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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3화 (33/176)

33화

윈터는 그 후로 며칠간 제 방에서 술을 들이켰다.

한동안 그의 침실에서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욕설이 퍼부어진다 싶더니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그 후 다음 날 아침까지 조용했다. 하옐은 안심하고 윈터의 침실 문을 열었다가 확 쏟아져 나오는 담배 연기와 술 냄새에 인상을 썼다.

“……어휴, 내가 미쳤지.”

윈터의 눈이 돌아갈 때는 주변의 모든 것을 치워 두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피하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윈터를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녀에겐 무른가 싶어 그냥 보냈더니 오히려 더 큰 사달이 나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바이올렛의 주변을 샅샅이 뒤져 불륜이 맞는지부터 확인했을 사람이고, 발뺌하지 못할 증거를 찾아 들이밀고 유리한 계약을 따냈을 윈터 블루밍이었다. 사업에서는 그걸 제일 잘하던 사람이 결혼 생활에 있어서는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하옐이 매캐함에 질색하고 달려가 창문을 열며 소리쳤다.

“대표님! 살아 계시면 일어나세요!”

하옐이 깨우는 소리에 모처럼 잠들었던 윈터가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그와 같이 들어온 플립이 윈터가 밤새도록 들이마신 술병을 주워 담았다.

하옐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보통 사람이 술을 이만큼 마셨으면 시체로 발견됐을 겁니다, 대표님.”

“닥쳐.”

윈터가 완전히 맛이 간 목소리로 말하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잠이 오지 않고, 취하지도 않는다며 내리 술을 들이부었다.

윈터는 언제나 손해 보기 전에 팔았고, 이익이 있을 것을 샀다. 그는 기본적으로 돈의 흐름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모든 면에서 실패한 투자의 결과가 바이올렛이었다.

윈터가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중얼거렸다.

“심지어 바람까지 피우네.”

아내에게 제가 성에 안 찰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런 더러운 취미를 가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며칠 전 몰아닥친 폭풍과 술기운에 윈터의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전 재산을 날리던 날에도 곧바로 수습을 하던 그였지만 제 어머니와 아내에게 같은 날 받은 배신감에서 벗어나는 데는 며칠이 걸렸다.

하옐이 말 걸어 보라고 플립을 쿡쿡 찔러 윈터를 턱짓했지만, 플립은 자기 일은 이거라는 듯 병을 들어 보이고 방 청소하는 데 집중하는 척했다.

별수 없이 하옐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임신에 다른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콕 집어 불륜이라고 하시냐고요, 정말.”

“다른 이유 뭐. 하나만 대 봐.”

윈터가 중얼거리자 하옐이 슬쩍 대답했다.

“……기적이요?”

“너도 말하면서 기가 막히지?”

하옐이 할 말이 없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사이, 옆에서 묵묵하던 플립이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작은 마님 편입니다. 작은 마님이 불륜을 하실 분이 아니란 건 다들 동의할 겁니다.”

평소 같으면 대들지 말라고 한 소리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얼굴 한 번 못 보고 정략결혼을 하기 전, 아내에게는 혼담이 오가던 남자가 있었다. 게다가 그 남자의 이름이 아내의 재산 문서에 같이 올라가 있기까지 했다.

윈터가 열린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부셔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투덜거렸다.

“아, 살맛 안 나네.”

*

바이올렛은 요즘 들어 과일 외의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게다가 의사가 괜찮다는데도 아이에게 조금도 해가 가는 게 싫다며 약을 입에도 대지 않으니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

젠은 바이올렛이 앉아 있는 침대 옆에 둔 의자에 앉아 과일을 깎으며 투덜거렸다.

“작은 마님이 누구누구 만나는지는 온종일 옆에 있던 제가 아는데. 작은 주인님은 왜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을 잡는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데, 젠이 제풀에 성질이 더해져 투덜거렸다.

“저 같았으면 펄펄 날뛰다가 기절해 버렸을걸요.”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안 좋을까 봐.”

“그렇게 참으시면 오히려 병나요, 작은 마님. 그리고 결혼한 언니들이 임신 초기에 남편이 못 해 주면 마음에 평생 남는다고 했어요. 나중에 달달 볶으셔야 돼요, 꼭.”

젠이 꿍얼거리며 마저 과일을 깎고 있을 때, 침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

캐서린의 목소리였다.

젠이 당황해 바이올렛을 보자 그녀가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젠이 문을 열자 근사한 드레스 차림의 캐서린과 마찬가지로 파티를 위해 멋을 낸 제임스가 보였다.

이제 집에서 파티 치를 돈은 부족할 테니 어디 초대받아서 가려던 차일 것이다.

캐서린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기 들었단다. 임신을 했다면서?”

“네.”

그들 표정을 보아 하니 축하하러 온 것 같진 않았다. 바이올렛이 입을 다물자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윈터는 너와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너도 들었잖니.”

“그걸…… 아시면서도 저에게 말해 주지 않으셨군요.”

“그건…….”

캐서린이 머뭇거리자 제임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너희 둘 사이에 오간 건 돈이 전부 아니냐. 이런 부수적인 것들은 몰랐어도 그냥 진행되었을 결혼이다.”

“3년을…… 내내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남들이 제 탓을 해도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슬픔과 분노가 바이올렛을 짓눌렀으나 그녀는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지난 3년 사이에도 이만큼 화나는 일은 있었지만 이렇게 배신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미리 말해 주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돈이 오간 정략결혼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이가 생긴 후에야 이렇게 말하며 저를 불륜으로 몰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아이가 태어나면 분명히 아실…….”

바이올렛이 끈기 있게 설득하는 도중 침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 막 면도를 했음에도 부쩍 수척해 보이는 윈터가 서 있었다.

그는 한없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방안을 들여다보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서 들었는데, 두 분은 아내에게 그런 말씀 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윈터, 어떻게 말을 그렇게…….”

캐서린이 섭섭해하며 다가서는데 피로에 찌들어 문에 기대선 윈터가 말을 이었다.

“그게 그렇잖습니까. 3년 내내 뭐 하시다가 일이 터지고 나서야 잔소리를 하시냐고요, 뒤늦게. 그동안 그 많은 생활비를 드렸으면 최소한 제 아내 하나는 함께 돌보셨어야죠. 이 집에서 유일하게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제 대신에요.”

“아들아, 그게 무슨 무례한 소리냐.”

제임스가 꾸짖자 캐서린이 달래듯 말했다.

“윈터도 너무 놀라서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거예요. 너무 화내지 말아요.”

아내가 말려 별수 없다는 듯 제임스가 입을 다물었다.

윈터는 상대가 자신을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 가족들에게도 그리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하지 않았다.

블루밍 가문 영지조차도 많은 부분이 윈터의 소유로 넘어가 있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재산들도 제 형에게 열등감을 가진 디에브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다.

아직도 일반 라크라운드 시민보다야 월등히 부유하지만 어떤 일반 시민도 그들 정도의 씀씀이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제 부모밖에 모르던 아들의 관심이 며느리에게로 향하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윈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두 분 다 나가 주시죠.”

“혼자 괜찮겠니? 오늘 랜던 가문에서 파티가 있으니 같이 가지 않으련?”

“제가 지금 퍽이나 놀러 다닐 기분이겠습니다.”

캐서린의 말에 윈터가 비꼬아 대꾸하더니 나가라는 듯 도어맨처럼 문을 열고 인사했다.

결국 두 사람이 쫓겨나듯 방을 나가자 윈터는 바이올렛에게 딱 달라붙어 있던 젠에게도 나가라고 손짓했다.

“젠, 가서 쉬렴.”

바이올렛의 말에 젠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과일 쟁반을 들고 나가려는데 윈터가 말했다.

“거기 둬.”

“네에…….”

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침실을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바이올렛이 말없이 윈터를 바라보았다. 한참의 침묵 후 윈터가 침대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몸을 숙였다. 그를 피하던 바이올렛의 몸이 침대에 쓰러졌다.

바이올렛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번져 있었으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당신 아이예요.”

“…….”

“더 할 말이 없어요. 증명할 방법도 없고.”

“누군지만 말해. 용서해 줄 테니까.”

그는 진심이었다.

아이의 생부와 아내를 영영 못 만나게 한다는 보장만 있다면, 그는 진심으로 바이올렛을 용서할 수 있었다.

“내 말을 안 믿는군요.”

“믿을 만해야 믿지.”

“그렇게 못 믿겠다면…… 이혼하고 싶다고 한 건 아직도 유효해요.”

호기로운 사내들도 주눅 들어 마주하지 않을 체격의 남자가 자신을 덮치고 있는데도 그녀는 침착했다.

윈터의 눈에 아내의 모습은 어떤 상황에서든 고결함으로 가득했다. 부정을 확신하는 지금조차도 그랬다. 그는 늘 그런 아내를 무너뜨려 제 품에 주저앉히고 싶은 열망에 시달렸다. 처음 마주치던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았다.

“누구 좋으라고 당신을 보내 줘.”

윈터가 대꾸하더니 냉랭한 눈빛과 달리 부드러운 손길로 바이올렛을 일으켜 앉혔다.

며칠간 혼자 온갖 머저리 짓은 다 하며 분을 풀어서인지, 정작 아내 얼굴을 보니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분위기를 풀어 볼 심산으로 젠이 두고 간 과도와 과일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파티 같은 건 내가 알아서 거절할 테니 집에서 쉬어. 정원 일도 위험하니까 그만두고. 북 클럽을 하고 싶으면 집으로 불러.”

“자기 마음대로군요.”

“못 배워서 그래.”

윈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사과 절반은 제가 먹고 나머지 절반은 바이올렛에게 쥐여 주었다.

다시 바이올렛을 등지고 앉은 윈터가 사과를 으적으적 씹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새낀지 몰라도 찾으면 당장 목을 조를 거야. 연락 닿으면 멀리 도망치라고 해.”

“자기 목을 조르게 생겼군요.”

바이올렛의 담담한 말이 어이없었는지 조소로 윈터의 넓은 어깨가 들썩였다.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잠시 시간을 보낸 윈터가 일어서자 바이올렛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돌아보는 그에게 바이올렛이 물었다.

“정말로 당신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나요?”

바이올렛은 간절했다. 돈도 없고 신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 취급을 받고 불륜 의심마저 받으며 그나마 남아 있던 그녀의 자존심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애원하듯 남편에게 매달렸다.

자신은 아이를 생각하면 버틸 수 있지만, 제 아이가 다른 사내의 아이로 의심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애원에 잠시 생각하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당신 토지 대장을 확인했어. 뒷돈을 주고.”

“그런데요?”

“뭐가 그런데요, 야? 거기 당신과 혼담이 오가던 남자가 소작료 수령인으로 되어 있잖아.”

바이올렛은 전혀 이해를 못 한 데다 초조하기까지 해 무심코 남편의 팔을 당겼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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