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수도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길은 흙탕물로 엉망진창이었는데, 밤이 깊어지면 길이 얼어붙어 마차가 다니기 어려워질 듯했다.
윈터는 하옐을 대동하고 대저택의 포치에 서 있었다. 이곳은 윈터 부부가 새로 이사할 곳으로, 입구부터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큰돈을 들인 전등이 저택 곳곳에 달려 있었다.
전등을 켜는 가격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산다 하는 귀족들도 응접실이나 서재 정도나 보여 주기용으로 달 수 있었다.
이렇게 포치에까지 전등을 달 정도의 부를 가진 사람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았다. 비바람에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는 포치의 전등에는 북부의 장인들이 만든 예술적인 유리 갓이 덮여 있었다.
아래 서 있는 사람마저 불안정해 보이게 만드는 불빛이었다. 윈터가 질척거리는 땅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아내가 오는 첫날부터 진창이겠군.”
하옐은 비가 날아들어 앞이 잘 보이지 않게 된 동그란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꽂다가 울컥 화가 났는지 쌓아 두었던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조치를 취할 테니까요, 대표님은 일 좀 하세요.”
“바빠.”
바이올렛이 입을 다문 두 달 내내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윈터가 큼직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바탕으로 살을 붙여 가던 회사는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하옐이 우는소리를 했다.
“여기서 그러고 계시면서 바쁘다니요? 대표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돈 되는 서류 읽기 아닙니까. 그 서류가 지금 집무실에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업무가 완전히 마비됐다고요!”
“인재가 없군.”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만 있으면 대표님께 납치당해서 영혼과 뼈가 갈려 만들어진 게 우리 회사입니다.”
“제 발로 왔는데 왜 납치야.”
“이렇게까지 일을 시킬 줄 알았으면 안 왔죠.”
“그럼 나가.”
“이렇게까지 돈을 주실 줄 몰랐죠. 씀씀이가 커져서 다른 회사 못 갑니다.”
하옐의 억울한 목소리에 윈터가 픽 웃었다.
아내가 이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녀는 아직 돈이 가진 아찔한 맛을 모른다. 저 문을 통과하게 되면, 제가 서 있는 이 거대한 저택을 보게 되면 알 것이다. 돈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윈터가 회사의 로고가 수놓인 우산을 펼치며 말했다.
“테스트 한 번 더 하지.”
“이번에 정말 마지막입니다? 테스트 한 번 할 때마다 웬만한 수도 사람 월급이 빠져나간단 말입니다.”
“어.”
윈터가 진흙탕이 뒤덮인 디딤돌 위를 걸어 저택에서 멀어졌다.
잠시 후 하옐이 작은 나무 문 안에 손을 넣어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내 어둡던 건물 전체가 깜빡거렸다.
잠시 후 건물 사방에 달린 전등에 전부 불이 들어왔다. 수도 외곽 대저택의 불빛은 아주 먼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강렬하며, 유일했다.
저택뿐이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무도회장으로 쓸 단층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도 이런 환한 조명이 가득했다. 사교계 모든 명사가 그곳에 초대받기를 원할 것이고, 바이올렛은 아무 노력 없이도 사교계를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윈터는 다시 포치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옐이 그와 같은 방향인 밖을 보고 서서 넌지시 물었다.
“마님께서는 내일 오후에나 오실 텐데 여기서 뭐 하세요?”
“아내 기다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열다섯 시간 뒤에 도착하시거든요?”
바쁘다고 해 놓고 열다섯 시간 뒤에 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니 일정을 관리해야 하는 비서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하옐이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윈터는 팔걸이에 두 손을 얹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불안정한 상태의 아내가 걱정스러워, 욕심으로는 종일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임신 소동 이후 바이올렛은 남편을 껄끄러워했고, 그가 근처에 있으면 시종일관 불안한 표정을 지어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다.
바이올렛의 방은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2층 동쪽 끝 방으로 정했다. 발코니에서 바로 나갈 수 있게 옥외 계단도 설치했다.
지금은 겨울이라 아무것도 없지만 봄이면 아내가 좋아하는 꽃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저택에 들어오는 벌레를 퇴치하는 일에 열을 올려야 할 테지.
윈터는 정원을 보며 기뻐하는 아내를 상상해 보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선명한 상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계속 이곳이 겨울일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내내 그랬다. 견디다 못한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옐이 물었다.
“들어가시게요?”
“밤새 길이 얼면 내일 마차가 못 다닐지도 모르잖아. 기차역에 가 있는 게 낫겠어.”
그가 말을 마친 뒤 우산을 쓴 채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하옐은 체념한 듯 한숨만 푹 쉬었다.
*
바이올렛은 윈터에게 말한 것보다 하루 일찍 수도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 오전, 그녀는 수도 중앙은행에서 란치아 가문이 보낸 어마어마한 거금을 확인하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세상에.”
윈터가 사들인 막대한 양의 선물 더미를 팔자 바이올렛이 예상한 것의 열 배 넘는 돈이 나왔다.
란치아 가문은 대륙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동쪽 라크라운드에는 이렇다 할 인맥이 없었다. 그러니 좋은 물건 고르는 것이 취미이자 재능인 윈터가 사들인 물건 중에는 란치아가 돈을 싸 들고 와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아들을 구해 준 대가이기도 하지만, 란치아 가문에게도 이득이 되는 장사였다.
흥정도, 수수료도 없이 호의 가득한 거상에게 물건을 비싸게 팔아 치웠으니 그것만으로도 크게 남는 장사였다.
이 정도 금액이면 남편도 충분히 만족하리라,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왕실 재산으로 넘어가 있는 롱 리우드 땅을 되찾는 일이었다.
바이올렛이 은행장실에 들어서자 먼저 와 의자에 앉아 있던 에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혀를 찼다.
은행장 비서가 의자를 당겨 주자 바이올렛도 자리에 앉았다.
중요한 손님이었기에 비서가 있음에도 은행장이 직접 쟁반에 차 두 잔을 가져왔다. 은행장이 잔을 내려놓는 사이,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미리 연락한 대로입니다, 은행장. 왕실 재산으로 되어 있던 롱 리우드 땅을 다시 내 사유 재산으로 돌리고 싶어요.”
“바로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만, 부인.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원래부터 내 땅인 것을 되찾는데 왜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까? 은행장께서 에쉬와 공모해 멋대로 돌려놓은 것 아닙니까?”
바이올렛이 서늘히 말했으나 에쉬 로렌스를 배경으로 둔 은행장은 여전히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한번 왕실 재산이 된 것을 사유 재산으로 바꾸시면 국민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지난 3년간 왕실 재산이 차기 왕이 되었어야 할 에쉬의 사유 재산처럼 사용됐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은 왕실 재산을 왕실 전체의 품위 유지비로 생각했다. 또한 왕실의 품위 유지를 국격과 동일시했다. 왕실이 해체된 지금도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런 왕실 재산을 사유 재산으로 옮긴다는 것은 언론 플레이에 따라서 개인 욕심을 채우려 드는 것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은행장은 제가 에쉬의 편을 들겠다는 말을 에둘러 하는 중이었다.
“혼전 계약서에는 그 땅을 내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을 것 아닙니까? 공개하세요, 당장.”
바이올렛의 명령에 에쉬가 대신 대꾸했다.
“혼전 계약서의 비밀을 유지하지 않으면 너희 결혼은 무효야.”
“비밀 유지?”
“경께서 어지간히 이혼하기 싫으신 게지. 결혼이 무효화되는 게 싫어서 혼전 계약서를 공개하지 않은 거다. 그러니 남편이 그쯤 애정을 보이면 닥치고 살아. 로렌스 가문에서 어떻게 너처럼 염치없는 게 태어났는지 모르겠구나.”
바이올렛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안 그래도 윈터가 왜 그 땅에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건지 궁금했었다. 비밀 유지 조항 때문이었음을 알고 나니 순간, 에쉬에 대한 분노가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번 윈터의 재산을 이용한 것도 모자라서 여전히 결혼을 빌미로 빌붙고 있다는 것이, 로렌스 가문의 사람으로서 용서가 되지 않았다. 로렌스 가문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을 잃어도 고고할 것을 교육받아 왔다. 적군에게 목이 베이는 순간에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던 조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녀는 그동안 어머니가 말했듯이 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에쉬 로렌스가 가문의 수치임을 깨달았다.
남편과 달리 침착한 성격의 바이올렛이 찬찬히 해결 방법을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지참금으로 하지.”
“뭐?”
“내가 결혼할 때 로렌스 가문은 남편에게서 받기만 했잖아. 그러니 지참금 명목으로 나에게 땅을 돌려줘.”
“뭐? 결혼한 지 3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무슨 지참금 타령이야?”
“3년 전에 못 받았으니 지금 이야기하는 거지. 로렌스 가문의 여자들이 지참금을 받는 건 가문의 법이야. 소송을 걸면 내가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
“바이올렛!”
“소송까지 가서 기껏 만든 좋은 이미지 망치지 말고 우리 둘 다 보기 좋게 끝내자.”
에쉬가 분에 차서 죽일 듯이 바이올렛을 노려보았다. 겁을 줄 심산이었으나 마주 보는 바이올렛의 눈빛은 잿빛으로 느껴질 정도로 무심했고, 조금의 염려도 드러나지 않았다.
지난 3년 내내 풀 죽어 있어 에쉬조차도 그게 바이올렛의 원래 성격이었던 게라고 차치해 버렸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바이올렛은 본래부터 유약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에쉬는 기가 찼지만 대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질 않았다. 처음엔 사실, 돈을 빼돌리는 것이 밝혀지면 곧장 돌려주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3년이나 지속되자 이제는 제 것을 뺏기는 기분이 들었다.
“천한 놈과 살더니 너도 똑같아졌군.”
에쉬가 내뱉듯 말했다. 속이 뒤집어질 정도로 쓰렸으나, 여기서 포기해야 했다. 지참금을 명목으로 소송을 걸면 결국 에쉬가 질 것이고, 그 소송으로 제 이미지까지 나빠질 것이 뻔했다.
바이올렛은 아무것도 없이 자존심만 센 에쉬를 너무 뒤집어 놨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지금까지 가져간 돈은 안 돌려줘도 돼.”
“그건 칼슨 놈이 쓴 거라니까.”
“알았어. 그런 줄 알고 있을게. 땅만 돌려줘.”
에쉬는 롱 리우드 땅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으나 바이올렛의 말대로 서로 보기 좋을 때 넘기는 게 나았다. 윈터가 언제 무슨 짓을 해서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걸 조마조마하게 견디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 봤자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니, 바이올렛의 재산인 땅을 팔아 오빠를 도와주자고 졸라 대면 못 견디고 제 손으로 넘어올 것이었다. 바이올렛은 여느 딸들처럼, 어머니가 제 오빠를 편애하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를 미워하지 못했다.
결국 에쉬는 그 자리에서 지참금 명목으로 바이올렛에게 땅문서를 돌려주었다. 서류가 다 마무리되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 바이올렛이 입매를 살며시 끌어 올렸다.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 바이올렛 덕에 제가 이 싸움에 피해를 볼까 봐 초조하게 있던 은행장 역시 무사히 끝난 것을 알고 안도했다.
은행장은 아주 어릴 때부터 바이올렛을 봐 왔다. 바이올렛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은행에 제 금고를 만들던 날의 기사 사진 한편에도 그의 모습이 있었다.
바이올렛은 유약한 성격이 아니었으나 단추 하나 잠그는 것도 어려워할 정도로 생활 감각이 없었다. 왕녀로서 배우지 않은 재주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바이올렛은 은행장이 알던 그 여린 공주님이 아니었다.
은행장이 아까에 비해 비굴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그럼 이걸로 두 분 사이의 문제는 해결되신 겁니까?”
“그런 것 같군요.”
남은 땅문서를 전부 손에 넣은 바이올렛이 오만하게 에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이런 수모를 겪을 걸 알았더라도, 나는 왕실을 해체하는 오빠의 생각에 동의하겠어.”
“뭐?”
“내 남편에게 천하다고 했지? 사람에게 천하다고 말하면 안 돼. 나와 같은 교육을 받았을 텐데 왜 모르는 거지?”
“…….”
“그런 사람이 왕이 될 뻔했다니. 라크라운드의 명운이 끊길 뻔했군.”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