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뭐, 뭐라고 했소?”
“카닉 호텔이요. 제일 유명한 호텔 체인 있잖아요. 저 성벽 뒤 언덕을 그 회사에서 싹 다 샀다고 하더라고요. 이 앞에 바다까지 전부.”
그녀의 말에 놀란 바이올렛이 성벽 쪽을 보았다.
바이올렛은 순식간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카닉 호텔이 왜 여기…….”
“엄청 크게 지을 건지 타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들어왔더라고요. 당분간 우리 마을도 북적북적하겠어요. 장사가 좀 잘되려나.”
제가 여기 있는 것을 윈터가 알아차린 걸까.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윈터가 저 보라고 인근에 호텔을 지어서 아내가 잃은 것들을 뽐낼 정도로 한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그가 그 정도로 제게 관심이 남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우연이려니. 바이올렛이 그리 생각하며 잊기 위해 빨래에 몰두하는데, 핌이 문 앞에 진흙탕을 밟지 않도록 올려 둔 나무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네 애들이 다 들락거리니 저것도 박살 나기 직전이네요.”
“바꾸긴 해야 할 텐데…….”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끝을 흐리자 핌이 인상을 쓰고 물었다.
“바이올렛은 도대체 돈 벌어서 어디다 쓰는 거예요? 예핌추크가에서 돈을 적게 주지도 않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없이 사냐고요.”
“아, 말 안 했소? 빚 갚는 데 쓰고 있는데.”
“……그랬어요? 빚이 얼마나 되는데요?”
“평생 갚아도 이자도 못 낼 정도라오.”
바이올렛이 하도 태연하게 말해 핌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바이올렛이 나무통에서 내려섰다. 발이 젖어 있어 흙을 밟았는데, 순간 그녀가 받았던 충격이 싹 날아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배운 대로 빨래를 한 후 다시 빨랫줄에 널었다. 핌의 말대로 아까 한 건 빨래도 아니었던 듯이 침구가 새하얘져 있었다.
뽀송뽀송 말려서 그 위에 누우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런 행복한 상상으로 카닉 호텔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덮어 버렸다. 마주치지만 않으면 저와는 별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
며칠 뒤 바이올렛은 예핌추크가의 정원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가문에서 보낸 짐마차에 탔다. 짐마차에는 바이올렛이 준비한 꽃들이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녀의 집에서 출발해 얼마 가지 않아 코르시카의 국경이 나왔다. 국경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이미 두 나라의 협약이 되어 있어 오가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마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리면 근사한 담벼락을 가진 예핌추크 가문이 나왔다.
예핌추크는 성벽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저택 앞에 내려서니 언덕 위에 지어지고 있는 카닉 호텔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윈터도 오겠지.’
그는 3년 내내 출장이 잦았다.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으니 여기 새 호텔이 지어지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러 올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그는 한번 나가면 석 달씩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아예 따로 살기 시작하니 가끔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그래도 1년 정도 지나니 이제 그 그리움도 견딜 만해졌다. 왜 그 남자가, 그렇게도 무심하고 폭언을 지껄여 댄 남자가 이렇게 애틋한 건지. 바이올렛은 그것이 언제나 의문이었다.
바이올렛이 무심코 언덕 쪽을 바라보는데 가문의 고명딸인 리지야가 참견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아, 미안해요.”
바이올렛이 사과하고 서둘러 가져온 꽃들을 내렸다.
이곳에는 리지야가 할 일이 전혀 없는데도 그녀는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옆을 계속 얼쩡거리며 물었다.
“머리는 어디서 했어요?”
“머리요?”
하녀가 마지막으로 잘라 준 이후 손질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리지야가 추궁하듯 물었다.
“아침에는? 어떻게 관리했어요?”
“그냥 감고 말렸어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냥 말렸는데 이렇게 된다고?”
“빗질은 했어요.”
열아홉 살의 리지야는 여전히 꼬치꼬치 캐물으며 따라다녔고, 바이올렛은 귀찮음에 폭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도 파티 준비하세요. 이렇게 따라다니지 말고.”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람? 자기 일이나 해요.”
리지야가 짜증을 내며 화병을 들어 바이올렛이 놓는 위치에 올렸다. 얼떨결에 일을 돕다가 바이올렛 쪽을 보니 그녀는 본격적으로 일을 할 마음인지 길게 자란 머리칼을 모아 대충 틀어 올려 핀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리지야는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중요한 양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 눈으로 꼭꼭 씹어 삼키고 있었다.
‘분명 엄청난 집 아가씨였을 거야.’
리지야는 확신했다. 그녀는 중앙 사교계에 대한 욕망이 대단했지만 보고 배울 만한 스승이 없었다.
그러다가 일을 구한다며 바이올렛이 찾아왔을 때, 이 사람이다 확신했다.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투며 손짓이며 표정까지도 전부 훔쳐서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들뿐이었다.
그것은 리지야의 부모도 마찬가지였음이 분명했다. 원래 하녀들이 적당히 꽃 장식을 해 왔음에도 특별히 더 지출을 해 바이올렛을 고용했으니까.
바이올렛이 어젯밤을 새워서 만든 그물주머니를 나무에 달았다. 그 안에는 유리로 만든 구슬이 담겨 있었고, 구슬 속 마법석이 밝은 빛을 내며 조명 역할을 했다.
여러 색의 구슬을 나무에 달자 정원 안에 근사한 분위기가 났다.
리지야가 사다리 아래 서서 위로 올라가 조명을 다는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호텔이 열리면 오픈 파티가 있을 거래요.”
“아.”
“거기 윈터 블루밍 경이 올…… 아!”
순간 힘이 풀린 바이올렛이 휘청거리자 리지야가 기겁을 해서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고 저도 모르게 욕설을 했다.
리지야의 욕설에 정신이 번쩍 든 바이올렛이 말했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그렇게 험한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언제 뭐 얼마나 험한 말을 했다고? 큰일 날 뻔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지금!”
이 아가씨를 어쩌면 좋을까.
바이올렛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단호함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리지야.”
“네, 네?”
리지야가 움찔거렸다.
지금까지도 바이올렛의 행동과 태도가 지금까지 본 모든 사람과 다르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작정하고 한 소리를 하려 들었을 때는 그 위압감이 몇 배로 거세졌다.
“중앙 사교계에 진출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요?”
“마, 맞아요.”
“그렇다면 이번 오픈 파티는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파티가 될 거예요. 거기서 쌓은 인맥으로 여기 코르시카의 수도에 진출할 수도 있게 되겠죠.”
“누가 그걸 몰라요?”
“그러려면 이렇게 말괄량이 같은 말투를 써서는 안 돼요.”
“오빠는!”
“조르디 도련님께서는 중앙 사교계에 진출하실 마음이 없으시니 계속 말괄량이로 계셔도 괜찮아요.”
두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기에 가까이 오던 예핌추크 부인은 리지야가 혼나고 있는 걸 알고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는 근처에 있던 하녀에게 말을 거는 시늉을 했지만 귀만은 그들 쪽으로 열려 있었다.
바이올렛이 뿌루퉁해진 리지야의 어깨를 바로 폈다.
“그리고 어깨를 이렇게 말고 서 있지 말아요.”
“내가 키가 커서 비웃는단 말이에요.”
“그게 왜요? 멋있기만 한데.”
“……그래요?”
“이렇게 어깨를 말고 있는다고 키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불필요한 행동이에요.”
“바이올렛은 어떻게 그렇게 자세가 반듯해요? 목도 길고 예쁘고.”
“어려서 쭉 발레를 했어요.”
“아.”
리지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깨를 펴고 섰다. 예핌추크 부인이 폭 한숨을 쉬었다. 제가 그렇게 말할 땐 안 듣더니, 졸졸 따라다니던 바이올렛의 말은 들었다. 딸이지만 순간 얄미워졌다.
그래도 바이올렛에게는 고마움을 느꼈다.
예핌추크 부인이 안심하고 떠난 뒤, 파티 손님인 리지야의 또래 여자들이 들어섰다.
바이올렛이 일을 다 끝내지도 않았는데, 일찍 온 손님들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코르시카 동부에서 꽤 이름 있는 가문 영애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탕트 볼을 한 그들은 들어서자마자 역시나 카닉 호텔의 오픈 파티 이야기로 바빴다.
이들 중 가장 모든 면에서 위세가 떨어지는 것은 예핌추크였다. 그렇게 말괄량이이던 리지야가 테이블 앞에 앉으니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맞장구만 쳤다.
“어머, 리지야 양은 키가 더 자란 것 같네요?”
“세상에! 이러다가 180도 넘겠어요!”
키가 커서 주눅이 들어 있던 것은 엄살이 아니었던 듯했다.
바이올렛이 짐 가방에 남은 것을 정리하는데, 이 모임에서 가장 유력 가문인 에이든 가의 엘자 에이든이 들으란 듯이 리지야에게 물었다.
“리지야 양. 저 꽃을 관리하는 여자는 귀족이었던 것 같은데요?”
“글쎄요, 아마도…….”
“아무리 몰락 귀족이어도 저런 일을 하다니. 자존심도 없나 봐요.”
리지야가 멈칫했다.
그러나 지금 바이올렛의 편을 들어 주기에는 너무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저보다 훨씬 좋은 가문 아가씨들이 있어 주눅이 든 상태였다.
힐끔 그쪽을 보던 바이올렛이 리지야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제 쪽으로 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다행히 리지야가 알아듣고 바이올렛에게 오자 그녀가 소곤거렸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오는 건 결례예요.”
“그런 것 같기는 했지만 말하기가 좀 그래요.”
“그리고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바이올렛이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찻잔 잡는 시늉을 하며 새끼손가락을 폈다.
“소지를 펴면 안 돼요.”
“예에? 저절로 펴지는데?”
“안 돼요.”
“왜요?”
“예법이에요.”
“엘자 양은 펴고 있는데요?”
“그러네요. 아직 어리시니까 배우시면 되죠.”
바이올렛의 말에 표정이 확 밝아진 리지야가 신이 나서 테이블로 돌아가려는데 바이올렛이 그녀의 품에 유리 화병 하나를 안겼다.
“괜히 부른 것 같으니까 이거 가져가세요. 앞에 두면 돼요.”
“빈 화병을요?”
“네. 라크라운드 중앙 사교계에서는 종종 티 파티를 할 때 호스트 앞에 이런 입구가 좁고 투명한 화병을 둬요. 그리고 나뭇잎이든 꽃잎이든 운 좋게 이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소원을 비는 거예요. 그 소원이 다 이루어진대요.”
“어머, 재밌다.”
리지야가 홀린 듯이 대답하며 유리 화병을 끌어안고 물었다.
“바이올렛도 소원 빌어 본 적 있어요?”
“아. 한 번.”
“어땠어요? 이뤄졌어요?”
“아직이에요. 하지만 이뤄질 거라고 믿어요.”
열여섯 살 봄으로 기억한다.
그 좁은 입구로 쏙, 작은 연분홍색 벚꽃이 떨어졌다. 바이올렛은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하게 소원을 빌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해 주세요.’
바이올렛의 소원은 언제나 같았다.
리지야가 달려가 엘자에게 손가락 펴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화병을 앞에 두자 다들 호기심을 가지고 살폈다.
라크라운드는 사교계가 굉장히 발전한 나라였으므로 그곳의 문화를 아는 것은 굉장히 관심을 끄는 요소였다.
바이올렛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마차에 타려다 한 번 더 호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와 헤어진 지도 이제 1년이 지났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조금은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