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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8화 (38/176)

38화

표정이 굳은 에쉬는 뭐라 대꾸를 하려 했지만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우아한 자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설핏 압도감을 느꼈다.

바이올렛은 고개를 조용히 움직여 은행장을 보았다.

“나와 은행장 사이의 문제 역시 남았습니다.”

“예, 예? 무, 문제요?”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해 안심하던 은행장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잃을 것이 없어 두려움도 없는 바이올렛의 눈빛이 은행장을 주시했다.

“두 사람이 공모해 내 재산에 손을 댄 것은 변함없는 사실 아닙니까? 그러니 만약 내가 은행장에게 크게 손해를 입힐 날이 온다면 언제든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바이올렛의 담담한 말에 은행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힘은 미약할 것이고, 그녀가 말한 날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

바이올렛은 저와 윈터 부부의 이름으로 금고 하나를 빌린 후 롱 리우드 5,000카타샨의 땅문서와 란치아가로부터 받은 돈을 넣었다.

계획한 것을 끝내고 나니 겨울의 짧은 해가 넘어간 뒤였다.

기선을 제압하려 강한 척하느라 있는 기운을 다 끌어다 써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먼저 저택으로 가 있으라고 했는데도 굳이 배웅을 나선 젠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젠이 휘청거리는 바이올렛을 부축해 주며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작은 마님?”

“서쪽 끝으로 가면 항구에 도스 공국에서 빌려준 배가 정착할 거야. 그걸 타려고.”

“와, 작은 마님쯤 되시니까 도망치는데 란치아 가문에, 도스 가문까지 돕는군요?”

“윈터 블루밍에게서 도망치려면 그 정도 도움은 필요할 것 같아.”

“그건 그래요.”

바이올렛은 결국은 제가 남편을 그리워하게 될 것을 알았다.

지금이야 윈터가 제게 임신에 관한 것을 숨겼다는 것과 폭언으로 미운 마음이 단단히 뭉쳐져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마저도 애증으로 남으리라.

다행인 것은 지난 3년의 결혼 생활 동안에도 남편이 곁에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란 사실이었다. 그가 없는 삶에 금방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

기차역까지 배웅을 한 젠이 몇 번이고 성화했다.

“전보 자주 보내 주셔야 해요?”

“응, 그럴게.”

바이올렛이 젠을 꼭 끌어안자 젠 역시 그녀를 마주 안았다.

인사를 마치고 젠이 먼저 역을 떠났다. 이제야 온전히 혼자 남은 바이올렛은 수도에 도착할 때 미리 사 둔 2등석 기차표를 손에 쥐고 플랫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길이 복잡하네.”

서쪽으로 가는 기차를 어디서 타는지 몰라 열심히 표지판을 살피며 걷고 있을 때였다.

내내 표지판만 보던 그녀의 몸이 누군가와 가볍게 충돌했다.

“어머, 미안해요.”

바이올렛이 서둘러 사과하는데 그녀의 팔이 붙잡혔다. 그녀가 팔을 빼려다가, 그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수와 담배 냄새에 동작을 멈췄다.

“……윈터?”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자, 윈터가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어디 가?”

그가 묻는 동시에 아내의 손에서 기차표를 빼앗았다. 서쪽으로 향하는 기차표를 확인한 윈터가 물었다.

“여긴 왜?”

“왜 여기 있어요?”

윈터는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그가 여기 와 있을 이유가 없으니 바이올렛은 당혹감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했다. 윈터가 표정이 지워진 얼굴로 대꾸했다.

“당신 기다려.”

“우린…… 내일 만나기로 했잖아요.”

“내일 아침에 길이 얼면 오가기 힘들까 봐.”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기차표를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제 시선을 피하는 바이올렛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당신이 대답해. 어디 가?”

“…….”

“서쪽은 왜? 누가 기다리나?”

약속 전날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바이올렛은 윈터가 내면부터 비틀려 자신만큼이나, 혹은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님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을 못 하니 팔목을 붙잡은 윈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답해, 바이올렛 블루밍.”

그의 사나운 목소리에 바이올렛의 몸이 흠칫 떨렸다. 윈터의 목소리는 불탄 뒤 남은 재처럼 매캐하고 허망했다. 바이올렛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충동적으로 끊었어요.”

“충동적? 충동적으로 대륙 끝을 가?”

“네. 정말 충동이었어요.”

바이올렛이 자그마한 제 클러치를 들어 보였다.

“봐요. 이거 하나 들고 가 봐야 뭘 얼마나 갔겠어요? 정말 충동적으로.”

확실히, 꽃 자수가 새겨진 클러치 하나 들고 도망을 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비틀어 버릴 것같이 굴던 윈터의 얼굴에 아주 조금 긴장이 가셨다.

“왜 그딴 충동이 생겨?”

“아직 좀…… 우울해서요.”

“큰일 날 짓 좀 하지 마. 놀랐잖아.”

이제야 좀 사람 같아진 윈터가 바이올렛의 하얀 손을 당겨 제 코트 주머니에 깍지 껴 넣었다.

“날도 추운데 옷 꼴은 그게 뭐야.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그러는 당신은 이 추운 역에서 밤을 새울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따듯하게 입었잖아.”

값비싼 검은색 롱 코트는 주머니 속 원단까지 보드랍고 따듯했다. 윈터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 늦었어.”

“그래요.”

바이올렛은 별다른 반항 없이 남편을 따라 걸었다.

충동적이었다는 바이올렛을 믿은 것 같긴 하지만, 윈터는 여전히 적군으로 둘러싸인 사람처럼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기차역을 나와 보니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뀌며 길이 얼기 시작했다. 마차로 수도 외곽의 저택까지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두 사람은 걸어서 가까운 윈터의 호텔로 향했다. 바이올렛이 자신을 납치하듯 끌고 가는 윈터의 어깨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 머리 좀 식히려고 그랬다는데도.”

“나에게 말도 없이, 충동적으로 서쪽 끝을 가서 머리를 식히겠다고?”

바이올렛은 윈터를 만난 후 처음, 그가 자신에게 힘으로 무언가를 강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그랬고, 목소리가 그랬다. 억지로 눌러 놓은 것처럼 분노가 터져 나오려 그를 흔들고 있었다.

“사람 미치게 만들려고 작정을 했군.”

윈터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며 눈빛이 전부, 인간성을 거치지 않은 날것이었다.

바이올렛은 그런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남편을 달랬다.

“내일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나처럼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 어딜 얼마나 갔겠어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에 윈터가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불유쾌한 눈으로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녀가 다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마 다음 역에서 내렸을 거예요. 멀리 가는 건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

“정말이에요. 한 번도 그래 본 적 없는걸요.”

바이올렛은 속이 타서 생전 안 하던 투정 섞인 목소리까지 내보였다.

윈터는 진심으로 밤을 새워서 바이올렛을 기다릴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마중을 위해 말끔한 정장을 입었고, 이 안 좋은 날씨를 비웃듯이 유명한 디자이너의 구두, 그리고 집 한 채 가격일 외투를 입고 머리까지 다듬은 상태였다.

아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슬슬 화가 풀리는지 윈터가 그제야 섭섭함을 드러내며 투덜거렸다.

“말없이 사라지지 마.”

“아무리 늦어도 약속 시간 전에는 돌아왔을 거예요. 세상에 약속 시간보다 하루를 일찍 나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딱히 할 일이 없었어.”

조금씩 대답도 해 주는 걸 보니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두 사람은 눈길을 걸어 곧 호텔에 들어섰다.

예정에 없던 대표 부부의 등장에 호텔의 모든 직원들이 달려 나와 인사했다.

두 사람은 언제나 윈터가 사용하는 방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은 윈터가 눈치채지 못하게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생각했는데, 윈터의 예상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변수가 생겼다.

다행히 들킬 때를 대비해서 윈터에게 먹여 재울 수면제를 가져오긴 했지만, 공연히 남편에게 약을 먹이고 싶지는 않았었다.

아무튼 밖이 추웠던지라 바이올렛은 벽난로 앞에 앉아 몸을 녹였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생각하는 사이, 직원 하나가 객실로 식사가 담긴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질이 좋고, 바이올렛이 가지고 나온 클러치보다도 큰 스테이크였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바이올렛이 놀라서 묻자 윈터가 대꾸했다.

“못 먹을 건 뭐지?”

그는 몸을 일으켜 뜨거운 접시 위에서 지글지글거리는 바이올렛의 스테이크를 썰었다.

라크라운드의 어떤 귀족도 윈터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식사 중에 일어나서 남의 스테이크를 썰어 준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굳었지만 윈터가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에 두 손을 모아 쥐고 접시와 그를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허리와 어깨를 구부리고 있는 게 불편해 보였고, 바이올렛의 손에 있을 때보다 식기도 작아 보였다.

윈터는 자신을 신기하게 올려다보는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치자 짜증스레 물었다.

“뭘 그렇게 봐. 하인이라고 생각해, 그냥.”

“고마워요.”

“그러시겠지.”

윈터가 자리로 돌아가고, 포크를 들었던 바이올렛이 멈칫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당신 건 내가…….”

그녀의 말에 윈터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그는 앉으라고 적당히 손짓한 후 제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 한입에 넣었다.

바이올렛은 제가 먹기에는 조금 크게 썰린 스테이크를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한참 동안 우물우물거리고 난 바이올렛이 웃었다.

“고기 질이 정말 좋네요.”

“수도 인근에 목장이 있잖아. 목장식 식사야.”

“그래서 이렇게 크군요. 신기해라…….”

어쩐지 식사에서는 싱싱한 맛이 났다.

크다고 말해 놓고, 바이올렛은 먹성 좋게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윈터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를 할 때, 나는 당신이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식성이 정반대라서요?”

“아니.”

윈터는 이미 고기에 질렸는지, 식욕이 그다지 돌지 않는지 고기를 작게, 작게 계속 잘라 대며 말을 이었다.

“난 누가 나에게 먹을 걸 주면 잘해 주고 있다고 느껴.”

“잘해 주고 있는 게 맞지 않나요?”

“거기까지밖에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는 의미야.”

그것은 윈터가 바이올렛을 알고 나서 3년이 지난 후, 최근에 와서야 이해하게 된 개념이었다.

그에게 ‘잘해 준다’는 개념은 배를 채워 주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다. 재워 주고 먹여 주고 두들겨 패지만 않으면 날 아껴 주는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아니었다. 그녀는 맛있는 음식들을 즐겼고 보이는 것에 비해서는 대식가였지만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을 사랑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었다.

그녀가 더 많은 좋은 것들을 상상할 때, 제 상상은 배를 채우는 일에 멈춰 있다는 것.

그래서 제가 주는 애정도 여기서 멈춰 있다는 걸, 그녀가 언젠가는 이해해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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