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9화 (39/176)

39화

식사는 입에 잘 맞았고, 바이올렛은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해 일부러도 제 양보다 더 많이 식사를 했다.

욕실이 하나뿐이라 바이올렛은 객실에 있는 욕실에서, 윈터는 같은 층의 사우나에서 목욕을 했다.

먼저 목욕을 마치고 나온 바이올렛이 수면제를 꺼내 들었다.

남편은 체격이 아주 크니까, 제가 먹는 양보다 좀 더 많이 먹여야 깊이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량 이상 먹였다가 그의 건강에 해가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결국 바이올렛은 평소 제가 먹고 잠들던 양의 수면제를 윈터가 목욕을 마치고 마실 수 있도록 직원이 가져다 놓은 얼음물에 녹였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온 윈터는 여느 때처럼 차가운 물을 따라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맛이 거의 없는 약이어서인지 그는 그다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바이올렛은 레몬이 든 따듯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그를 신기하게 보았다.

“안 추워요?”

“추워.”

“그런데 왜 얼음물을 마셔요?”

“그냥 물은 맛이 없잖아.”

“똑같은데요? 그리고 커피는 왜 항상 그렇게 뜨겁게 먹는 거예요?”

커피든 차든 물이든 적당히 따듯한 온도를 즐기는 바이올렛으로서는 그의 모든 취향이 상식 밖이었다. 게다가 얼음물이 아니면 맛이 없다는 건 또 무슨 논리인 건지.

바이올렛이 미간까지 좁혀 가며 고민하는데, 윈터가 그녀의 손에서 컵을 뺏어 테이블에 두었다. 그리고 보드라운 가운 차림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침대로 가 앉아서 바이올렛을 제 무릎에 앉혔다. 바이올렛이 머뭇거리는데 윈터가 턱을 감싸 당겨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이올렛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물었다.

“화내는 건가요?”

“이번엔 맞혔군.”

“화가 났는데 입을 맞출 생각인가요?”

“어, 화풀이.”

그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음 날 올 거라고 생각하던 바이올렛을 기차역에서 발견했을 때, 그녀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음을 알았을 때의 하늘이 무너지던 기분에서 전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윈터는 바이올렛의 허리를 팔로 옭아매 끌어안으며 담담히 속삭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이 도망치면 난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그렇군요.”

“찾아내서 당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감시할 거야. 여기서 도망치는 건 당신의 인생을 완전히 박살 내는 행동이란 걸 기억해 둬.”

턱을 타고 움직인 손가락이 아직 덜 마른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쓸어 움켜쥐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세상 어디에 있어도 찾아낼 수 있어.”

“윈터.”

바이올렛이 두 손을 그의 어깨에 두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없어요. 나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없어요.”

“알 수 없지.”

“아직도 확신해요? 이 결혼을 흑자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해.”

그가 바이올렛의 가운 허리끈을 풀며 말을 이었다.

“난 이미 이 결혼으로 충분히 많은 걸 잃었어. 그나마 남은 게 당신인데, 당신까지 잃게 만들지 마.”

“…….”

가운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어깨가 드러났다. 3년을 함께했으나 윈터는 그녀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옷을 제대로 다 벗은 적도 없고, 불을 켠 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묘한 수치심에 갇힌 바이올렛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두 손으로 가운을 움켜쥐었다.

“불 꺼요.”

“아, 젠장.”

“꺼 줘요…….”

바이올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어차피 이 잠자리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나면 그는 깊이 잠들 것이고, 자신은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그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오래 못 볼 테니까, 이 밤을 빌미로.

아내의 부탁을 못 이긴 윈터는 결국 여느 때처럼 불을 껐고, 궂은 날씨에 침실에는 달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

바이올렛의 예상대로 윈터는 관계가 끝나자마자 곧장 곯아떨어졌다.

그가 완전히 잠든 후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평소 바이올렛은 이 정도 양의 약을 먹고 나서 열 시간 정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잠들어 있곤 했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가운을 찾아 걸쳐 입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제 옷으로 갈아입었다.

모자를 쓰고 클러치를 손에 든 그녀가 잠시 침대로 돌아왔다.

바이올렛은 곤히 잠든 윈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마지막으로 남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윈터.”

그녀가 가만히 잠든 윈터를 불렀다.

“여보.”

다시 가슴이 아파 왔다. 바이올렛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어깨를 감싸 쓰다듬어 보았다. 얼굴을 손에 남길 것처럼 이목구비도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강한 것들을 동경했어요. 고전 문학에 나오는 위대한 기사들, 전설의 동물, 나무 같은 것들도……. 그러다 당신 이야기를 들었어요.”

매끈하고 예쁜 이마, 숱이 많은 머리칼, 그린 듯이 반듯한 눈썹.

눈을 감은 그는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다. 바이올렛은 뚜렷하게 윤곽이 두드러지는 그의 얼굴을 감싸며 말을 이었다.

“말로 들을 때도 좋았어요. 대단해 보였어요. 그러다 직접 봤을 땐 훨씬 더 많이 당신이 좋아졌어요.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요, 당신을 만나고 운이 좋은 걸 알았다고. 그날은 정말 그랬어요. 정말로,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

바이올렛의 입술이 떨렸다.

“첫눈에 반해서…….”

비록 돈과 작위 때문에 우리가 만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해질 거라고, 바이올렛은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는 결국 자신을 아껴 줄 것이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한동안 남편을 쓰다듬고 나서, 바이올렛이 떠나기 위해 그에게서 손을 뗐다.

그런데 별안간 윈터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바이올렛이 놀라서 손목을 빼려 했으나 윈터는 오히려 그녀를 힘주어 끌어당겨 제 배 위에 풀썩 쓰러지게 만들었다.

“아, 안 잤어요?”

“잠깐 잠들었다가 깼어. 당신이 만져서.”

바이올렛이었다면 거의 약을 먹자마자 정신을 못 차리고 잠들었을 양이었다. 그러나 윈터에게는 아주 미미한 영향을 끼쳤을 뿐인 듯했다.

역시 약을 좀 더 많이 먹였어야 했다.

졸음은커녕 오히려 개운해 보이는 윈터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제 품에 안긴 꼴이 된 바이올렛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래서?”

윈터가 묻자 바이올렛이 난처하게 말을 이었다.

“끝이에요. 뒤는 없어요.”

“첫눈에 반했다?”

“그건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난 분명히 말했어요. 당신을 만나서 내가 운이 좋은 걸 알게 됐다고.”

“그게 어떻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돼?”

“어떻게 들어도 그렇잖아요?”

“전혀. 나는 돈 얘기인 줄 알았어.”

“네?”

“내가 당신 아버지가 해먹은 걸 갚아 주고, 당신 앞으로 사유 재산도 가지게 됐으니까. 그게 운이 좋단 얘긴 줄 알았다고.”

“……세상에. 당신에게 로맨스 같은 건 조금도 없군요.”

“없어. 전혀. 애초에 난 정말 당신이 나 같은 반쪽짜리는 하인으로 두기도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윈터가 무슨 생각인지 벗어 던져 두었던 옷을 다시 차려입으며 물었다.

“지금은?”

“미워요.”

“가망이 아주 없는 건 아니군.”

“무슨 가망이요?”

“앞으로 잘 지낼 가망. 우린 앞으로 잘 지내게 될 거야. 역시 늦지 않았어.”

“윈터, 말했잖아요. 우린 이미 늦었다고.”

“왜 또 그 얘기야? 지금부터 잘해 나가면 되잖아.”

옷을 입고 난 윈터가 바이올렛에게 걸어와 모자를 벗겨 던졌다.

“역시 도망가려고 한 모양이지?”

“…….”

“나에게 약이라도 먹였어?”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윈터가 용서해 줄 수 있다는 듯 픽 웃어넘겼다. 그리고 걸어가 문을 잠갔다.

“잘됐네. 이제 당신을 감시할 이유가 생겼잖아.”

“……떠나게 해 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윈터가 필사적인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씁쓸히 말했다.

“나는 떠나야 해요.”

윈터가 바이올렛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아직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아 휘청거렸다.

서둘러 그의 손에서 도망친 바이올렛이 제 클러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가방을 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계속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만 하며 3년을 보냈어요. 그게 뭐예요. 결혼하던 날부터 내가 사랑받겠다는 마음을 가져 보지도 못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린 그래서 안 돼요. 당신이 자꾸 나를 포기하게 만드니까.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해요.”

윈터가 고개를 마구 흔들어 약 기운을 떨치고 바이올렛을 보았다가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바이올렛이 클러치에서 총을 꺼내고 있었다.

윈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기차역에서 마주치던 순간부터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날 마음이라는 것은.

바이올렛의 얼굴은 언제나 보수적이다 못해 폐쇄적이었다. 그러던 그녀의 눈빛은 지금, 간혹 번뜩이던 서글픈 광기가 사라지고, 되살아난 화룡(火龍)처럼 윈터를 압도했다.

총구를 마주하니 마음이 되레 편안해졌다. 어차피 그녀가 도망칠거라면 차라리 여기서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것도 아내 손에 죽는 것 아닌가. 나쁘지 않았다. 윈터가 제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쏠 거면 한 번에 죽여 줘.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지쳤다는 듯 의자를 당겨 앉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어요. 나는 그저 당신에게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서 3년을 이렇게 살았는걸요.”

“그럼 뭐 하려고…….”

바이올렛이 총을 장전해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보여 줄 게 있어요.”

“뭐를?”

“그동안 몸을 바꾸는 법을 궁금해했잖아요. 알려 줄게요.”

그리고 그대로 제 관자놀이에 대자 윈터의 눈이 커졌다. 그가 정신없이 달리는 순간 바이올렛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호텔이 울리는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

윈터는 순간 심한 요통과 두통이 느껴져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몰려오는 충격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윈터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이렇게 바꾸면 돼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온몸이 가라앉았다.

“절대로 아니야. 아니야…….”

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언제나 차분하던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윈터의 출렁거리는 감정에 함께 출렁거렸다.

윈터가 환상통이라도 겪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없는 제 목을 마구 할퀴었다. 이건 다 꿈이고 가짜였다. 그래야 했다.

제발. 그래야만 했다.

그때 몸이 팔로 감싸이며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다시 두 사람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의 팔에 바이올렛이 있었다.

사색이 된 윈터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바이올렛을 보았다.

바이올렛은 이 순간이 우스운 듯했다. 그녀가 허리를 숙이고, 저를 바라보며 죽어 버린 것처럼 꼼짝을 않는 남편에게 희열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내가 말했잖아요. 쉽다고.”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