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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45화 (45/176)

45화

예핌추크가에서 갑자기 무도회에 가야 한다며 드레스와 머리에 할 꽃 장식을 부탁했다. 바이올렛이 꽃을 한가득 챙겨서 마차에서 내리자 리지야 예핌추크가 성질 급하게 소리쳤다.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떡해요!”

“너무 갑자기라 준비에 시간이 걸렸어요. 왜 갑자기 재촉이에요?”

“갑자기…… 갑자기 무슨 야외 파티를 한다고 비밀 초대장을 받았어요!”

리지야는 흥분해 있었다. 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왜 하필 우리 가문을 불렀죠? 가까워서?”

“초대장을 보여 줄래요? 초대장에 맞게 꾸며 줄게요.”

바이올렛이 리지야의 팔을 쓰다듬으며 달래자 리지야가 휙 초대장을 꺼내 내밀었다.

카닉 호텔의 키론 지점 정원에서 열리는 비밀 무도회에 예핌추크가를 초대합니다.

윈터 블루밍

초대장에 적힌 남편의 서명에 바이올렛의 시선이 잠시 고정되었다. 리지야가 제게 관심을 가지라는 듯 바이올렛의 팔을 흔들었다.

“그 유명한 윈터 블루밍이, 심지어 비밀 초대를 했다니까요! 대륙의 유명인이란 유명인은 다 무도회에 올 거라고요! 내가 이런 시골에서 온 촌뜨기란 건 다 알아차릴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딱 보면 다 알죠. 아, 선물은 뭘 하면 좋지……. 제가 사 갈 수 있는 건 분명 기억에 남지 않을 거예요. 뭐가 좋아요? 라크라운드 사람이니까 좀 알죠?”

바이올렛이 조용히 리지야의 머리에 여름에 피는 하얀 꽃 장식을 했다. 그다지 꽃을 쓸 일도 없는데 저를 부른 걸 보니 그냥 흥분하고 막막해서 이야기할 상대가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올리브 오일을 가져가면 좋아요.”

“……고작 올리브 오일을요?”

“예핌추크 가문에서 직접 만들어 쓰는 올리브 오일은 정말 훌륭하잖아요. 라크라운드는 여기보다 훨씬 추워서 올리브가 자라지 않아요. 거기서 구해 봤자 시답잖은 것들뿐이죠.”

“그래요?”

“네. 처음엔 여기 올리브 오일이 잘못된 건 줄 알았어요. 이제는 뭐가 맛있는 건지 좀 알게 되었지만.”

기별 없이 살면서도 드문드문 윈터가 떠올랐다. 그리고 자꾸만 그의 말들이 이해가 갔다.

윈터가 늘 올리브 오일이 맛없다고 짜증내면서도 음식마다 듬뿍듬뿍 뿌려 먹던 것이 생각났다. 여기 와서야 제가 아는 올리브 오일 맛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예핌추크 가문에서 만들어 쓰는 올리브 오일은 더 특별했다.

바이올렛의 조언에 리지야는 고민하는 듯했지만 어차피 더 생각나는 선물도 없어 올리브 오일을 가져가기로 했다.

바이올렛이 다 챙겨 주고 방을 나가는데 리지야의 에스코트로 가기로 한 그녀의 오빠, 조르디 예핌추크가 앞을 막았다.

“왔으면 인사를 해야죠.”

“리지야 아가씨를 보러 온 거라서요.”

“온 김에 나한테도 해요.”

“글쎄요.”

바이올렛보다 세 살이 어린 조르디는 처음 보던 날부터 그녀에게 이렇게 덤벼들었다. 예핌추크 부부가 아무리 공손히 대하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빙 돌아 가려 하자 조르디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결혼할래요? 해 줄게요.”

“기혼이에요.”

“남편은 보이지도 않던데.”

“빚쟁이한테 쫓겨서 도망 다녀요.”

하여튼 이 남매는 사람 귀찮게 구는 게 닮았다.

한참 후 그들을 겨우 떨궈 내고 돌아서던 바이올렛은 앞에 서 있는 날씬한 정장 차림의 청년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하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작은 마님. 마차에 타시죠.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바이올렛이 멈칫했다가 예핌추크가의 짐마차에 말을 하고, 하옐이 타고 온 마차에 탔다.

하옐이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한번 만나 주실 생각 없으십니까?”

“지난번에 플립은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는 게 나을 것처럼 말하던걸.”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지금 회사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안 좋다니?”

“지금까지 겪은 적 없던 위기입니다. 뒤가 절벽인 거 뻔히 알면서 대표님께서 계속 뒷걸음을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여차하면 이대로 도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은 사실 만에 하나도 없었지만, 하옐은 바이올렛을 회유하기 위해 있는 엄살 없는 엄살을 다 부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올렛에게 그다지 통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아직 그 사람을 만날 만큼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네.”

“작은 마님…….”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해 준다면 그날이나 만날까.”

“그건 받자마자 파쇄하셨습니다.”

“……어쩐지, 안 오더라니.”

하옐이 푹 한숨을 쉬었다.

“일단 가겠습니다만 좀 더 생각은 해 주십시오. 대표님 상태가 정말 이상합니다.”

“고려하겠네.”

그것으로 대화가 중단되었다.

1년 내내 짐마차만 타던 바이올렛은 최고급 쿠션으로 마차 안이 둘러싸이고, 바퀴도 말도 가장 좋은 것들로 된 마차에 타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창문 밖을 바라보는데 하옐이 물었다.

“대표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신 이유가 뭡니까?”

“난 지금이 아주 행복해. 그 사람 곁에서 불행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네.”

“작은 마님…….”

“그러니 재촉하지 말아 주게.”

바이올렛의 부드러운 거절에 하옐이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윈터가 비밀 파티를 연다는 소식은 그날 코르시카의 석간신문에 곧바로 등장할 정도로 큰일이었다. 윈터는 이 최고급 호텔에 들어오고 싶으면 돈을 들이부으라는 것을 현란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화려함의 극치였다. 대륙 사방에서 온 유명인들로 북적거리며 온 사방에서 불꽃이 터지고 음악이 흘렀다.

도무지 제가 낄 곳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 리지야가 긴장하자 에스코트로 함께 온 조르디가 핀잔했다.

“어차피 잠깐 있다가 돌아갈 거 아냐?”

“여기서 인맥 잘 쌓으면 명문가로 초대받을 수도 있단 말이야. 오빠도 결혼 상대 찾아봐야 하는 거 아냐?”

“찾아봐야겠지. 바이올렛 정도면 딱 좋은데.”

“눈이 너무 높아진 거 아냐?”

리지야가 핀잔하다가 문 앞에서 손님들을 반기는 윈터를 발견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시시껄렁하게 다니던 조르디 역시 긴장해서 자세를 바로 했다.

거대한 문 바로 뒤에 서서 무표정으로 손님들이 청하는 악수를 받아들이는 윈터 블루밍에게서는 범접하기 힘든 강함이 느껴졌다.

그가 가문의 서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확실히 그에게서는 야만적인 분위기가 흘렀고, 짐승처럼 협의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안겼다.

그 덕에 남매는 육식 동물 앞에 선 초식 동물처럼 바짝 긴장한 상태로 윈터에게 걸어갔다. 리지야가 치마를 살짝 잡아 인사했다.

“저는 예핌추크가의 리지야 예핌추크, 이쪽은 제 오빠인 조르디 예핌추크입니다.”

“환영합니다.”

윈터가 인사를 받았다. 리지야가 머뭇머뭇하더니 조르디가 들고 온 올리브 오일병을 휙 뺏어 윈터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가문에서 매일 만들어 쓰는 올리브 오일인데 아주 질이 좋거든요.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런 말을.”

윈터가 약간의 무례함이 느껴지는 투로 묻자 리지야가 멈칫하며 말했다.

“그, 그냥 라크라운드 출신인 사람이 알려 줬어요.”

윈터가 그 자리에서 올리브 오일 뚜껑을 열더니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가 지금까지의 다른 선물들과 달리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리지야가 약간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어린 올리브를 고르고 골라서 한 번에 짜낸 거예요. 전 평생 먹었지만 아직도 맛있어요.”

“감각이 좋으시군.”

윈터가 그리 말하며 장갑을 벗어 옆에 서 있던 웨이터의 쟁반에 대충 던지더니 한 손에 오일을 조금 올려 혀로 핥아 보았다. 그의 터무니없이 예의 없는 행동에 손님들은 경악했지만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윈터가 뚜껑을 다시 닫으며 말했다.

“리지야 양이라고?”

“네.”

“올리브 오일에 대해 이야기 좀 하죠. 사업적으로.”

리지야는 이 남자와 단둘이 이야기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

모처럼 신이 난 윈터는 파티 중에 달려 나와 주방장에게 올리브 오일을 맡겼다.

키론 호텔 음식의 특색이 뭔가 부족하다 싶어 답답했는데, 바로 이거였다. 손님들마다 쓸모없는 것만 가져왔는데 딱 예핌추크 가문만 제대로 된 것을 가져왔다.

“하여튼 머리는 참 좋아.”

바이올렛이 추천한 게 분명했다.

윈터는 이미 제가 이 지역에 심어 놓은 스파이인 핌 델루아에게서 바이올렛이 예핌추크가에서 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굳이 예핌추크 가문에 초대장을 보냈던 것이 이렇게 큰 선물로 돌아왔다.

그녀가 저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윈터는 들떠 있었다. 심지어는 제가 좋아하는 것도 기억하고 이렇게 선물을 조언했다고 생각하니 한동안 꼼짝을 않던 피가 끓어올랐다.

곧바로 이 올리브 오일을 온갖 음식들에 뿌려 볼 생각이었다. 모처럼 일할 생각에 한껏 들떠 있을 때, 윈터는 조금 열린 문틈으로 하옐과 안잘리의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하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님은 전혀…… 대표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어요. 도산 위기라고 허풍까지 떨었는데 말이에요.”

“……그렇군.”

“어떡하죠? 부대표님은 바로 라크라운드로 돌아가실 거죠?”

“가야지.”

“아, 미치겠네. 그 하녀를 보내 볼 걸 그랬나요? 왜, 작은 마님 계실 때 엄청 잘 따르던 하녀 있었잖아요. 맞다, 젠. 그 애요.”

“글쎄. 하도 사람이 많이 바뀌어서 이제 누가 누구인지 기억도 안 나.”

윈터가 결국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안잘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나고 싶지 않으신 이유가 뭐래?”

“그게 뭐 뻔한 얘기죠. 대표님과 만나면 불행해질 것 같다고요. 지금이 행복하시대요. 아니,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입에 겨우 풀칠하며 사시던데 말이에요. 돌아오시면 왕위도 사실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있는데. 도대체 뭐가 행복하시다는 건지…….”

“불행?”

“네. 대표님 곁에서 불행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걸음을 멈추었던 윈터가 조용히 그곳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는 제 침실로 들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 있는 가건물의 방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이어 그는 금고를 열었다. 언제나 바이올렛이 주는 지폐를 가지고 다녔다. 그녀의 손이 닿았을 것이다. 잠깐이라도.

그렇게 싫다고 도망친 사람을 억지로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제 발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세상 모든 것을 가지게 해 줄 정도로 부자가 되면, 그럼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오지 않을 리 없다고 믿었다. 지금 라크라운드에서 태어나면 누구도 윈터 블루밍의 땅을 밟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스물아홉의 그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윈터는 그녀가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1년 전에는 그래도 그녀가 제 곁을 나가 떠돌다 보면 분명 벽을 만나고, 지쳐서 품으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 곁은 그녀에게 여전히 불행이고, 그녀는 제가 없어야 잘 지낼 수 있었다.

윈터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지폐를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고,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창틀에 올라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몸이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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