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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1화 (31/176)

31화

갑자기 쏟아진 비에 포도밭이 소란스러웠다. 다들 물기를 털어 냈지만 공들인 처음의 차림새와 같지 않았다.

바이올렛 역시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털어 내야 했지만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녀는 수도원에서 가져다준 마른 천으로 머리칼을 말리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대화의 내용을 윈터는 거의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대방의 반응으로 말수가 적긴 하지만 그녀가 지적이며 상대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 상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내의 새로운 모습이 흥미로웠으므로 칼슨의 등장으로 엉망이 된 윈터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수도에서 온 더그레이 부부와 이야기하던 바이올렛은 윈터가 끼어들지 못하는 이야기가 길어지는 게 신경 쓰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를 마무리했다.

“남편과 포도밭을 한 바퀴 돌며 산책하기로 한 걸 잊었군요.”

“좋죠! 같이 갈까요?”

“진창이라 부인의 드레스가 다시 더러워질 것 같습니다. 전 여분을 많이 가져왔으니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이 참, 한창 재미있었는데.”

바이올렛과의 이야기가 무척 즐거웠는지 더그레이 부인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윈터가 바이올렛과 포도밭으로 향하며 짜증스레 제 주머니에 두 손을 구겨 넣었다.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라크라운드 사교계에서 대화가 통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100질의 책과 반드시 봐야 하는 15편의 연극이 있어요.”

“내가 개같이 일하던 시간에 여유들을 부리셨군.”

윈터의 냉소적인 말에 바이올렛이 멈춰 서더니 고개를 조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특정해서 당신한테 화난 거 아니니까 화났냐고 물어보지 마.”

“정말 구분을 못 하겠어요.”

“당신이야말로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지금 그 무표정은 무슨 의미야? 아무 기분도 안 든다는 뜻인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에 약간의 섭섭함이 번졌다.

“당신과 함께 포도밭을 걷고 있는 게 즐겁다고 생각했는데……. 안 그래 보여요?”

그녀의 말에 고무공처럼 이리저리 튀어 다니던 윈터의 성질머리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잠깐 얼었던 윈터가 재빨리 바이올렛의 팔을 제 팔에 감아 팔짱을 끼게 하며 말했다.

“알아. 그래 보여. 너무 즐거워 보여서 놀린 거야.”

그의 태연자약한 거짓말이 통했는지, 바이올렛의 눈꼬리가 조금 휘어졌다.

윈터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킷 안주머니에서 아까 수도사들이 나눠 준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는 생화가 붙어 있었고, 그 안에 후원 금액을 적는 카드가 들어 있었다. 바이올렛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직도 안 냈어요? 아까 다 걷어 가던데.”

“얼마나 적으면 저 수도사들이 잘못 적은 줄 알고 날 수도원으로 들여보내 줄까 고민하느라.”

“10만 정도 하면 될까요?”

“겨우 그 정도면 그냥 내가 내는 줄 알 거 아냐.”

“아무리 당신이어도…….”

“나는 ‘아무리’ 같은 한계가 붙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당신은 정말 세상 물정에 어둡군.”

“무슨 의미예요?”

“당신이 정말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뜻이지.”

윈터가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듯이 같은 말을 반복했을 때, 테이블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의사를 불러요!”

테이블 사이에 수도사 하나가 쓰러진 것이 보였다.

바이올렛이 서둘러 달려가자 윈터도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는 남이 쓰러진 것보다 여간해선 달리지 않는 아내가 달리고 있다는 것에 더 관심이 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쓰러진 수도사의 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몸을 숙여 앳된 수도사의 상태를 살폈다. 독은 수도사의 손에서 파랗게 퍼지고 있었고, 손에는 후원자들에게 돌려받은 생화가 달린 후원금 봉투 뭉치가 들려 있었다.

그녀가 봉투의 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한 봉투를 옆으로 빼놓았다.

거의 똑같이 생겼지만 꽃잎 뒤에 점이 있는 다른 꽃이었다. 봉투에는 란치아 욘 페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바이올렛은 곧바로 허리의 리본을 풀어 더 이상 독이 올라가지 않게 수도사의 팔에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소매 속 작은 주머니에서 해독제 하나를 꺼냈다.

혹시나 제가 임신을 한 상태로 독초를 삼킨 것이 몸에 남았을까 봐 챙겨 둔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해독제를 수도사에게 먹이고 미지근한 물을 마시게 했다.

독초에 대비한 해독제는 효능이 좋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이 퍼지는 것을 멈췄다. 한참이 지나서야 인근에서 달려온 의사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말해 준 후에야 사람들이 마음을 놓았다.

윈터가 겨우 긴장이 풀려 비틀대는 바이올렛의 팔을 부축하며 물었다.

“뭘 먹인 거야?”

“독초 해독제요.”

“그걸 왜 들고 다녀?”

그러자 바이올렛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꽃을 좋아하잖아요. 혹시 실수로 독초를 만지면 쓰려고요.”

약간 미심쩍긴 했지만 바이올렛이 평소 꽃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고, 그녀의 해명 외에는 별달리 아내가 해독제를 들고 다닐 이유가 없어 윈터는 그럭저럭 받아들였다. 그래도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

비록 작은 사건이었지만 사람이 죽을 뻔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결국 후원 파티는 중단되었고, 다들 걱정과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섰다.

바이올렛과 윈터 역시 마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수도사 하나가 달려와 그들을 수도원으로 초대했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니 다행히 금방 깨어난 창백하고 앳된 수도사가 누운 상태로 인사했다.

“부인께서 곧바로 조치를 취해 주셔서 무사한 거라고 들었습니다. 쓰러져서 20분이 지났으면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고요.”

생명이 위험했다는 소식에 덩달아 얼굴이 창백해진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다행입니다만, 아무래도 꽃이 섞인 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섞여 있던 꽃은 고산 지대에서만 나는 것이니까요. 일부러 가져다 놓지 않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렇군요…….”

“다른 꽃이 붙어 있는 봉투에 란치아 욘 페제라는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그러자 소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 숙부님이십니다. 안 그래도 형님이 위독하셔서…… 자식이 없는 형님이 돌아가시면 제가 작위를 계승하게 되니…….”

예법이 몸에 익은 소년은 귀부인의 앞에서 누워 있고 싶지 않아 안간힘을 써서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감사드립니다. 저는 란치아가의 차남 란치아 욘 레예스라고 합니다.”

이름이 뒤로 오는 것은 대륙 서쪽 일부 지역의 특징이었다. 바이올렛이 같이 예의를 차리며 대답했다.

“바이올렛 블루밍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란치아 가문 사람들은 절대로 입은 은혜를 잊지 않으니 부모님께서 반드시 부인께 도움을…….”

소년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윈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냥 누워 있지, 꼬마야.”

“꼬, 꼬마라니요. 무례하십니다…….”

몸도 못 가누는 레예스의 앳된 목소리가 우스웠는지 윈터가 어깨를 들썩였다.

다른 수도사들이 막내인 소년을 걱정하며 모여드는 사이, 그는 아내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그가 바이올렛의 귀에 소곤거렸다.

“당신 덕에 여기 잠입했군.”

“초대로 들어왔는데 왜 잠입이죠?”

“우린 지금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양조장에 들어갈거거든. 저 꼬마가 쓰러져서 다들 정신없을 때 한 바퀴 돌고 나올 거야.”

“당신, 생각보다 매정한 사람이군요? 사람이 쓰러졌는데, 지금…….”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오히려 놀랍다는 듯이 대꾸했다.

“생각보다 매정하다니. 날 과대평가해 왔군.”

“나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쁜 일 없이 맨손으로 어떻게 부자가 돼. 얼마나 순진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윈터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당신이 날 그렇게 모르니 이혼 얘기 따위를 꺼내지.”

“이혼이 당신에게 금전적으로 손해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조차 없는 것보다는 당신이라도 있는 게 이 결혼을 흑자로 돌릴 가능성이 높겠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말한 후, 바이올렛은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해 윈터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바이올렛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뭘 알고 싶어?”

“아이는…… 나랑 낳기 싫은 거예요, 아니면 그냥 싫은 거예요?”

“그냥 싫어.”

“나는 정말 많이 아이를 원해요. 그러니 ‘그냥’이라는 말은 타협의 해결책이 되지 않아요.”

아내의 간절한 표정을 보니 그녀의 말대로 그저 싫다는 말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어.”

“내가 알아서 낳고 알아서 키울게요. 당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이가 자라 있을 거예요.”

바이올렛이 애원하듯 말했다.

물론 뿌리치고 작위 이야기를 운운하면 그녀는 체념할 것이다.

윈터가 최근 얼마간 알게 된 것으로 보아 아내는 책임감이 강했다. 비록 왕실이 해체되는 것에 대해 에쉬에게 언질도 듣지 못했지만 제 오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와 혼담이 오갔다는 남자까지 만난 마당에 다짜고짜 그녀의 마음을 꺾어 버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일단은 지금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균열이 생겨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아내가 조금만 안정되면 그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난 후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사 주고,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다 하게 해 준 후에 아이가 태어나는 것보다 더 좋아할 만한 것을 찾아낸 후에.

그 후에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을 말해도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윈터가 답지 않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다 생길 수도 있겠지. 피임이 제대로 안 되면.”

“그러면 어떡하죠?”

“……낳아야겠지.”

상황을 모면하려고 한 말이 뭐가 그렇게 기뻤는지 바이올렛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커졌다.

“고마워요.”

바이올렛은 그의 대답에 만족해했다. 그러고는 제 기쁨을 윈터도 알도록 표현하고 싶었는지 그에게 배운 것처럼 깍지를 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윈터는 그녀가 보이는 짧고 명쾌한 기쁨에 사막에 버려진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으나, 곧 태연함으로 격정을 짓눌렀다.

어차피 아이가 생길 리 없으니 걱정할 일이 없다며 가까스로 불안을 달랬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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