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윈터는 그 후 며칠째 수면제를 먹고도 잠을 이루지 못해 몽롱한 상태였다. 그때 하옐이 침실로 들어섰다.
“대표님.”
“바이올렛 어디 있어?”
“대륙을 넘어가셔서, 코르시카에 붙은 키론이라는 바닷가 마을에 계신답니다.”
코르시카는 축제가 많은 나라로 유명했다.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내내 날씨가 좋아 놀기 좋은 곳이었다.
“놀러 간 거야, 뭐야.”
윈터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하옐이 말을 이었다.
“키론에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가 귀향한 직원이 있어서요. 작은 마님 안위를 맡기고 급여를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거기도 엄청 취업난이라.”
“그래.”
“다시 업무 복귀하시죠?”
“일이라도 해야 시간이 갈 것 아냐.”
윈터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지만 하옐은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로 시간을 때우겠다는 저 마인드는 이해가 안 갔지만, 급한 불은 끈 느낌이었다.
*
전날 바이올렛은 거미줄과의 전쟁을 치른 후 시트가 없어 나무 판만 있는 침대 위에서 잤다. 그녀가 피곤함을 못 이겨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문밖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이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클러치를 찾아 쥐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유일하게 들고 나온 물건인 총을 꺼내 쥐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 살던 아저씨가 그러는데, 아무래도 귀족 같다던데?”
“그럴 리가 있어요? 저 낡은 집에?”
“요즘 세상엔 귀족이어도 망하면 이런 데 살아야지, 뭐.”
“귀족이면 우리 다 와서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바이올렛이 조금 안심하며 총을 다시 클러치에 넣고 문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자 마을 대표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사 오셨소?”
“그렇소만. 내 집 앞에서 무슨 일이시오?”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묻는 바이올렛을 의아하게 살피고 있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이사 온 거면 저녁에 마을 회관으로 와서 주민 신고를 하고, 여기 방파제 이용하는 돈을 내셔야 한다오.”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참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그러지 않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마을에 여자 혼자 와서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상황을 따져 가며 그른 선택을 하는 약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곧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참나무를 말하는 게요?”
“그렇소.”
“라크라운드 법에 방파제는 소유주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소. 여기는 도스 공국령이니 법이 같을 텐데, 누구한테 이용료를 낸단 말이오? 관리비라면 모를까.”
그녀의 지적에 남자가 움찔했다. 동시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장님?”
“그러게, 무슨 소리래? 숲 관리도 마을 사람이 다 돌아가면서 하잖아요?”
“이 숲, 예핌추크 가문 것이 아니었어요? 그 가문에다가 이용료를 내는 거라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자 이장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더니 소리쳤다.
“회, 회관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네들!”
그러더니 정신없이 도망쳐 달려갔다.
온 마을 사람들이 갑자기 도망치는 이장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금방 앞이 조용해지자 바이올렛이 비틀거리며 문틀을 짚었다.
못 참고 지적하긴 했지만 나중에 이장이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는 대신 바이올렛은 이 근처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가진 예핌추크가에 인사를 하러 갈 준비를 시작했다. 가서 일거리도 좀 얻어 볼 생각이었다.
옷이라고는 가져온 단벌 드레스뿐이었지만 신경 써서 매무새를 만지고 모자를 썼다. 그녀가 막 나가려고 문을 여는데, 앞에 마을 여자들이 돌아와 있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 인사를 못 했소. 새로 이곳에 이사를 오게 된 바이올렛이라고 하…… 왜, 왜들 들어오시는 거요?”
“어휴,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산대요?”
“목수부터 부르세요. 기둥 금방 무너질 것 같은데.”
사람들이 다짜고짜 청소를 시작하자 눈이 휘둥그레진 바이올렛이 근처의 자신과 나이가 가장 비슷해 보이는 여자를 당겨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이장 그 망할 놈은 뱃사람들이 잡으러 갔어요. 아휴, 어쩐지 3년 전에 그 아저씨가 이장이 되고부터 갑자기 이용료를 받는 거예요!”
“그랬소?”
“아가씨 아니면 영영 모를 뻔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청소라도 좀 해 주려고.”
“그래도 집주인 허락은 받고 들어오시는 게 어떻소?”
“에고, 벌써 들어와 버렸네!”
여자, 핌이 놀리듯이 말하더니 같이 청소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테이블 위에는 갑작스럽게 감자 수프가 놓였고, 금방 뽑아 온 당근과 갓 구운 검은 빵도 생겼다.
바이올렛은 난처해하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래도 제 집에 처음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게 싫지 않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까 두려워했던 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
바이올렛이 도착한 바로 그다음 날 이장이 쫓겨났다.
횡령당하던 키론 사람들의 돈을 지켜 준 덕에, 바이올렛은 수월하게 마을에 정착했다. 예핌추크 가문에서도 때마침 종종 있는 티 파티의 꽃 장식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던 차라 하여 일거리도 받을 수 있었다.
걱정했던 큰일들은 수월히 풀려 나갔지만 예상 못 한 작은 일들은 엉망진창이었다. 혼자서 생활하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나 살면서 살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해 본 적 없는 바이올렛에게는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
낡아 빠진 집은 거의 새로 지어야 했다. 특히 집의 기둥이 전부 다 썩어 있어 목수를 불러다 새로 바꾸어야 했는데, 목수를 부를 돈을 모을 때까지 삐걱거리는 집에서 매일 밤 천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가슴 졸이며 지내야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에야 집은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 되었다.
바이올렛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집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것은 처음이었다.
윈터가 없는 것에 적응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도 제 곁에 항상 있어 주는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다만, 바이올렛은 종종 제가 유난히 아끼는 동그란 나무 식탁 앞에 윈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환상과 마주치곤 했다.
그녀의 환상 속 윈터는 이 낡은 집을 정말로 좋아해서, 천장에 쿵쿵 머리를 박고 다니면서도 좀 투덜거렸을 뿐, 금방 씨익 웃어 버리곤 했다.
처음에는 최대한 윈터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에 대한 쓸쓸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이제는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키론의 겨울은 가장 추운 날도 영상 5도 정도였고, 2월인 지금은 이미 봄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이 없어 느지막이 일어난 바이올렛은 유난히 따듯한 날을 맞아 모처럼 이불을 빨고 뱃사람들이 매달아 준 빨랫줄에 침대보를 탁탁 털어 널었다.
이제 집안일도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는데 동네 아이들 무리가 우르르 달려왔다.
“바이올렛! 좀 숨을게!”
“숨겨 줘!”
“또 사고를 쳤구나, 요 꼬맹이들?”
드센 동네 어른들과 달리 바이올렛은 큰 소리도 내지 않았고, 화내는 법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대륙 출신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모두들 그녀가 보통 귀족이 아닐 거라는 걸 알았다. 외적인 것을 전부 제외해도 명백했다.
어른들에게는 이질적인 그녀의 특징들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구석이었지만, 아이들에게 바이올렛은 그저 화 안 내는 좋은 어른일 뿐이었다.
까르륵 웃은 아이들이 집에 숨어 들어가고, 잠시 후 아이들을 잡으러 다니는 어른들이 보였다. 바이올렛이 모른 척 살며시 손을 들자 사람들이 몰려와 그녀의 집에서 아이들을 꺼내 갔다.
“으앗! 잘 숨었는데!”
“맨날 이 집에 숨으면서 안 들키기를 바라?”
아이들이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가자 바이올렛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이웃집의 핌이 찐 감자를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바이올렛, 이것 좀 받아요.”
핌은 다른 마을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바이올렛과 사이가 좋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겨 주고 알려 주기도 했다. 핌이 특별히 너무나 잘해 주어 가끔은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을 때도 있었다. 게다가 너무 극존칭이라 혹시 제가 누군지 들통난 건가, 싶을 때마저 있었다.
바이올렛이 침대보와 이불을 널고 감자를 받아 들었다.
“세상에. 고맙소. 어디서 이렇게 좋은 감자가 생겼소?”
“엊그제 항구에 타지 사람들이 왔더라고요.”
“타지 사람이 웬일일까. 아, 음료를 좀 드시겠소?”
“좋죠.”
바이올렛이 감자를 들여다 놓고 유리잔 하나를 꺼내 사과차 한 잔을 만들었다. 핌은 늘 시원한 것을 좋아해, 얼음도 잔에 가득 부었다. 바이올렛이 얼리는 정사각형의 얼음에는 항상 작은 꽃들이 함께 얼려져 있어 보기에 무척 사랑스러웠다.
핌이 사과차를 받아 드는 것과 동시에 잔소리했다.
“아휴, 그렇게 나긋나긋하시니까 온 동네 애들이 여기 와서 노닥거리는 거 아니에요?”
“아이들 와 있으면 북적거려서 나도 좋소.”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하는데 단숨에 음료를 마시고 난 핌이 침대보를 살피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바이올렛은 참 빨래를 못하네요. 이게 빤 거야, 만 거야?”
“……열심히 한 건데.”
“정말 손에 물 한 번 안 묻히고 자라셨나 봐요. 다시 합시다. 따라오셔요.”
“다시?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소?”
바이올렛이 말려 보려 했지만 핌은 이미 빨래를 다 걷은 후였다. 그녀가 아직 치우지 않은 커다란 나무통에 빨래를 다시 넣으며 말했다.
“하여튼 저 멀리 왕녀님도 이렇게 일을 못하진 않을 거예요.”
“미안하게 됐소.”
열심히 했는데 자꾸 못한다, 못한다 하니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살짝 토라져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보다 세 살이 어림에도 왠지 연상처럼 느껴지던 바이올렛의 드문 표정에 핌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녀가 물을 가져다 부으며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슬리퍼 벗고 여기 들어가요.”
“여기를?”
“네. 발로 꼭꼭 밟아요.”
바이올렛이 눈이 동그래져서 핌을 보자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또 그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무례한 짓을.’ 하는 표정 지으시네요.”
“내가 그랬소?”
“그러셨어요. 얼른 벗고 들어가요.”
핌의 재촉에 바이올렛이 별수 없이 맨발로 나무통에 들어갔다. 그녀가 치마가 젖지 않게 잡아들고는 두 발로 빨래를 꼭꼭 밟으며 웃었다.
“아. 왜 들어가서 밟으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소.”
“그렇죠? 아이고, 힘도 하나도 없으시네.”
핌이 놀리면서도 바이올렛이 넘어지지 않게 팔을 잘 잡아 주었다. 금방 땀이 나도록 힘을 쓰던 바이올렛이 뒤늦게 물었다.
“그나저나 타지 사람들은 어디 사람들인데 여기 온 거요?”
“아, 그게요.”
핌이 제가 설명 안 했냐는 듯 박수를 치고 말을 이었다.
“카닉 호텔을 짓고 있대요. 여기 관광객 늘면 일자리 늘어날 거라면서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던데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