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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6화 (36/176)

36화

“다른 남자…… 만난 적 없어요.”

“…….”

전혀 예상 못 한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해명할 방법이 없네요. 이제 당신은 화가 나서 나를 만나 주지 않을 텐데, 어쩌나…….”

윈터는 지축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이마를 꽉 눌렀다. 머릿속이 다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하루를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안 하고 애를 태우더니, 겨우 입을 열어 하는 말이 이것이다.

“어디 안 가. 3년 전에도 당신한테 화난 게 아니라 내 상황이 그랬잖아. 지금은 믿어. 다른 남자 만나지 않은 거 알아.”

윈터가 말했지만, 바이올렛은 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녀가 중얼거렸다.

“당신을 닮은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스르륵 다시 침대에 누웠다. 윈터가 해명하듯이 말했다.

“꼬인 거야. 어딘가 잘못된 거라고. 오해할 만했잖아. 상황이…….”

상황이 그랬잖아.

윈터는 그 말을 반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난 3년 동안에도 똑같은 이유를 대며 아내를 외면했다. 당신 오빠가 내 전 재산을 날렸잖아, 그걸 복구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뭐가 있어, 당신이 감히 나에게 어떻게 바라는 게 있어, 당신이 어떻게 나를 떠나, 어떻게 내 말을 거절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그러니까. 오해할 만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폭언을 내뱉었다고 그녀에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내 아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돈도 없고, 신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망할 자존심에 험한 말로 그녀를 붙잡아 끌어내리려 들었던 것도 다 상황 때문이었다고.

상황 탓으로 돌리기엔 제 감정을 보호하려 그녀의 심장을 할퀴어 낸 상처가 너무 깊었다.

*

그로부터도 긴 시간 넋이 나가 있던 그녀를 깨운 것은 의외로 서서히 차가워지는 겨울바람이었다. 차가운 물을 끼얹어 잠에서 깨는 것처럼, 물리적인 차가움이 뺨에 닿자 정신이 돌아왔다.

첫눈이 내리던 날 이른 새벽,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금고에 넣어 두었던 편지 한 통을 꺼냈다.

그녀가 칸투스 수도원에서 목숨을 구한 어린 수도사의 부모, 란치아 부부로부터 온 편지였다.

저희 부부의 아들, 레예스의 생명을 구해 주셨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장남이 몸져누웠는데 차남마저 세상을 떠났다면 저희 부부는 실성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부디 무엇이든 바라십시오.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바이올렛은 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후, 서랍장에서 블루밍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테이블에 두었다.

그녀는 왕족들만이 사용하는 특유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서체로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그사이 아침이 밝아 그녀를 깨우러 왔던 하녀 하나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작은 마님, 일어나셨어요?”

“좋은 아침이구나.”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다정한 인사에 하녀가 반색하며 물었다.

“이제 기운이 좀 나세요?”

“응, 그만 일어나야지. 미안하지만 이 편지 좀 보내 주겠니?”

“그럼요!”

하녀가 편지를 받아 들고 달려 나갔다.

바이올렛이 찬찬히 제 방을 둘러보았다. 진귀한 물건이 사방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내를 달랠 방법을 모르는 윈터는 도처에 보이는 사치품이란 사치품은 전부 사들이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에메랄드며 사막에서만 핀다는 터무니없이 희귀한 꽃,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대륙에서 건너온, 쓸모라곤 없고 신기하기만 한 마도구와 섬세하게 만든 인형들.

그사이 아내가 기운을 차린 것 같다는 전달을 들은 윈터가 곧장 침실로 들어섰다.

창가 의자에 앉은 바이올렛이 물었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이전처럼 평온하게 건네는 물음에 윈터가 안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그는 침대에 풀썩 앉아 한 손으로 바이올렛이 앉은 의자를 끌어다 제 옆에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유심히 바이올렛의 얼굴을 살피자 그녀가 물었다.

“식사는 했어요?”

“난 언제나 당신보다 먼저 일어나서 먹어.”

그가 핀잔하듯 대꾸하더니 침대 아래 놓인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를 열자 진한 크림 형태의 화장품이 있었다.

“입술에 바르는 거지?”

“맞아요.”

“몸이 바뀌었을 때 써 봤어.”

윈터가 같이 들어 있는 붓으로 슥슥 크림을 훑더니 바이올렛에게 고개를 조금 들라는 듯 제가 고개를 들어 보였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자 윈터가 붓으로 입술에 크림을 바르며 말했다.

“입술에 상처가 났잖아.”

“겨울엔 원래 그래요.”

“난 안 그래.”

“피부가 튼튼하네요.”

크림을 바르고 나니 마르고 갈라져 있던 입술에서 윤기가 흘렀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당신도 발라요.”

“사내놈 입술이 반짝거리면 재수 없어.”

그가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듯이 질색하자 바이올렛이 검지로 제 입술을 쓸더니 크림이 묻은 손으로 윈터의 입술을 문질러 놓곤 손을 떼며 말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그녀다운 말과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윈터가 쯧 혀를 찼다.

저 예쁜 건 알아 가지고.

두 달 내내 제 속을 완전히 망가뜨리더니,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그를 치유한다.

윈터가 무심코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만 누워 있고 일어나. 더 추워지기 전에 수도로 가자.”

“짐이 너무 많아져서요. 챙기려면 오래 걸리겠어요.”

“필요 없는 것들은 그냥 버려.”

바이올렛 이상으로, 윈터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이올렛의 방은 그녀가 슬픔에 빠져 있는 사이 더 채울 수 없을 정도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고, 아직 뜯어 보지도 않은 물건들이 방 밖에도 수북했다. 아무리 사들여도 그의 재력에 큰 변동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건을 사들이며 윈터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애정을 보이면 그녀는 곧 괜찮아질 것이다. 결국 웃어 버릴 것이고, 결국 행복해할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그런 단단한 믿음이 있었다.

그가 다른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든 바이올렛의 허리까지 오는 크기의 마리오네트를 꺼냈다.

“특히 이런 것들. 이건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들인 건지 모르겠군.”

“이런 인형은 인형극에서만 쓰는 줄 알았어요.”

“인형극에서만 쓰지.”

윈터가 정장 차림의 신사 인형 하나를 꺼내 양손으로 능숙하게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게 움직였다.

“참 얼굴 뵙기 어렵습니다, 부인?”

그의 능청에 바이올렛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이렇게 잘해요?”

“난 원래 다 잘해.”

그의 뻔뻔함에 바이올렛이 모처럼 조금 웃었다.

그러더니 상체를 숙여 인형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오랜만이네요, 신사분.”

그녀가 인사를 받아 줘서인지, 아니면 웃어서인지. 대번에 풀어진 윈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가 풀썩 뒤로 드러누워 버리며 말했다.

“아, 될 수 있는 한 빨리 수도로 가자.”

“그럴게요.”

그녀의 대답에 한동안 수천 개의 바늘이 꽂혀 있는 것만 같던 윈터의 가슴이 편안해졌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 집을 좋아하게 될 거야.”

잠시 눈을 감은 그가 순진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제가 선택한 많은 것들이 틀렸지만 이번만큼은 확신했다.

수도에 가면 그녀는 분명 행복해질 것이다.

아내가 행복해진다면 그제야, 저도 행복해지리라.

*

바이올렛의 주치의였던 베릴은 편지 한 장을 들고 라크라운드 수도 항구의 우체국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편지 안에는 제가 그녀에게 조제해 준 약에 블루밍 공작 부부가 준, 임신과 같은 증상을 유발하는 약이 섞여 있었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배편으로 보내 주시오.”

베릴의 말에 우체국 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크라운드는 전신 연락망이 워낙 잘 되어 있어 연락이 수월했다. 보통 배편에 보내는 것은 다른 대륙으로 보낼 물건들이었는데, 전신으로도 보낼 수 있는 편지 한 장을 달랑 내미니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한 장 보내신다고요?”

“그렇소.”

“이거 한 장이면 전신 연락으로…… 애초에 어디로 보내시는 겁니까?”

“라크라운드 남부로 부탁하오.”

“네, 네에? 라크라운드로 배가 다시 돌아오려면 1년이 걸립니다. 500라운드면 한 시간 만에 보낼 연락을 그 200배를 내고 1년을 걸려 보내다니요?”

“이유가 있소.”

베릴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에게 해가 될 거라면서 바이올렛은 더 이상 임신과 같은 증상을 유발하는 약을 먹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것이다.

입을 다물고 살려고 했다. 애초에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러나 했다.

그래도 자식이 있다는 제 말에 아이 이름이며 나이며 기억해 두고,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가 생기면 챙겨 두었다가 건네주던 작은 마님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을 테였다.

베릴은 염치없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가족과 함께 라크라운드를 떠나는 기차를 탔다.

*

저택이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올해 들어 윈터가 사다 놓은 게 너무 많아서 바이올렛의 짐만 해도 짐마차 세 대가 필요했다.

저택의 모든 하인들을 동원해 마차에 짐을 전부 싣고 나니, 마부가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그럼 수도의 귀댁까지 안전하게 운반하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짐이 잘 실려 있나 확인한 젠이 어쩐지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그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마차가 출발하자 젠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차 안에…… 귀족 가문 문장이 있었어요.”

“젠은 정말 관찰력이 좋구나.”

“저거 사설 마차 아니죠, 작은 마님?”

젠이 따지듯이 묻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비밀로 해 주렴.”

“작은 마님 소지품은 전부 저기 들어 있단 말입니다! 도대체 어디로 보내시는 거예요!”

“대륙 서쪽, 란치아 가문으로. 내 물건들을 전부 좋은 값에 사 주기로 했단다. 해상 무역을 하는 가문이니 물건 처분은 어렵지 않을 테지. 그리고 수도 저택에는 빈 짐 상자만 가져다 놔 주기로 했어.”

“그래서…… 우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수도의 짐을 풀지 말라고 하셨군요?”

젠은 이제야 이유를 알았다는 듯이 말하고,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바이올렛은 후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지 못한다면 살아야지. 살려면 움직여야지. 나는 살기 위해 이곳을 떠나기로 했단다. 남편에겐 미안한 일만 많았으니, 지금이라도 그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돌려주려고 해.”

“돈이요?”

“그래. 남편은 나와의 결혼을 흑자로 돌릴 자신이 있어서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더구나. 내 발로 사라져 주면 그런 가망 없는 계획은 포기하겠지.”

바이올렛은 여전히, 제가 기적적으로 윈터와의 아이를 가지게 될지 모른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또다시 남편에게 제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하나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여력도 남지 않았다.

그리고 돈으로 얽힌 악연인 제가 떠나야만 남편도 그가 진심으로 사랑할 연인을 찾을 기회를 얻으리라.

“진짜 작은 마님께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이에요?”

젠이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이 당장이라도 찾아가 따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남편을 떠나는 대신, 일생 아끼며, 버는 돈을 전부 그이에게 보내려고. 내가 주고 싶었던 만큼 큰돈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작은 것들이 내가 남편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일 테지.”

그녀는 최근까지도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다 꿈꾸었다. 그녀에게 현재에도 과거에도 밉고, 동시에 가엽고, 그래서 가장 애틋한 이는 윈터 블루밍이었다.

그래서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가 행복해지면, 저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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