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바이올렛은 짐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충동적으로 중간에 내렸다. 짐은 마부가 집 앞에 가져다주기로 했기 때문에 손에 든 것은 작은 동전 주머니뿐이었다.
카닉 호텔이 지어진다고 하니 내심 기대되는 것이 있었다. 라크라운드 사람이 여기로 무더기로 일하러 올 테니, 사람이며 음식이며 그리운 고향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으리란 것이었다.
카닉 호텔이 지어지고 있는 곳의 성벽은 근사했다. 저 높은 성벽 위에서 해적들을 향해 바위를 날려 배를 부수고, 뒤에서는 도스 공국의 해군이 막아 남은 해적까지 전부 붙잡았다고 들었다. 어릴 때 도스 남매에게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바이올렛은 언덕 아래에 있는 시장 어귀에 들어서서 혹시 라크라운드의 식재료가 들어온 게 없나, 하고 살피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익숙한 식재료가 보여 장보기에 푹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휙 팔을 잡아챘다. 그녀가 놀라서 돌아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프, 플립?”
1년 만에 만나는 플립의 모습에 바이올렛의 눈이 동그래졌다.
윈터가 특히 아끼던 하인인 그는 카닉사에 정식으로 입사해 일을 하고 있었고, 차림새도 깔끔하게 바뀌어 있었다.
수려한 플립을 보며 윈터는 의외로 제 직원들의 외모를 따지는 모양이라고, 무심코 생각하는데 그가 설명도 없이 다급하게 짐마차 안에 바이올렛을 밀어 넣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앉아 있는데 곧, 듣는 것만으로도 울컥한 기분이 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플립, 네 번째 골목에 있는 것들 전부 사 와. 나는 반대로 가 볼 테니까.”
“예, 대표님.”
플립이 정중히 인사하자 윈터가 멀어졌다. 그제야 플립이 살그머니 짐마차의 커튼을 열었다.
“이제 나오세요, 작은 마님.”
“오랜만이네, 플립.”
“지금 반가워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대표님께 잡히시면 정말로…….”
플립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몸을 떨었다.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윈터가 화가 많이 났었던 모양이지?”
“화요? 뭐라고 해야 하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복잡해?”
“어서 빨리 도망을…… 아, 이거 가져가십시오.”
플립이 빵이 든 바구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 지역 특색이 있는 메뉴를 룸서비스에 내놓으려고 이것저것 사들이고 있습니다. 맛있으니 드세요.”
“와, 좋은 냄새.”
바이올렛의 안일함에 플립은 충격을 받았다.
윈터가 그동안 얼마나 모두의 피를 말리게 했는지 그녀는 짐작도 못 하는 듯했다. 하기야, 그러니 도망을 쳤을 것이다.
플립은 고민했다.
거의 1년간 윈터가 바이올렛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보내는 편지들을 꼬박꼬박 받아 챙기긴 했지만 그건 돈이 동봉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1년 내내 주기적으로 심각한 악몽에 시달렸다. 무슨 꿈인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그 세상에 두려울 것 없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거나 바이올렛의 이름을 부르며 깨서는 온몸을 덜덜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꿈을 한 번 꾸고 나면 일주일은 독한 약을 먹어 기절하듯 잠들어야만 했다.
어찌 됐든 윈터의 신경을 거슬리는 것은 좋지 않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윈터는 요즘 들어 그저 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빨리 가세요! 빨리요!”
“고맙…….”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절대 잡히지 마세요!”
바이올렛은 무척 난처한 얼굴로 빵 바구니를 들고 집 방향으로 달렸다.
그녀 역시 윈터 앞에 나타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도망만 다닐 생각도 아니었다. 제가 잘못한 게 그리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먼저 제 부정을 의심하고, 임신이 안 된다는 사실까지 속인 건 윈터였다.
플립이 왜 저렇게 안달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바이올렛은 시장을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허기가 많이 졌던지라 바구니 손잡이를 팔에 걸어 들고 빵 하나를 들어 한 입 물었다. 달콤한 치즈가 듬뿍 들어간 빵이었다. 바이올렛이 감동해서 제 바구니 가득 든 빵을 보았다. 1년 내내 수도자처럼 살았던지라 이렇게 질 좋은 빵은 오랜만이었다. 후각이며 시각이며 감각들이 반짝반짝 살아났다.
빵을 우물거리며 집으로 오다가 핌의 집에 들렀다. 문을 두들기자 핌과 함께 딸아이인 여섯 살의 리나가 튀어나와 바이올렛에게 매달렸다.
핌이 물었다.
“오늘 일하러 간 거 아니었어요?”
“아, 일 끝나고 시장에 갔다가 라크라운드에서 알던 사람을 만나서 빵 바구니를 받았다오. 너무 맛있어서 다 같이 나눠 먹을까 하고.”
“하여튼 꼭 뭘 이렇게 다 나눠 주려고 든다니까……. 차를 내줄까요?”
“좋소.”
바이올렛이 들어서서 빵 바구니를 놓았다. 핌이 호통 치듯 앞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맛있는 걸 나눠 준다는 소식에 아이들이 금방 식탁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모처럼 얌전히 빵을 집어 든 아이들이 감탄했다.
“우와, 맛있어…….”
“바이올렛, 이거 엄청 맛있어!”
아이들이 재잘재잘거리며 감동하자 바이올렛이 기쁜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그사이 리나가 두 손으로 꽃받침처럼 턱을 받치고 바이올렛을 빤히 보았다.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성격이 온화한 바이올렛을 좋아했지만 리나는 특히 더 그녀를 좋아했다.
그런 리나와 눈이 마주친 바이올렛이 리나처럼 손으로 턱을 받치고 상체를 기울였다. 언제나 반듯한 자세로 앉았던지라 그녀 스스로에게도 이 행동이 낯설게 느껴졌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니, 리나?”
“바이올렛 좋아!”
“나도 리나가 참 좋아.”
바이올렛이 대답하며 눈웃음 지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과 빵을 나눠 먹고, 이렇게 아이와 마주 보고 있으니 소소한 행복에 휩싸였다.
*
늦은 밤, 윈터는 창가에 기대서서 긴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 지역의 특산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부 올라와 있었다.
“뭔가 부족한데.”
그가 말하자,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던 부대표 안잘리가 대답했다.
“대표님, 사업 확장 좀 적당히 하십시오. 뒷일은 다 저희에게 떠맡기시고 계속 이렇게 일을 벌이기만 하시면…….”
“닥치고 머리나 굴려 봐.”
윈터의 말에 안잘리가 입술을 물었다. 태생이 명문가, 그것도 교육이 철저하기로 소문난 리스틱 가문의 안잘리가 이렇게 우는소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었다면 몇 번이나 사표를 내고 때려치웠을 거란 이야기였다.
실제로 공동 부대표인 이글린은 지금까지 열 번도 넘게 사표를 내고 도망쳤다가 제 씀씀이를 못 견뎌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윈터가 안잘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투덜거렸다.
“너희 집 빚 다 갚았으면 그만두시든가.”
“아직 못 갚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저 그만두면 회사가 안 굴러갈 겁니다.”
“그래서. 까불려고 여기까지 왔어?”
윈터는 이유 없이도 사람을 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가까워지기 전에 안잘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말을 이었다.
“대표님, 이렇게 확장하다간 큰 문제가 터질 겁니다. 지금도 저 하나 앓아누우면 곧바로 큰 타격이 옵니다. 하옐이나 이글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제발 쉬십시오.”
안잘리가 회사의 명운을 짊어지고 말하는데 순식간에 윈터의 손에 멱살이 쥐어졌다. 안잘리도 큰 편이었지만 윈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네 일이나 해. 그러라고 주는 돈이니까.”
안잘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윈터가 그를 휙 밀치며 돌아섰다.
“온 김에 한 바퀴 돌면서 머리 식혀. 이틀 휴가 줄 테니까.”
그럴 시간이 없긴 했지만 안잘리는 미래가 어떻게 되든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기 때문에 별말 없이 그곳을 나섰다.
안잘리가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호텔 복도를 걷는데 하옐이 나타나 그의 팔을 휙 붙잡았다.
“부대표님.”
안잘리가 돌아보자 하옐이 소곤거렸다.
“아까 플립이 여기서 작은 마님을 뵈었답니다.”
“그렇군.”
안잘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회사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확장에 확장만 거듭하니 뒤따라오던 모든 이들이 나가떨어진 탓이었다.
정말 윈터가 한 달은 멈춰야 수습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글린이 진지하게 약을 먹여서 한 달간 재우자고 고민하는 걸 가까스로 말리던 안잘리였다. 그가 물었다.
“최근에 부인의 이야기를 하신 적은 있나?”
“전혀요. 한 세 달은 기다리시더니 그 뒤로는 말도 안 꺼내세요.”
“그래도 마주치면 잠깐은 영향이 있지 않을까.”
“글쎄요, 요즘 들어 저도 대표님 반응이 전혀 예상이 안 돼요…….”
윈터의 옆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하옐이 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언제 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작은 마님이 사라지신 이후로 쭉 제정신이 아니신 건 사실이니 잠깐이라도 만나 뵙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역시 그렇겠지.”
“제가 다녀올 테니까 대표님께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부대표님 그만두시면 저도 그만둘 테니까.”
하옐이 우는소리를 하고 달려 나갔다.
*
안잘리를 쫓아내고 윈터가 창문 아래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혀 벽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시간을 죽였다.
바이올렛이 떠난 이후 줄곧 이랬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싱거워졌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극이 되는 것이 새 호텔을 지어 올리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건물 하나 손에 넣을 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쾌감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냥,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정도의 자극만을 주었다.
그는 얼마 전 블루밍 저택으로 도착한 편지를 다시 확인했다. 예전 바이올렛의 주치의였던 베릴의 편지였다.
작은 마님께 조제해 드린 약에 블루밍 공작 전하와 마님께서 공모하여 주신 약이 섞여 있었습니다. 증거는 없지만 아마도 그 약을 먹으면 임신한 것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그동안 따듯하게 대해 주셨는데 이렇게 나쁜 짓을 하고 도망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바이올렛의 앞에서 부모의 편을 들던 날들이 떠올랐다.
애정이나 따듯함을 모르고 자라서, 그냥 이 정도면 충분한 줄 알았다. 제가 받는 사랑도, 제가 바이올렛에게 주는 사랑도. 전부 이거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이 틀렸고, 바이올렛은 떠났다.
부모에게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고 모든 재정 지원을 끊었다. 보나 마나 가족들이 죽는 소리를 하며 매달릴 것이기도 하고, 더는 라크라운드에 있고 싶지 않아 일단 바이올렛이 있는 곳으로 와 버렸다.
서글프면 아내를 찾아오는 일이 습관이 된 것 같았다. 저는 아내에게 아무런 의지도 되어 주지 못했으면서, 자신은 아내에게 정신적으로 완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면 그대로 쓰러질 만큼.
“……내 쓰레기 같은 피가 도움이 될 때도 있군.”
저 때문에 죽을 뻔한 아내가, 제 망할 피 덕분에 살아 있었다.
윈터는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1년째,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제 자신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