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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4화 (34/176)
  • 34화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 칼슨 로우 그 자식 이름이 적혀 있다는 건 당신도 당연히 알 것 아냐.”

    “그렇지 않아요.”

    “하옐이 확인했어. 무작정 우기려 들지 마.”

    “정말이에요. 문서를 보여 줄게요.”

    바이올렛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 비틀거렸다. 윈터가 팔을 잡아 부축했으나 뿌리치고, 벽장 안에 들어 있는 금고를 열었다.

    안에는 몇 가지 서류가 들어 있었고, 그중 하나가 롱 리우드의 땅문서였다.

    바이올렛이 문서를 내밀었다.

    “여기요. 적혀 있는 건 내 이름뿐이에요.”

    “이거 말고. 나머지 4,500카타샨의 땅.”

    “그건 왕실 재산이니 제가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럼 누가…….”

    언성이 높아지던 윈터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당신 오빠에게 500카타샨의 땅만 받았어? 처음부터?”

    “네.”

    “5,000카타샨 전부 당신이 팔든 소작료를 받든 해서 드레스니 파티니 하는 데 쓰라고 준 거였어.”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뱉는 말에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윈터가 이내 추궁하듯이 물었다.

    “어떻게 당신 허락도 없이 당신 사유 재산을 왕실 재산으로 돌려? 말이 안 되잖아.”

    “……에쉬는 고위 관료들과 폴로를 즐기고, 그 모임에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수도 중앙은행의 은행장도 끼어 있어요.”

    “젠장!”

    윈터는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그에게 아내가 설명하는 상류 사회는 종종 너무도 비현실적이라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윈터가 연달아 거친 욕설을 퍼붓자 바이올렛이 손으로 제 귀를 감쌌다. 아이에게 제 아버지가 저렇게 입이 험한 사람이란 걸 알려 줄 수 없었다.

    그녀의 행동에 제 입을 손으로 틀어막듯 감쌌다가 놓은 윈터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당신 같은 공주님이 겨우 그걸로 어떻게 품위 유지를 해? 이상하지도 않아? 고작 그만큼으로 어떻게 하란 거냐고 진작 따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상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만큼 신경 써 준 게 고마웠어요. 그리고…… 이상하게 여겼던들 물어볼 시간이나 있었나요?”

    바이올렛이 말하다가 울 것 같아 입을 다물고 두 손으로 가슴 사이를 꼭 눌렀다. 요즘 들어 감정이 쉽게 격해진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제가 중앙은행에 가서 확인해야겠어요.”

    “임신 초기에 저렇게 흔들리는 마차를 어떻게 타. 내가 다녀올 테니 집에 있어.”

    “마차 잠깐 탄다고 큰일 안 나요.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내 일이잖아요.”

    바이올렛이 단호하게 말한 뒤 문으로 향하자 윈터가 몸으로 문을 막아 세웠다.

    “기차도 일곱 시간을 타야 하는데 그게 어떻게 잠깐이야. 위험한 짓 하지 마. 금방 확인하고 올게.”

    문만큼 큰 남자가 막아 버리니 바이올렛은 침실을 나갈 수 없었다. 체념한 바이올렛이 말했다.

    “그럼 확실하게 확인해 줘요.”

    강건해진 그녀의 눈빛에 윈터의 마음에 안도감이 일었다. 그가 두려워하던 것들이, 그녀가 짓던 포기한 듯한 눈빛이 아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넘친 생명력으로 가득 찼다.

    윈터는 불륜이든 뭐든 제 아내가 처음 보이는 삶에 대한 애착을 단단히 움켜쥐길 바랐다. 그러려면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 바이올렛의 품에 안겨야 할 것이 분명했다.

    *

    바이올렛 앞으로 내준 것은 어차피 제 돈이 아니었기에 윈터는 그것이 아깝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바이올렛이 제가 생각한 것의 10분의 1의 돈으로 살아온 것에 충격받을 뿐이었다.

    수도로 향하는 윈터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기차가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윈터는 칼슨이 공연 중인 오페라 극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중앙은행이 에쉬의 편이라면 자신은커녕 심지어 바이올렛이 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땅을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상대라면 몰라도, 왕실 해체 후에도 권력을 쥐고 있는 에쉬만큼은 법적 분쟁에서 반드시 이기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윈터는 엮여 있는 사람 중 가장 만만한 쪽부터 족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우격다짐으로 오페라 극장의 가수 대기실로 들어섰다.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막 무대를 마치고 나온 칼슨이 무대 화장조차 지우지 않은 채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로우.”

    윈터가 부르자 칼슨이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윈터 경! 언제 봐도 참 무례하시군요.”

    “롱 리우드. 어떻게 된 거지?”

    “아, 그거 이제 아셨구나.”

    그가 전혀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빈정거리자 윈터가 성질을 못 참고 멱살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네놈이 왜 그 땅의 소작료를 수령해? 내 아내는 전혀 모른다잖아.”

    취해서인지, 둘만 있어서인지, 아니면 윈터가 너무 무례하다고 느껴졌는지 칼슨은 마치 하인에게 하듯이 말을 낮췄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나. 내가 잘 조치를 취해 받아서 썼지.”

    “뭐?”

    “내가 썼다고. 한 푼도 안 남기고.”

    “웃기지 마. 에쉬 그 자식 짓이겠지.”

    “아니라니까. 정말 나 혼자 한 일이네.”

    칼슨에게서는 술 냄새 말고도 톡 쏘는 듯한 냄새가 났고, 지나치게 겁을 먹지 않았다. 윈터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낮아졌다.

    “무대 뒤에서까지 이 짓인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약쟁이로군.”

    “그래도 공연은 끝나지 않았나. 나도 팬들에게 예의가 있어서.”

    대꾸하며 실실거리던 칼슨의 몸이 붕 떠서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얼마나 취한 건지 칼슨은 아픔을 잘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그를 본격적으로 추궁하기 위해 윈터가 소매를 걷고 칼슨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에쉬 로렌스가 종용했지? 그렇다고 말해. 그렇게 충성을 다해 줄 가치가 없는 놈이니까.”

    “정말로 내가 혼자 했다니까. 그렇잖나. 자네만 아니었으면 난 바이올렛과 결혼할 수 있었어. 그러니 자네는 싫고, 바이올렛은 미워서 그랬네, 윈터 블루밍. 어차피 3년을 몰랐으면 아내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거잖아.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의 돈을 내가 쓰든 그 애가 쓰든 차이가 있나? 차라리 로렌스 가문 사람이 아닌 내가 썼다고 믿는 게 낫지.”

    칼슨의 능청에 한 번 더 걷어차려던 윈터가 잠시 멈췄다.

    그는 아무래도 제가 두 사람의 불륜을 의심해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놈 말은…… 내 아내와도 합의한 게 아니란 말이군.”

    “바이올렛이 왜 그런 짓을…… 아, 설마 불륜을 말하는 건가?”

    “그래.”

    그 와중에도 웃겼는지 칼슨이 폭소했다.

    “3년이나 돈 빼돌리는 것도 눈치를 못 채 놓고 이제 와선 불륜을 의심해? 자네 설마 그 얘길 바이올렛에게도 한 건 아니겠지?”

    “그게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말했다면 내 기분이 좋잖나.”

    칼슨이 여전히 남은 웃음을 못 견뎌 하며 말을 이었다.

    “바이올렛은 남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만큼 자기 자존심도 무섭도록 강한 사람이야. 돈 때문에 팔려 가서 결혼하느니 자살했을 사람이라고, 그 공주님은. 그런데 자기 아버지가 나라 빚을 지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하나 때문에 자존심을 굽히고 허락한 거야. 자네 따위 이방인과의 결혼을.”

    “그딴 건 나도 알아.”

    “무슨 소리. 조금도 모르는 게지. 바이올렛을 알면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어.”

    칼슨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넨 영원히 바이올렛에게 용서받지 못할 거야. 그런 사람이거든. 자네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고, 사랑받으려고 애썼던 바이올렛은. 절대로 자기 자존심을 박살 낸 자넬 용서해 주지 않을 걸세. 세상이 아무리 그 애를 망쳐 놨어도 사람의 기본은 변하지 않으니까.”

    칼슨이 앉아 있는 것도 지치는지 바닥에 드러누웠다. 뒤늦게 밀려드는 아픔과 졸음으로 반쯤 감기던 눈을 뜬 그는 윈터의 복잡한 표정을 발견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아, 자네 정말 큰일 났군.”

    어차피 취해서 대화가 통하지도 않았지만, 칼슨이 맑은 정신이었더라도 윈터는 그를 더 추궁할 여유가 없었다. 윈터가 서둘러 그곳을 나오자 하옐이 다급히 막아 세웠다.

    “어디 가십니까? 뒷수습 도와주세요.”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안 돼요! 저렇게 인기 있는 가수를 두들겨 패고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어차피 저 새끼 취해서 기억도 못 해.”

    “돈이라도 몇 푼 쥐여 주고…….”

    “3년 동안 내 돈을 빼돌렸는데 무슨 돈을 쥐여 줘? 수습은 알아서 해. 난 갈 테니까.”

    윈터가 마차를 향해 급히 걸음을 옮겼다.

    “자넨 영원히 바이올렛에게 용서받지 못할 거야.”

    저 미치광이가 한 말에 휘둘려서는 갑자기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만약 아내와 칼슨의 말대로 두 사람 사이에 부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아내가 아이를 가졌단 말인가.

    제가 짐작하지 못한 상대가 있거나, 아니면…….

    확실하다고 생각하던 상대가 제거되니 그의 머릿속에 다른 가정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아내는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없을지 모른다.

    하옐이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한 통에, 머릿속에 자꾸 기적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희망이란 불필요한 것이다. 낙관적인 인간은 실패한다. 그게 윈터의 고집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앞에서는 아무리 버텨도 그 고집들이 결국은 꺾이고 말았다.

    남부로 향하는 기차에 앉아서도 팔짱을 끼고 손가락으로 연신 팔을 두들기며 초조해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아내가 그렇게 적은 돈으로 어떻게 살아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으리란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엔 지난 3년을 어떻게 살아온 거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이번엔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

    빨리 돌아가서 말해 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싫어하겠지만 오늘만큼은 더더욱 돈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는 사실 당신이 생각한 것의 열 배만큼 돈을 들이고 있었어.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생각한 것의 열 배만큼 당신에게 애정이 있었던 거지.

    나는 원래 애정을 그렇게 계산해. 나에 관하여 꼭 알아야 할 부분이지.

    그러니 당신이 그걸 알아야 해. 알아줘야 해.

    그 말을, 조금이라도 빨리 아내에게 전해야 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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