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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41화 (41/176)

41화

윈터가 정신을 차린 것은 호텔의 제 방이었다.

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었고, 제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다. 손목에서 시계가 없어진 걸 안 그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바이올렛이 준 시계를 윈터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아는 하옐이 협탁 위에 올려 두어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윈터가 시계를 다시 차며 중얼거렸다.

“정말 어이가 없군.”

바이올렛이 제 앞에서 죽은 게 충격이었는지, 늦지 않았다고 자위하던 제가 너무나 멍청해서 자괴감을 느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제 곁을 지옥으로 여겨 떠나서인지 몰라도. 제가 이 덩치로 쓰러졌다는 게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수시로 윈터가 깨었는지를 확인하며 들락거리던 하옐이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달려왔다.

“대, 대표님!”

“시끄러워.”

윈터가 인상을 썼다. 하옐은 그의 짜증까지 반가워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감기 한 번 안 걸리시던 분이 쓰러지시니까…….”

“얼마나 됐어?”

“하루요. 열아홉 시간 동안 누워 계셨습니다.”

“수면제 먹어서 그래.”

윈터가 건성으로 대꾸하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이올렛은?”

하옐은 당연히 윈터가 그걸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일단은 도스 공국의 배를 타셨습니다. 목적지 계속 확인하겠습니다.”

“금방도 들키는군, 그 공주님은.”

“아뇨. 대표님께서 저에게 작은 마님 인간관계를 다 알아 두게 시키셨잖습니까. 엔나 테시아 오겔 부인의 화원부터 가서 차근차근 찾았더니 곧 답이 나온 겁니다.”

“위치 찾으면 그 지역 사람 하나 골라서 돈 주고 바이올렛 몰래 보살피게 해.”

“예. 그리고…….”

하옐이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자 윈터가 핀잔했다.

“뜸 들이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저…… 작은 마님께서 그동안 받은 물건을 전부 파시고 돈을 남기셨습니다.”

“……돈을 남겼다고?”

“게다가 롱 리우드 땅문서도 되찾아서 대표님이 서명만 하시면 바로 소유권 이전이 되게 남겨 놓으셨고요.”

윈터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렇게 지긋지긋한가.”

하옐은 한 방에 다 처리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는지 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리고 편지도 한 장 남기셨습니다.”

윈터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윈터 블루밍 귀하.

윈터, 말할 용기가 없어 이렇게 편지로 적어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을 기억해요?

그날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이야기 듣기에는 마치 영웅 같았는데, 결혼식 날 마차에서 내려서 보니 무뚝뚝하지만 어딘지 그 자리가 어색해 보이는 당신이 보여 웃음이 났어요. 이야기 속에서는 손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당신이 마주하고 나니 정말로 사랑스러웠어요.

그래서, 당신이 내 남편이라서, 내가 당신의 아내가 될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언제나 불행이네요. 정말로 미안해요.

롱 리우드의 뺏겼던 땅은 지참금 명목으로 받았으니 법적인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물건도 제법 괜찮은 가격에 팔았어요.

나는 아직도 당신이 애틋하고 소중해서, 당신이 바라는 걸 당신에게 안겨 주고 싶어요. 그러니 적은 돈이라도 받아 줘요.

마지막으로 이혼장에는 당신의 서명만 있으면 돼요. 천천히 생각하고 서명해 줘요. 그 이후의 일은 내가 돌아와서 처리할게요.

당신이 행복하길.

바이올렛 로렌스

윈터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결혼을 행운이라고 생각하던 그녀가 3년 동안 그 모든 기대감이 무너진 지옥에서 살았다.

아내가 떠난 후에야, 윈터는 바이올렛이 가여웠다. 윈터가 하옐에게 이혼장을 건넸다.

“파쇄해.”

“예, 대표님.”

하옐이 고개를 숙이고 걱정스레 윈터를 살핀 후 침실을 나갔다.

윈터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찬찬히 편지를 떠올렸다.

바이올렛 로렌스.

바이올렛 블루밍이 아닌, 바이올렛 로렌스의 편지였다.

*

바이올렛은 제가 가져온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맨 처음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이 추운 날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니, 제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러나 얼음물이 더 맛있다던 윈터의 말을 들어서인지 차가운 음식이 당겼다.

그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항구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니, 항구로 도스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배가 들어섰다.

배 위에서 바이올렛을 발견한 샤론 도스가 손을 흔들었다.

“바이올렛! 여기야!”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샤론과 함께 온 그녀의 오빠이며 도스 가문의 후계자인 페런 도스가 배에서 내려왔다.

그는 밝은 금발에 샤론과 같은 오렌지색 눈동자를 가진 자상한 인상의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랐다. 흠잡을 곳 없는 신사인 그는 현재 라크라운드 해군에 복무 중이라 새하얀 해군복을 입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배에 함께 올라탔다.

“오랜만이야, 바이올렛.”

“그러게. 내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으니까.”

“모처럼 만나서 잔소리구나.”

페런이 경쾌하게 부서지는 파도 같은 웃음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해해. 페런은 내가 남편과 결혼하는 걸 싫어했으니까.”

“네가 돈 때문에 결혼하는 게 싫었던 것뿐이다. 게다가 이렇게 도망쳐 왔잖아, 결국은.”

“그건 할 말이 없네. 도망친 건 사실이니까.”

그들이 올라타자 잠시 정박했던 배는 그곳을 떠났다.

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서쪽 방향에는 대륙과 대륙 사이에 섬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도스 공국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있는 대륙에 붙은 작은 반도. 그곳에 마을, 키론이 있었다.

수백 년 전 그 땅의 주인이던 코르시카 왕국에 해적이 창궐했을 때, 도스 공국에서 해군 병력을 보충해 준 선물로 받은 땅이었다.

그 덕에 딱 키론 한 마을만이 도스 공국의 영지였고, 도스 가문은 수백 년 전 라크라운드의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기 때문에 다른 마을에 비해 라크라운드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러므로 바이올렛이 이주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방파제 역할을 하는 참나무 숲 사이, 낡아 빠진 집에 들어선 샤론이 제 오빠에게 소곤거렸다.

“바이올렛이 여기서 어떻게 살아? 얼마 못 살고 우리 집으로 들어올 것 같은데?”

바이올렛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윈터에게 넘기고 나온 탓에, 그녀가 들고 온 아주 적은 돈으로는 이런 집밖에 구할 수 없었다.

샤론의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바이올렛이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버틸 수 있는 한 버텨 볼게.”

“애초에 왜 도망은 친 거냐고. 지난번에 내가 기차에서 얘기해 보니까 세상에 그렇게 널 잘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 같던데.”

아직 그때 제가 만난 것이 윈터가 아닌 바이올렛이었음을 모르니 이런 소리를 할 만했다.

샤론은 연신 투덜거리며 툭툭 거미줄을 뜯어냈다. 바이올렛이 열려다 못 연 창문은 페런이 주먹으로 두들겨 맞춰 강제로 열어 주었다.

두 사람 다 곱게 자라긴 했어도 도스 공국 자체가 강력한 해군 중심의 국가이다 보니 바이올렛보다는 생활력이 좋았다.

바이올렛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고마워. 정말.”

“배까지 끌고 와서 도와주자고 한 건 페런이지.”

샤론이 힐끔 페런을 보며 말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골드가 떠난 이후에 바이올렛은 내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야.”

골드는 바이올렛의 큰오빠이던 웨인의 별명이었다. 바이올렛도, 에쉬도 색깔의 이름인데 웨인만 아니라면서 바이올렛이 아쉬워해 제 스스로 그렇게 부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웨인은 그만큼 바이올렛을 아꼈다.

페런과 웨인은 세상에 다시없을 절친한 친구였고, 하도 붙어 다녀 사람들이 쌍둥이냐고 놀릴 정도였다.

페런이 웨인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짓자 바이올렛이 놀리듯이 말했다.

“그 친동생 결혼식에도 안 나타나셨지만.”

“이해한다면서 또 뭐라고 하네. 그보다 너 언제부터 그렇게 비꼬는 말을 했어?”

“아…… 그러네.”

윈터에게 입버릇이 옮았다. 역시 나쁜 건 빨리 물들기 마련이었다.

바이올렛이 창밖으로 보이는 황량한 정원을 보았다.

문뜩 윈터가 새로 구했다는 수도의 집이 궁금해졌다. 정원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게 근사하다면서.

살다가 언젠가, 그 남자와 편안한 관계가 되면 한 번쯤 보러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인생은 모르는 일이니까.

*

샤론과 페런은 몇 번이나 조금이라도 문제 생기면 전신을 보내라고 말한 후 배를 타고 공국으로 떠났다.

모두가 떠나고 나자 그곳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바이올렛은 물끄러미 빈집을 바라보았다.

문도, 창문도 망가져 있어 어디부터 어떻게 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어떤 집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다른 대륙에서 전신으로만 거래를 했으니 이 모양이었다.

라크라운드 남부보다도 남쪽이라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따듯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는 벽난로 대신 화로가 하나 있었다. 바이올렛이 제 앉은키만 한 화로 쪽에 허리를 숙였다. 안에는 숯불 대신 손톱만 한 마법석이 들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훅 하고 불어 보니 불씨가 반짝였다.

“세상에, 신기해라…….”

눈이 동그래진 그녀가 혼잣말하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덜컹거리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도망할 곳을 생각하면서도 남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여기는 카닉 일족이 사는 알리카가 있는 대륙이었다. 라크라운드보다 과학의 발전은 매우 더뎠지만 그것들을 전부 마법으로 충족했고, 그 마법들은 대륙을 벗어나면 힘을 잃었다.

치안이 좋고 라크라운드와 같은 말을 쓰며 남편의 회사가 아직 침투하지 않은 곳. 키론은 그녀가 고르고 고른 그녀가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바이올렛은 빗자루를 찾아 들고 집 안 여기저기에 가득한 먼지 낀 거미줄을 보았다. 아까 샤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내던데, 그녀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원에서 거미를 종종 보긴 했지만 그나마도 사용인들이 와서 쫓아 주곤 했었으니까.

바이올렛이 눈을 질끈 감고 빗자루를 휘둘러 거미줄을 건드렸다.

“여기서 도망쳐 봤자, 남편이 말한 것처럼 되는 거야.”

그녀가 스스로를 달랬다. 남편이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못 하는 공주님으로 있을 생각은 없었다. 공주님이라 불리는 것이 싫다면 제 스스로 그 이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가 되면 상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불러도 화가 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던 중, 살아 있던 거미를 건드렸는지 땅에 툭 떨어졌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원래 크게 감정 표현을 하지 않도록 배운 바이올렛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음에도 어깨를 움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심장은 바닥에 철렁 떨어졌다 되돌아온 것처럼 무리가 갔다.

그녀가 가까스로 눈을 뜨며 혼잣말했다.

“……정말 공주님이 따로 없으시네.”

이제야 남편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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