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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40화 (40/176)
  • 40화

    윈터는 마치 얼굴의 모든 근육의 사용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는 동상처럼 꼼짝을 않고 바이올렛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온도는 점점 떨어져 세상이 눈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건지, 듣지 못한 건지. 윈터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겨우 들어 바이올렛의 머리며 얼굴을 더듬거렸다.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한 윈터가 중얼거렸다.

    “바, 방금 악몽을 꿨어. 정말 말도 안 되는 꿈이었어. 당신이 나한테 약을 먹였잖아. 그래서 헛걸 봤나 봐.”

    그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바이올렛의 손목을 감쌌다. 맥이 제대로 뛰는 것을 확인하자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끔찍한 감정과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억지로 뇌를 속이는 세뇌에 그의 미소는 끔찍하게 비틀려 있었다.

    “당신이 자꾸 불안하게 하니까 그딴 꿈을 꾸잖아.”

    “…….”

    “아, 나 때문인가. 그래. 내가 나쁜 새끼였지. 이제 안 그럴게. 이제 정말 안 그래. 당신이 붙잡으면 바로 멈출게. 당신이나 내가 죽을 때까지 절대로…….”

    “……윈터.”

    “도대체 뭐 그딴 꿈이 다 있어.”

    윈터가 그 큰 덩치로 덜덜 떨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아주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총성이 들려서인지 온 호텔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문밖을 향해 말했다.

    “괜찮네, 아무 일 없으니 돌아가게.”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렇대도.”

    그녀의 대답에 호텔 직원들이 찝찝한 기분으로 흩어졌다.

    밖이 조용해지자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았다. 그는 겁에 질린 눈동자로 이것이 꿈이었음을 바이올렛이 확인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제 목덜미를 보였다. 윈터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것 봐요. 꿈이 아니에요. 당신이 이랬잖아요.”

    “바이올렛…….”

    “우리가 처음 몸이 바뀌던 날, 당신이 바이델린 커피 원두 거래를 위해서 내가 붙잡아도 떠나던 때. 그날은 정말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비참해서.”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다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그냥 이전에 있었던 사소한 일을 설명하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티 파티에 있었는데, 디에브가 같이 있자고 했어요. 그게 싫어서 티 파티에서 뛰쳐나왔는데. 돌아가지 않으면 혼날 걸 아는데, 돌아가기가 죽기보다 싫은 거예요. 그래서…… 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날.”

    “…….”

    “그런데 죽기는커녕 몸이 바뀌어 있더군요. 그 다음에는 뭐였더라.”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가 알았다는 듯 손가락으로 톡 제 무릎을 두들긴 후 말을 이었다.

    “벽장에 갇히던 날이요. 당신이 내 편을 들어 줄 줄 알고 갔었는데, 나중에 얘기하자고 해서. 난 항상 당신에게서, 돈에게 밀려 버리고 마는 게 서러워서. 그때 지금처럼 총으로 내 머리를 쐈어요. 아, 그날 당신 몸을 훔쳐서 수도로 가는 길이 얼마나 자유롭던지. 당신은 늘 하고 싶은 걸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으니까. 그날 내 마음은 영원히 모를 거예요.”

    바이올렛이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총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윈터가 서둘러 그녀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탄창을 제거해 던졌다.

    그가 멍하니 물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몸이 바뀌는 거라면 당신 혈통 때문이잖아요.”

    “그게 아니라.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죽음이 쉬워? 이러다 상처라도 남으면? 진짜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내가 바라는 건 죽는 거였어요.”

    “…….”

    “살려고 한 게 아니에요. 죽으려고 한 거지. 죽고 싶어서 수면제를 먹고 독약을 먹고 총을 쏴 봐도 죽질 못했던 것뿐이에요. 이제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바이올렛이 가만히 윈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떠나려고 해요. 당신을.”

    이제 윈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히 말했다.

    “나에게서는 한 번도 돈이 당신을 이긴 적이 없어요. 그러니 전부 돌려줄게요.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

    “가지 마.”

    “아, 이 구두도 당신이 준 거였죠.”

    바이올렛이 말하며 녹색 벨벳에 진주가 장식된 구두를 벗으려 하자 윈터가 다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당신 거잖아요. 줄게요.”

    윈터의 넓은 어깨가 거친 숨으로 오르내렸다. 그가 순식간에 눈물 젖은 얼굴로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없이 당신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 어떻게 살겠다고 여기를 떠나?”

    “모르겠네요, 그것도.”

    바이올렛이 입술을 깨물었다.

    큰오빠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몸이 약했고, 결국 어려서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 바이올렛은 언제나 강한 사람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윈터 블루밍을 사랑했었다.

    그런데 어떨 때는 가끔, 남편이 약해질 때가 있다. 바위 같은 이 남자가 아주 가끔 보이는 그의 약한 부분마저 바이올렛은 사랑했다.

    그래서 자신이 그의 곁에 머무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강함이 제 약함을 안아 주고, 제 강함이 그의 약함을 안아 주길 바랐으니까.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3년이에요. 그동안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천천히 당신을 미워하게 됐어요.”

    “바이올렛…….”

    “조금만 날 봐 주지.”

    “…….”

    “이렇게 늦기 전에 잠깐만, 한 번만이라도 나 좀 봐 주지. 마음이 식는 데 3년이나 걸렸는데, 그사이에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내 편이 되어 주었다면. 나는 아직도 당신을 떠날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

    바이올렛이 윈터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이제 와서 왜 울어요?”

    “…….”

    “이제 와서 왜 그래요.”

    그녀가 윈터의 손을 놓으려 하자 윈터가 다시 힘껏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윈터가 다섯 살 때 제 어머니가 저를 버리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이런 얼굴로 어머니를 붙잡았을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그를 달랬다.

    “한 번만 내 편을 들어 줘요, 윈터. 당신 곁에 있으면 나는 죽어 가면서도 죽지 못하는 지옥에서 살아야 해요. 제발.”

    “…….”

    “제발 나 좀 구해 줘요, 윈터.”

    그녀의 부탁에 윈터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키더니 윈터를 한 번 꼭 안았다.

    “고마워요. 당신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

    “잘 있어요.”

    그녀가 몸을 천천히 일으킨 후 그대로 그곳을 나갔다.

    윈터는 제 곁이 지옥이라고 말하는 바이올렛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윈터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옥으로 다시 바이올렛을 붙잡아 올 수 없어 멈췄다가, 그녀가 없는 지옥에서 견딜 수 없어 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바이올렛.”

    윈터가 몽유병 환자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내를 불렀다.

    “가지 마. 바이올렛. 가면 안 돼.”

    그가 눈길로 걸어가는 것을 발견한 풋맨이 기겁을 해서 달려왔다.

    “대표님! 외투도 없이……. 외, 외투와 장화를 가져다드릴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윈터가 듣지 못하고 걸음을 옮기자 풋맨이 사색이 되어 그를 붙잡았다.

    “여기 누가 대표님 외투와 장화 좀 가져다주세요!”

    “아이고, 대표님!”

    바이올렛이 처음 왔을 때 그녀를 따듯하게 맞아 주었던 룰루가 달려 나왔다. 바이올렛이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녀를 알아본 윈터가 말했다.

    “아, 자네.”

    “장화라도 신으세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정 많은 룰루가 울먹이며 소리치자 윈터가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이올렛이 떠났어.”

    “예?”

    “아내가 나를 떠났어.”

    “제, 제가 모셔 올게요! 어디로 가셨는데요!”

    “일단은…… 놔둬야지. 지금은 내 곁이 너무 힘들다고 하니까.”

    윈터는 멍한 목소리로 룰루에게 물었다.

    “마음이 풀리면 돌아오겠지?”

    “대표님…….”

    “돌아와야지. 나 혼자 어떻게 살아. 나 혼자 뭐 하러 살겠어.”

    윈터가 손으로 눈물을 훑어 내고 기차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그녀가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까, 하루라도 더 제 곁에 있어 줄지 모른다.

    그럼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당신의 지옥이었다면 차라리 내가 죽을 테니 여기서 지내라고.

    그는 머릿속에 끝없이 반복되는, 바이올렛이 제 머리에 총을 쏘던 순간과 마주하며 가까스로 기차역에 도착했고, 바이올렛이 탄 기차가 서쪽으로 떠났음을 알았다. 그리고 기차역에서 돌아서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뒤따라온 호텔 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

    바이올렛은 혹시나 윈터가 찾아올까, 정신없이 달려 기차역에 도착했고, 다행히 곧바로 도착한 기차를 탔다.

    기차역은 북적였으나 늦은 밤 서쪽으로 가는 기차는 텅 비어 있었고 몹시 추웠다.

    모든 것을 윈터에게 주고 떠났으므로 그녀에게는 아주 적은 노잣돈밖에 없었다. 춥고 어두우니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여기부터 제가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하자, 바이올렛이 숄로 몸을 감싸고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한심하고 나약하구나.”

    그녀는 제 스스로의 나약함을 싫어했다. 그래서 한동안 제 스스로가 싫었다.

    사색이 된 윈터를 두고 나온 것도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 충격을 주지 않았다면 자신을 보내 주지 않았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금 사랑해 마지않는 제 왕국을 세우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

    그녀는 혼자 이렇게 낯설고 먼 곳으로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두려움과 자괴감을 느끼며 밤새 떨다 보니 종착역이며 서쪽 항구 도시, 란치아령에 도달했다.

    라크라운드의 남부보다 조금 더 남쪽인 란치아령은 해가 떠올라 따듯했고, 날씨가 맑고 건조했다. 궂은 날씨에서 출발했다가 명랑한 하늘을 마주하니 바이올렛의 둥글게 말렸던 어깨가 서서히 펼쳐졌다.

    그녀가 하늘을 한 번 올려 보고, 이내 모래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은 따듯하네.”

    바이올렛이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다시 서쪽 바다를 보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나약하지 않아.”

    바이올렛은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나약하다 믿었던 자신에게 나약하지 않을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물론 제가 뛰어나게 강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째서 나약함의 증거가 되겠는가.

    자신은 오늘까지 버텨 왔고, 이제는 살아남을 결심을 했다.

    “신께서 내 죽음을 바라지 않는 것이 어째서 형벌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그녀가 중얼거렸다.

    “축복일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몸에서 훈기가 돌았다. 그녀는 씩씩한 걸음으로 항구를 향해 걸었다.

    이제 곧 친구인 샤론이 제 가문의 배를 타고 항구에 오리라.

    그 배를 타고 이 대륙을 떠날 생각이었다.

    점점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갑자기 피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제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멀리, 더 멀리 가고 싶었다. 자꾸 어디 담겨 있었는지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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