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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5화 (35/176)
  • 35화

    윈터가 수도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캐서린 블루밍이 보낸 하녀가 바이올렛에게 작은 상자에 담긴 선물을 가져왔다.

    “마님께서 사과의 의미로 보내신 선물입니다.”

    바이올렛이 상자를 받아 들며 파리한 입술로 인사했다.

    “감사하다고 전해 드리게.”

    “예, 작은 마님.”

    공작저의 하녀가 떠나자 바이올렛이 힘겨워하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월경통이 유난히 심한 달과 증세가 비슷했다. 경험이 없으니 원래 임신이 이런 것이려니 했다.

    선물 상자를 대신 받아 든 젠이 잔소리하듯 말했다.

    “그러니까 약 드시라니까요. 임신 후에 복용해도 문제가 없는 약이라고 하던데도 안 드시고.”

    “그렇게 아프지도 않아.”

    “얼굴이 새하야신데요, 뭐.”

    젠이 삐죽거리며 상자를 꺼내 열자 그 안에 작은 신발이 있었다. 젠이 안전한 걸 확인하고 바이올렛에게 가져다주자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세상에. 예뻐라…….”

    혼을 내러 왔던 블루밍 가주 부부가 되레 윈터에게 한 소리 듣고 돌아갔으니 화풀이라도 하는 건가 했다. 그런데 의외로 상자 안에는 말짱한 아기 신발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실크로 만들어진 외관에 안이 폭신한 것으로 채워져 있는 아주 좋은 구두였다. 바이올렛이 상자를 무릎에 두고 감탄했다.

    “아기 신발은 정말로 작구나.”

    “그래도 작은 주인님 닮았으면 우량아일걸요? 작은 마님 닮았으면 모르지만.”

    “나도 태어날 땐 큰 편이었다더구나.”

    바이올렛은 대답하면서도 시선을 구두에서 떼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저택은 아기를 키우기엔 너무 위험한 것이 많았다. 장식품이 지천이고 물건마다 뾰족한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알리고, 충격받고 하는 통에 뭐 하나 아이를 위해 준비해 준 것이 없다는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생각을 마친 바이올렛이 억지로 일어나려 들자 젠이 달려왔다.

    “어휴, 왜 일어나세요? 허리 아프시다면서.”

    “그래도 아이가 태어나면 방 마련은 해 줘야 하지 않겠니. 너무 누워만 있었네.”

    “이제 겨우 두 달째인데 뭘 벌써부터 챙기려고 그러세요?”

    “그래도 일단은…… 시간도 보낼 겸.”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바이올렛이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오히려 너무 누워 있어서 아픈 건가, 싶었다. 좀 걷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통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을 때, 바이올렛이 제 방에서 조금 떨어진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이 방이 참 좋더구나.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부터 여기가 제일 좋았어.”

    바이올렛이 3년 전 처음 이 저택에 오던 날을 떠올리며 방을 둘러보자 젠이 말했다.

    “작은 마님 방은 너무 작고 외졌잖아요. 지금이라도 여기로 옮기시는 건 어때요?”

    “이제 익숙해져서 옮기면 그것도 나름으로 낯설 것 같구나.”

    바이올렛이 해가 유난히 잘 드는 넓은 방을 천천히 거닐며 말을 이었다.

    “남편이 제 아이가 아니라고 우기고는 있지만 키울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방을 내 달라고 하면 내줄 테지.”

    그럼 매일같이 이 방에서 아이 얼굴을 보며 지낼 것이다.

    제가 이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든 방을 아이에게 준다면 제가 여기 사는 것보다 행복하리라.

    그러자 옆에서 젠이 구시렁거렸다.

    “방을 내준다고 하니까 꼭 작은 마님이 손님 같잖아요.”

    “아…… 남편과 합의를 해서 결정하마.”

    “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좋겠어요!”

    젠의 대답에 바이올렛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는 이 방에 선 후에야 제 벌이 끝나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제 아이에게만 집중하느라 그간 있었던 일들이 전부 잊혔다.

    바이올렛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쪽에 요람을 놓고…… 벽은 알록달록하게…… 아, 무지개 같은 걸 그려 주면 좋을 것 같구나. 너무 유치한 생각인가?”

    바이올렛이 진심으로 행복해하며 묻자 젠도 덩달아 들떠서 자기도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작은 주인님이 이 방 못 쓰게 한다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면 작은 마님이랑 같이 시위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통증이 밀려왔는지 바이올렛이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 작은 마님!”

    젠이 달려가 부축하자 바이올렛이 가쁘게 숨을 쉬며 말했다.

    “이상하게…… 달거리가 시작된 것 같은 기분이네.”

    “예, 예에? 그럴 리가요……. 하, 하혈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그럼 위험한 건가?”

    “자, 잠시만요! 금방 의사 불러올게요!”

    젠이 바이올렛을 손님 침대에 눕혀 놓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잠시 후, 원래 있던 남자 의사인 베릴이 그만둔 뒤 새로 온 출산을 전문으로 하는 여자 의사가 달려왔다.

    진료를 하는 내내 바이올렛은 끊임없이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했다.

    아이에게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할 텐데. 혹시 내가 멋도 모르고 독한 걸 들이켜서 잘못되는 거 아닌가 후회하느라 아픈 것도 잊혔다.

    잠시 후, 진료를 마친 의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저어, 작은 마님…….”

    “별일 없지?”

    그러자 의사가 바이올렛의 간절한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달거리가 맞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바이올렛이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자 의사가 안타까움에 바닥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임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그…… 상상으로 임신과 똑같은 증세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마 작은 마님께서 임신이 너무 간절하셔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앞서 진찰했던 의사처럼 전공이 아니라 임산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에 오진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증상이…… 너무 똑같아서요.”

    “…….”

    의사는 그 이후에도 말을 이었지만 바이올렛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원래도 가진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많았다.

    언젠가 윈터를 설득해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조금씩 그와의 관계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 자신에 대한 원망이 언젠가는 해소될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제가 어릴 때 꾸었던 꿈처럼 소박하고 종종 웃음이 나는 그런 가족을 자신도 얻게 되리라.

    기적이라 믿었던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자 죽음의 안식조차 얻지 못하는 현실로, 그녀는 되돌아왔다.

    *

    수도와 남부의 거리가 멀다 보니 아무리 급하게 와도 시간이 걸렸다.

    윈터가 집에 도착한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잠든 바이올렛을 깨워서라도 제가 그동안 사들였던 드레스며 보석들을 들이밀 생각이었다.

    그거라도 보여야 했다. 그래야 바이올렛이 제가 그녀를 아내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줄 것이다.

    아이는 그럼 그냥, 제 아이라고 믿기로 했다. 증거도 없는데 계속 아내를 잡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지며 묘한 안도감마저 드는 것이 아닌가.

    제 결정을 빨리 말해 주려 서둘러 저택에 들어선 윈터가 표정을 구겼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저택 사람들이 전부 깨어 있었다. 윈터는 극도로 침울한 분위기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불길함에 멈춰 선 그에게로 눈물범벅이 된 플립이 달려왔다.

    “오,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야? 분위기가 왜 이래?”

    그러자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인 플립이 가까스로 말했다.

    “작은 마님께서 임신이 아니셨답니다.”

    “뭐?”

    윈터가 당장 죽일 듯이 표정을 구기자 플립이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겨우 말을 이었다.

    “작은 마님께서 아이가 너무 간절하셔서 증상만 나타났지, 임신이 아니셨답니다. 어제부터 죽은 사람처럼 꼼짝도 안 하십니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알아듣질 못하겠네.”

    윈터가 그를 밀치고 서둘러 바이올렛의 침실로 향했다.

    바이올렛의 침실에 들어가 보니 아내는 창가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녀 몇이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하려고 제가 아는 모든 좋은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윈터를 발견한 하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방을 나간 후 침실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임신이 아니었다니.

    윈터가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는 바이올렛을 살폈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서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소란을 등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윈터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허리를 숙이고 양쪽 손잡이를 잡은 윈터가 달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부터 계속 이러고 있다며.”

    “…….”

    “잠이라도 좀 자.”

    “…….”

    “바이올렛.”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윈터는 그녀를 재우려면 우선 눕혀야겠다고 생각하며 바이올렛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그녀는 별달리 반항을 하지 않았지만 침대에 눕힌 후에도 창문 쪽으로 모로 누워 가만히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말없이 앉아 있던 윈터가 운을 떼었다.

    “정 잠이 안 오면 수면제라도 먹어.”

    윈터가 여전히 바이올렛을 붙잡은 상태로 밖을 향해 소리쳤다.

    “수면제 좀 가져와!”

    그러자 밖에서 하녀 하나가 살짝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벼, 벽장 안에 항상 있습니다, 수면제.”

    “그럼 물이라도 가져와!”

    “네, 네!”

    하녀가 겁먹어 대답하고 도망쳤다. 윈터가 벽장을 열어 보니 수면제가 있었다.

    ‘항상’이라니. 윈터가 약병을 들고 서서 그녀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무슨 약을 이렇게 노상 먹어? 뭐 몸에 좋다고. 잠이 와서 자야지, 약을 먹고 자면 되겠어? 안 되겠다. 내일부터 내가 데리고 다니면서 산책이라도 시켜야겠어. 좀 걷고 그러면 약 안 먹어도 잠이 올 거야. 기분도 나아질 거고.”

    무슨 말을 해도 바이올렛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윈터는 연신 말을 이었다. 그리 대단히 말이 많지도 않은 그가 계속 주절거리다 보니 곧 할 말이 떨어졌다.

    곧 하녀가 물병과 잔을 가져오자 윈터가 물었다.

    “뭐 좀 먹였어?”

    “하루 종일 물도 안 드세요…….”

    “아, 젠장.”

    윈터가 물을 채운 잔을 협탁에 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실 불을 꺼도 이미 해가 뜨고 있는 데다 커튼이 열려 있어 방 안이 밝았다. 윈터가 한 손으로 바이올렛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물이라도 좀 마셔. 탈수되겠어.”

    “…….”

    “좀 자고 바로 수도로 출발하자.”

    “…….”

    “수도에 마련한 집 있잖아. 난 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도 그 집은 괜찮더군. 정원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당신 수도도, 꽃도 좋아하잖아. 가면 좋을 거야. 좋아하게 될 거야.”

    살았는지도 확신이 안 설 만큼 꼼짝을 않자 떨리는 숨을 내쉰 윈터가 조금 언성을 높였다.

    “차라리 울기라도 해. 최소한 달랠 수나 있게. 아니면 날 때리거나 화를 내. 얼마든지 맞아 줄 테니까.”

    “…….”

    그의 말에 한참을 누워 있던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윈터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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