다. 눈이 커진 하옐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부부의 몸이 바뀐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하옐뿐이었다.

    바이올렛이 손을 떼자 하옐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또, 또 몸이 바뀌신 겁니까?”

    “그렇다네.”

    작은 마님의 차분함이 섞인 윈터의 목소리에 같이 진정한 하옐이 물었다.

    “이제 어떡합니까?”

    “다시 만나서 몸이 닿아야 서로 몸을 되찾을 수 있다네. 일단은 남편이 내 집에 있을 테니 찾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옐은 대표님의 얼굴로 조곤조곤 말하는 바이올렛을 가만히 보다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난번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는데, 작은 마님은 신기하게 더 왕족 같아지셨어요.”

    “무슨 의미인가?”

    “예전엔 움츠려 계셨잖아요. 지금은 훨씬 더…… 위엄이 있으시다고 해야 하나.”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웃었다.

    “남편 몸이라 그런 게지.”

    “아뇨, 저희 대표님은 위엄과는 매우 거리가 있으신 분이십니다. 위엄이 아니라 위협이죠, 그건.”

    걱정돼서 눈이 붓도록 울어 놓고 금방 고자질이었다.

    바이올렛은 의식적으로 조금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아무튼 남편이…… 성벽 아래 쓰러져 있었다고?”

    “예, 그러셨습니다.”

    남편이 걱정스러웠다. 천운으로 몸이 바뀌었지만 과로사라도 한 거라면 크게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바이올렛이 바로 윈터를 찾아가려는데 하옐이 재빨리 팔을 붙잡고 애교를 떨었다.

    “작은 마니임, 때마침 바뀐 김에 사소한 일 몇 개만 처리해 주시고 가면 안 될까요?”

    “일?”

    “네. 대표님이 어제 10시에 쓰러지셔서 일이 좀 밀렸거든요.”

    “10시면 자야지?”

    “저희 대표님은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타입이십니다.”

    “그건 그냥 안 자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얼떨결에 윈터의 집무실로 향했다. 바닥에는 회색의 카펫이 깔려 있었고, 침실 바로 옆으로 간이 집무실과 간이 바가 있었다.

    모든 것이 간이라고 해도 집무실은 훌륭했다. 좀 더 일찍 일어났다면 일출을 보기 딱 좋은 위치였다. 바이올렛이 자리에 앉아 서류를 확인했다.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이해를 못 할 내용은 없어 찬찬히 읽기 시작하자 옆에서 하옐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작은 마님, 이왕이면 좀 더 오래 바뀌어 계시면 안 됩니까?”

    “무슨 일로?”

    “대표님은 서류를 아예 안 읽으시거든요, 요즘. 그냥 서명해 버리세요.”

    “그럼 안 되지 않나.”

    “안 되는 거 맞습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대표님이 너무 무리하게 사업 확장을 하셔서 도산하게 생겼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인 모양이라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남편의 회사에 위험한 상황이 올 거라고는 지금까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제 집안에서 망쳐 놓지 않는 한은 언제나 탄탄할 것 같던 회사였는데.

    하옐이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강조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작은 마님께서 회사를 좀 안정시켜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회사를 어떻게…….”

    “일단 대표님께서 회의에 일절 안 들어가시거든요. 회의에만 참여해 주셔도 훨씬 좋아질 겁니다. 상황 돌아가는 걸 아셔야 해요, 대표님께서도.”

    회사가 위기에 빠진 것도 모자라 그 원흉이 남편이라니. 바이올렛에게는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남편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때 불쑥 부대표인 안잘리가 나타났다.

    “대표님.”

    하옐이 움찔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담담하게 처음 보는 사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의 침착한 반응에 하옐이 안심하는데 안잘리가 가져온 봉투를 윈터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만두겠습니다.”

    사표였다.

    하옐의 눈과 입이 크게 열렸다. 안 그래도 윈터가 멱살을 잡는 바람에 안잘리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 뒤에도 윈터가 사과하기는커녕 점점 더 엇나가기만 하니 그도 폭발한 모양이었다. 그는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었고, 이 사표는 아마 뒤를 좀 돌아보라는 경고의 의미일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안잘리가 그만두면 회사가 정말로 위험해졌다.

    사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그것을 받아 들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네.”

    아닙니다, 작은 마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하옐이 안잘리의 뒤에서 사색이 된 얼굴로 두 손을 교차하고 고개까지 저어 가며 사표를 수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렸다. 다행히 바이올렛이 알아듣고 다시 사표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앞으로도 더 수고해 주길 바라네.”

    바이올렛의 수습에 하옐이 기가 빠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안잘리가 깊은 상처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제 더는 못 합니다. 이런 식으로 확장만 해서 나중에 어떻게 수습하시려고 그러십니까?”

    “…….”

    “전 아직도 갚을 빚이 많아서 회사와 같이 침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보내 주십시오.”

    안잘리는 윈터가 자신을 잡으려 드물게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했을 뿐,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조금 서툴게 재킷 단추를 잠가 예의를 차린 후 부드럽게 안잘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미안하네. 걱정을 끼친 것도, 헤아려 주지 못한 것도.”

    예상 못 한 사과에 안잘리가 멈칫했다. 그에 아랑곳 않고 바이올렛이 다정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자네도 조금만 나를 이해해 줬으면 하네. 회사 상황이 어느 정도로 위험하지?”

    바이올렛의 질문에 안잘리가 다소지만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 이렇게 멀쩡한 질문을 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안잘리가 서둘러 대답했다.

    “서류 준비했습니다. 물론 또 미루시겠지만…….”

    “지금 확인하지. 가져오게.”

    하루 만에 바뀐 대표의 모습에 감격한 안잘리가 곧바로 걸어 나가 서류를 상자째로 가져왔다.

    “이것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그렇군. 다 읽으려면 좀 걸릴 것 같으니 사표는 다시 가져가게.”

    “예, 대표님.”

    대표가 한 손으로 건넨 사표를 안잘리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지금 대표에게서는 사람을 복종하게 만드는 묘한 압도감이 들었다. 게다가 늘 세상만사에 질린 듯이 의자 뒤로 기대 발을 책상에 올려놓고 있던 윈터가 꼿꼿한 자세로 앉아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안잘리는 처음으로 윈터에게 동경을 느꼈다.

    게다가 제 사표가 이렇게까지 그에게 파장을 일으켰나, 싶어 뿌듯하기까지 했다.

    바이올렛이 펜으로 앞을 가리켰다.

    “앉게. 이 서류에 대해서는 자네가 잘 알 테니.”

    “예, 대표님.”

    안잘리가 바로 앞에 앉았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차를 한잔 하겠나?”

    “왜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나오시는 겁니까?”

    “내가 뭘 했다고.”

    “차 마시겠냐고 물으신 거 처음입니다. 멱살은 여러 번 잡혀 봤지만.”

    “……아, 멱살을.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 몇 번을 사과해도 부족하네.”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매우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짓자 하옐이 서둘러 말했다.

    “차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전 나가 있죠.”

    하옐이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요즘의 윈터였다면 또 비꼬고 욕설을 퍼부으며 안잘리의 자존심을 긁었을 것이다. 명문가 자제이기 때문인지 안잘리는 유난히 그런 대우를 더 힘들어했다.

    바이올렛이 우선 사과를 하자 꽉 닫은 상태로 들이닥쳤던 안잘리의 마음이 단숨에 열렸다. 윈터 블루밍은 권력을 얻은 이후로 사과 비슷한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우악스러운 남자가 사과를 건넸으니 특별 대우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안잘리가 정말로 그만뒀을지 모르고, 그랬다면 회사는 정말로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이러느니 저러느니 해도 역시 윈터의 혈통이 그의 뒤를 봐 주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하옐은 생각했다.

    *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윈터가 물끄러미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죽지 못했다. 그게 이렇게 큰 형벌인지 전혀 몰랐다.

    이제부터 정말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피로만 몰려왔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바이올렛의 긴 머리칼이 손을 타고 흘렀다.

    “아.”

    그가 소리를 내 보았다.

    아무 의욕도 없었는데 바이올렛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애간장이 녹아내린다.

    그는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가만히 정면만 바라보았다.

    생각처럼 꽃으로 가득한 집은 아니었지만, 꽃향기가 사방에서 느껴지기는 했다.

    제가 가느니 마차를 편히 탈 수 있을 아내가 제 몸을 가지고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우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집으로 꼬마 아이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바이올렛! 왜 아직도 안 일어나? 엄마가 리나보고 바이올렛 깨우래!”

    “…….”

    “바이올렛?”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평소와 달리 자신을 반겨 주지 않는 바이올렛을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아이이오올레엣!”

    아이가 바이올렛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며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무릎에 털썩 앉아 손으로 제 이마와 윈터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픈가……. 내가 엄마랑 같이 올게! 잠깐 기다려!”

    그러더니 들어올 때처럼 온갖 소란을 피우며 달려 나갔다.

    윈터는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여기도 지옥 같은데 제 곁이 여기보다 더한 지옥이라니, 이 무슨 끔찍한 일인가.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