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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2화 (32/176)

32화

후원 파티가 중단되는 바람에 식사를 여유롭게 즐기지 못한 부부는 밤늦은 시간 집에 도착하자 다시 허기를 느꼈다.

윈터가 주방으로 향하며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배 안 고파? 난 죽을 지경인데.”

“출출하긴 해요. 하지만 사람들을 깨우긴 그러니 그냥…….”

“간단하게 해 먹자.”

윈터가 익숙하게 주방에서 식재료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남은 식재료를 늘어놓고 소매를 걷었다.

“공주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겠지만, 남는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들인데.”

윈터의 짓궂은 말에 바이올렛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자 윈터가 입꼬리를 늘리며 물었다.

“남는 음식을 먹어 본 적은 있어?”

“왕성에선 없었어요. 법으로 정해진 거였으니까요. 왕족이 전부 식중독에 걸리면 안 되잖아요.”

“결혼하고는?”

“당신이 생활비를 너무 많이 주는 모양이더군요.”

바이올렛의 변명이 우스웠는지 윈터가 아예 유쾌하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곤 채소를 꺼내 썰며 말했다.

“부부가 같이 식중독으로 앓아누우면 볼 만하겠군.”

“신선해 보이는걸요. 그리고 칼질을 잘하네요?”

“열두 살까지 식당에서 부려졌잖아.”

윈터는 채소를 말끔하게 손질한 후 무거워 보이는 팬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소스를 들이부어 가며 간을 맞추는 게 신기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거운 팬을 가볍게 움직이는 그의 두툼한 팔뚝에 무심코 시선이 가기도 했다.

그렇게 볶아 낸 것을 커다란 볼에 수북이 담아 채소가 안 보일 때까지 치즈를 갈아 얹었다.

그가 포크를 건네주자 바이올렛은 치즈가 녹아 흐르는 채소를 들어 입에 넣었다. 낯선 맛이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다.

“맛있어요.”

무엇보다 요리를 하는 남편은 바이올렛의 눈에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아내가 만족하자 마음이 놓인 윈터가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말했다.

“식당에선 뭐 하나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크게 혼이 나거든. 소금이 있던 자리에 설탕이 있어서 잘못 뿌리면 음식을 망치잖아.”

“그렇겠네요.”

“그래서 처음 블루밍가에 와서 애를 먹었지. 물건 위치는 계속 바뀌는데 정리하는 건 내 일이 아니니까 제자리에 옮겨 놓지 못하고. 편집증 환자처럼 불안해하면서도, 그런 티를 내면 식당에서 굴러먹던 꼬마로 돌아갈 것 같아 말은 못 하고.”

윈터의 속에 있던 이야기가 바이올렛은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당신이 원하는 것들을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명예도, 돈도.”

“동정하라고 한 얘기 아니야.”

“동정이 아니라…… 그랬으면 좀 더 빨리 이렇게 지낼 수 있었을 것 같아서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서, 바이올렛은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제가 줄 수 있는 건 그저 마음뿐이었고, 윈터 블루밍이 정말로 원하는 것들은 제게 없었다.

윈터는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인 후 식사를 이어 갔다.

*

윈터는 칸투스 수도원에서의 일이 잘 되어 한동안 바빴다.

수도원과 제가 가진 양조장도 연신 들락거렸다. 다행히 수도원 양조장을 한 바퀴 돌며 얻은 정보로 찔러보니 수도원 쪽에서 기술 협약을 받아들였다. 그들 쪽에도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윈터는 이 일이 성사되면 제가 좋아 날뛰리라 예상했었으나, 일이 잘 풀려도 생각보다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빨리 끝나서 집에나 갔으면 싶었다.

아내는 원래도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편이었으나, 요즘 들어 더욱 그녀의 말들이 좋았다. 목소리도 좋았고, 말할 때마다 미세한 간격으로 변하는 표정을 알아차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사흘 뒤 집에 갈 때 입을 옷을 미리부터 고민하느라 베스트를 입었다, 벗었다 하고 있을 때였다.

하옐이 긴장감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대표님. 카닉 일족이 사는 알리카에서 전신이 돌아왔는데요.”

“어떻게 됐어?”

하옐의 표정을 보니 저 같은 혼혈에게 아이가 생길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큰 기대가 없었던 윈터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베스트 단추를 푸는데 하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혼혈이 없답니다. 알리카 지역은 카닉 일족이 아니면 거주가 안 되고, 심지어 혼혈도 마찬가지로 이주할 수 없는 폐쇄적인 지역이랍니다.”

“젠장. 더럽게 안 되네.”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베스트를 뜯듯이 벗어 버리고는 땅에 집어 던졌다. 그의 분노가 한계치임을 알면서도 하옐은 한 번에 말해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함께 알게 된 건…… 대표님 친어머님께서…… 알리카에 계신답니다.”

“……뭐?”

“알겠지? 그거 먹고 있으면 엄마가 금방 데리러 올게. 금방 올게.”

“응! 빨리 갔다 와.”

그렇게 손을 흔들며 어머니를 보냈다. 돌아오지 않아도, 지금까지 어머니를 이해하려 했다.

혼자 날 기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살려고 그랬겠지.

그러니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이 정도 재력으로 이름을 날렸는데도 찾아오질 않는 걸 보니 죽었거나, 제 앞에 나타날 염치가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찾았다. 최소한 낳아 준 것에 대한 보답은 하고 싶었고, 다섯 살까지 저를 돌보느라 힘들었던 것도 보상하고 싶었다.

그런데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혼혈인 자신은 일족이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없으니 버린 것이다. 제 스스로의 안위만을 위하여.

윈터가 기가 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믿을 게 따로 있지. 자식 버린 여자를 믿었네, 내가.”

“대표님…….”

“됐다. 난 원래 여기도 저기도 못 끼는 놈이야.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훑어 낸 후 말을 이었다.

“친어머니 몫으로 사 놨던 건 전부 내놓고, 이번 일정들 취소해.”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취소하면 큰일 날 일정들이 줄줄이 엮여 있었지만 하옐은 여기서 말려 봤자 상황이 악화되기만 할 것을 알았다. 하옐이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베스트를 주워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집. 아내가 필요해.”

생각보다 침착한 그의 말에 불안에 떨던 하옐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윈터에게서 저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저 성질에 알리카 지역을 쓸어버리겠다고 들까 봐 걱정했는데, 그를 제어할 힘을 가진 사람이 하나는 있었던 것이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하옐이 서둘러 달려 나갔다.

*

윈터가 바쁜 동안 바이올렛은 작은 가든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과 두 사람만의 가든파티를 하며 제가 아이를 가졌음을 말해 줄 생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수십 번의 파티를 열어 봤어야 할 바이올렛이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보니 기회가 없었다. 경험이 적으니 고작 두 사람을 위한 파티 준비가 너무도 어려웠다.

그래도 꽃을 정하니 나머지는 조금 수월해졌다.

다행히 북 클럽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떨어지는 부분에 반원이 있는 흰색 리넨 테이블보를 덮고, 뮬리를 중심으로 만든 센터피스를 놓았다.

바이올렛이 실크 가게 주인인 모린에게 물었다.

“모린, 드레스는 뭘 입으면 좋겠소?”

“녹색이 감이 좋네요.”

“아, 녹색. 좋은 생각이오.”

바이올렛이 동감했다.

잠시 후, 그녀가 녹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니 모린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아휴, 잘 어울리네요. 제가 보는 눈이 있죠?”

“아무렴. 도와줘서 고맙소.”

유력 가문의 부인과 개인적으로 거래를 트는 건 상인들에게 당연히 좋은 일이었고, 심지어 예산 책정이란 게 존재하지 않을 윈터 블루밍의 아내와의 거래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서도 모린은 바이올렛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마냥 고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선한 데가 있었다.

모린이 한참 참견을 한 후 돌아가자 바이올렛은 자리에 어울리는 수프를 고르려고 세 가지의 수프를 부탁했다.

테이블에 두고 색이며 맛이며 어울리는 것을 찾는 중에 마차가 도착했다.

윈터는 앞으로도 사흘이 지나야 온다고 했었다. 파티 주인공이 준비 중에 와 버렸으니 바이올렛은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터가 걸어와 다짜고짜 바이올렛을 끌어안았다.

“내가 올 줄 어떻게 알고 나와 있어.”

윈터가 그녀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자 당황한 바이올렛이 손짓해 사용인들을 물렀다.

사람들 보는데 이게 무슨 무례냐고 말하기엔 윈터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였다. 바이올렛이 그의 등을 다독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없어.”

윈터가 안정을 찾은 후에야 그녀를 놓아주며 물었다.

“웬일로 이런 걸 준비했어? 당신 이런 거 싫어하잖아.”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거든요. 더 미룰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준비 끝내고 식사도 하면서 말하려고 했는데.”

“무슨 말인데? 지금 해.”

윈터의 재촉에 바이올렛이 깊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어 보았지만 결국 고개를 저었다.

“사흘 뒤에 말해야겠어요. 당신 기분도 별로 안 좋아 보이고…….”

“내가 지금 뭘 참고 견딜 상태가 아니거든. 그러니까 말해.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음. 저에겐 좋고 당신에겐…… 어떨지 모르겠어요.”

바이올렛이 다시 어깨가 들썩이도록 심호흡하더니 윈터를 보았다. 아무 일 없다고 해 놓고, 윈터의 눈빛이 광풍처럼 그녀를 휘감았다.

더 미루게 해 줄 표정은 결코 아닌지라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임신을 했어요.”

“…….”

윈터는 대답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당신이 싫어할까 봐 말하기 두려웠는데, 당신이 말했잖아요. 생기면 낳자고. 그래서 용기가 생겼어요.”

생각보다도 나빠 보이는 윈터의 표정에 바이올렛이 수습하듯 말하는데,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윈터가 실소했다.

“잘됐네.”

“……정말요? 정말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래. 이제 아이 타령은 안 들어도 되겠군.”

윈터의 말에 초조해하던 바이올렛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으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낳아서 딴 놈이랑 도망칠 생각이라면 포기해.”

“무슨 소리예요?”

바이올렛이 당황하며 되묻자 윈터가 검지로 자신과 아내를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우리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날 수가 없어. 난 반쪽짜리라 같은 일족이 아니면 아이를 가질 수 없지. 그런데 당신이 아이를 가졌으니, 내 아이일 리가 없어.”

“말도 안 돼요. 그럼 나는…….”

“다른 놈 아이인 거지.”

윈터의 비꼬는 듯한 말에 바이올렛의 물빛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분명히 당신 아이예요.”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에요.”

“거짓말 맞아. 그러니 앞으로 사람을 붙일 거야. 어딜 가도 따라다니게 할 테니 그런 줄 알아. 내가 겪어 봐서 알게 됐거든. 돌아온다는 사람 믿으면 안 된다는 걸.”

과거와 현재의 배신감으로 뒤섞인 그의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돼요.”

“왜 안 돼? 당신 가족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은 거절할 자격이 없어. 지금 내 기분으로는 당신을 내 집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가게 하고 싶어. 그런데 감시하는 정도로 봐주겠다잖아.”

“윈터!”

듣다 못한 바이올렛이 언성을 높이자 윈터가 비웃음을 흘렸다.

“솔직하게 말해 줘?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은 돈도 없고 신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여자잖아. 난 당신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그의 날카로운 말에 바이올렛의 말문이 막혔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슬픔으로 그녀의 가슴팍이 오르내렸다.

아이가 없었다면 몇 번이고, 제가 결국은 죽어 버릴 때까지 자살을 반복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는 버티는 힘이 좋은 사람이었으므로, 아이를 위해 억지로 제 기분을 가라앉혔다.

잠시 후, 바이올렛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귀족적인 표정을 지으며 격정에 붙잡혀 있는 윈터를 보았다.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뭐?”

“아이가 태어나면 당신을 닮았을 테니까. 당신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걸, 날 믿지 못한 걸 반드시 후회할 거예요.”

그녀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가엽고 바보 같은 사람.”

바이올렛이 저택으로 들어서고, 윈터는 비틀거리다 가까스로 의자에 앉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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