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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0화 (30/176)

30화

바이올렛 부부가 합방을 하던 날, 바이올렛의 주치의인 베릴은 제임스 블루밍에게 불려갔었다.

제임스는 큰돈을 챙겨 주며 바이올렛이 임신 증상을 보이면 무조건 임신이라 대답하라고 명령했었다.

지금 바이올렛의 침실로 불려온 베릴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진찰했다.

그는 곧 바이올렛이 임신부와 완벽히 같은 증상을 보이고 있음에도 임신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제임스가 먹인 약으로 그녀는 당분간 월경이 끊어질 것이고, 매스꺼움과 열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임신은 아니었다.

제임스에게 받은 돈은 이미 제 어린 아들의 유학비로 써 버린 지 오래였다.

윈터는 제게 피해를 준 자들을 골수까지 뽑아 가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이제 와서 걸렸다간 모든 게 끝이었다.

베릴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 격렬하게 반응했다.

“축하드립니다, 작은 마님! 임신이 맞습니다.”

그 말에 멈칫하던 바이올렛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정말입니다.”

그 순간 바이올렛의 얼굴에 밝은 빛이 돌았다. 그녀가 무거운 몸으로 애써 일어났다.

감정 표현이 강하지 않은 편인데도 몸짓과 목소리에서 기쁨이 묻어났다.

“당분간 남들에겐 비밀로 해 주게.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 내가 날을 잡아 직접 말해 줘야 할 것 같네.”

“알겠습니다.”

바이올렛이 베릴의 팔을 토닥였다.

“자네가 온 후로 몸이 많이 좋아진 덕이네.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

언제나 따듯한 작은 마님의 인사에 베릴은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이런 거짓말로 큰일이 일어나진 않으리라, 스스로를 달래며 허둥지둥 인사하고 도망쳤다.

베릴이 떠난 후 바이올렛은 두 손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윈터가 왜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지 그가 말해 주지 않으니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남편의 반응이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행복이 북받쳤다.

*

다음 날, 부부는 칸투스 수도원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 카프타운 역까지 두 시간 동안 기차를 탔고, 그 뒤 마차를 타고 다시 두 시간을 수도원까지 달렸다.

바이올렛은 가는 내내 바른 자세로 앉아 신문에 실린 십자말풀이를 했다. 윈터는 그걸 실제로 푸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핀잔했지만 집중한 아내를 구경하는 것을 썩 즐거워했다.

수도원 소유의 넓디넓은 포도밭으로 들어서니 나라 안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모여 있었다. 블루밍 부부 역시 막 도착한 참이었고, 에쉬 역시 와 있었다.

바이올렛은 옅은 하늘색 튤 드레스에 커다란 사파이어가 달린 브로치를 했고, 청현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 진회색 진주 한 알을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목걸이와 귀걸이를 했고, 구두는 크림색 가죽에 리본이 달려 있었다.

윈터는 맵시 좋게 맞춘 정장에 흰 나비넥타이를 했다. 부부는 수수하지만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는 칸투스 후원 파티의 정석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하늘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비가 올 것 같네요. 검은 구두를 신을걸.”

“내가 안고 다니면 돼.”

윈터가 말하며 습관적으로 제 머리칼을 만지려 하자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잡았다.

“농담이죠?”

“진담이야. 그리고 머리도 만지면 안 돼?”

“이왕이면 진중해 보이는 편이 좋죠.”

“그냥 꼴 보기 싫다고 말해.”

바이올렛이 그의 팔을 당겨 내리며 대답했다.

“꼴 보기 싫지 않아요. 다만 수도원은 경건한 곳이니까.”

“아, 우리 잠자리처럼?”

“……불경해요.”

“부부의 경건한 잠자리 얘기가 왜 불경해.”

더 대답해 봤자 윈터가 하는 말의 수위만 올라갈 것 같아 바이올렛이 발을 들어 두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러자 윈터가 웃더니 허리를 숙이고 입술을 움직였다.

“고작 이런 짓 하려고 발을 들어야 되다니.”

“안 들어도 닿아요. 확실하게 막으려고 든 거예요.”

“확실하게 못 막은 걸로 보이는군.”

“그만 놀리라는 비언어적 표현이에요.”

바이올렛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하자 윈터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대답했다.

“당신 눈빛 때문에 자꾸 놀리게 되네.”

“눈빛이요?”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됐어. 들어가자.”

그 눈빛이 야하다고 말하면 이 뒤로는 매번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신경 쓸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바이올렛은 의아해하면서도 안 듣는 게 나을 이야기라 짐작하고 더 묻지 않았다.

후원 파티가 시작되자, 끝이 뾰족한 후드를 얼굴이 가려지도록 눌러쓴 수도사들이 나왔다.

이 수도원에 제 아들이 있는 부모들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사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 후원 파티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도원이라 음식은 비루하지만 와인은 제법 훌륭하다고 들었습니다. 잔소리 안 할 테니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수도사가 말하고 농담이었다는 듯 슬쩍 웃으니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잠시 후, 수도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와인을 따라 주었다. 윈터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혀를 찼다.

“와인 하나는 끝내주게 만드는군.”

“아, 내 것도 마셔요, 윈터. 레드 와인은 못 마셔요.”

“아예 안 마실 거야?”

“네, 안 마셔요.”

바이올렛의 말에 윈터가 신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것까지 와인을 들이켰다.

칸투스 수도원의 와인은 지금까지 윈터가 마셔 본 어떤 와인보다 명백히 뛰어났다. 파티 중 첫 번째로는 올해 만든 와인을, 그리고 뒤로 갈수록 오래된 와인을 내놓는다고 들었다.

윈터가 반드시 와인을 대량으로 구매하고 말겠다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 바이올렛이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칼슨?”

그러자 멀리 있던 금발의 미남자가 바이올렛을 돌아보고 싱그럽게 웃었다.

“바이올렛! 오랜만이네!”

바이올렛이 반가워하며 다가갔다.

그 두 사람의 인사를 들은 윈터가 돌아보자 바이올렛이 즐겁게 웃으며 윈터를 불렀다. 윈터가 다가가자 바이올렛이 소개했다.

“이쪽은 로우가의 차남 칼슨이에요. 얼굴 알죠?”

“자주 봤지.”

윈터가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아내와는 무슨 관계이신지?”

만나자마자 불쾌함을 드러내는 그의 말투와 행동에 칼슨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 표정 하실 거 없습니다. 그냥 혼담이 잠깐 오간 거예요. 어릴 때 친해서.”

“어릴 때 친해서 혼담이 오갔다고?”

“아, 아픕니다, 경.”

윈터가 악수를 위해 잡은 손을 부러뜨리려 들자 칼슨이 그제야 슬슬 겁을 먹었다. 바이올렛이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에 윈터가 혀를 차며 손을 놓아주자 칼슨이 바이올렛에게 소곤거렸다.

“저렇게 질투가 심한 분이 어떻게 그렇게 밖으로만 나돌아?”

칼슨의 솔직한 질문에 바이올렛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윈터는 칼슨의 말이 들리지 않았을 텐데도 그를 죽일 듯이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질린 칼슨이 슬금슬금 사라지자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설명하라는 듯 바라보자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말 그대로예요. 어릴 때 친해서 부모님들끼리 잠깐 얘기만 한 거예요.”

“저런 질 나쁜 바람둥이랑 공주님을 결혼시키려 들어?”

“소문처럼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심지어 약쟁이네.”

“……네?”

윈터가 왼손을 들어 보였다. 해서 바이올렛이 칼슨을 보니 왼 손목에 붕대를 감은 것이 소매 속으로 보였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고작 저런 걸로 어떻게 알겠어요.”

“두고 봐. 아닌가.”

바이올렛은 부정하면서도 좀 염려가 되는 표정이었다.

사실 윈터가 보기에도 붕대 감은 것 하나로 약쟁이라 말한 것은 소문에 기반을 둔 모함이었다.

그저 바이올렛이 생각보다 저 칼슨 로우라는 남자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싫었을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바이올렛의 롱 리우드 땅이 떠올랐다. 그 소작료를 같이 받아 내는 남자가 혼담까지 오가던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역겨울 정도로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그는 이 행사가 끝나자마자 그 땅에 대해 다시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의 시선이 오늘따라 다소 들떠 있는 바이올렛에게로 향했다.

3년간 제가 돈에 매달려 있는 사이 아내가 바람을 피웠더라도, 그는 진심으로 바이올렛을 용서할 마음이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관계가 있다면, 칼슨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더욱 단단히 돈으로 그녀를 조일 생각이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힘없이 기다리기만 하던 그 다섯 살짜리가 아니었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손목을 붙잡았다.

“바이올렛.”

그녀가 돌아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흐리던 하늘에서 결국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린 수도사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말했다.

“자, 잠시 행사를 중단할 테니 수도원으로 들어가십시오!”

사람들이 한참 멀리 있는 수도원을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윈터는 곧장 재킷을 벗어 바이올렛의 머리를 덮은 후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바이올렛이 멈칫하며 말했다.

“수도원에서 이러면 안 돼요.”

“그럼 어떡해. 당신을 비 맞게 놔둬?”

윈터가 중얼거리며 재킷으로 감춘 바이올렛을 꽉 끌어안았다.

“곧 하옐이 우산을 가져올 테니까 잠깐만 이러고 있어.”

바이올렛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의 넓고 단단한 품에 뺨을 기댔다.

그에게 안겨 있으면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 심장 소리가 제 마음속에서 사그라지던 생기를 깨운다.

바이올렛이 잠깐 그의 품에서 벗어나 비가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도록 했다. 눈물이 나서 그런 것이었는데, 윈터가 금방 짜증을 내며 다시 그녀를 끌어안았다.

“싫어도 이러고 있어.”

“윈터.”

“뭐.”

“수도에…… 빨리 가고 싶어요.”

“티 파티 한번 가 보니 정말 짜증이 나더군. 그걸 매주 가려면 싫었겠어.”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당신이랑 둘이서만 살면 좋겠어요.”

윈터가 재킷으로 가려진 그녀의 머리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대며 말을 이었다.

“그러지 뭐.”

“그리고…… 이러고 있는 거 안 싫어요. 조금도.”

“……다행이네.”

그때, 하옐이 우산을 가져왔다.

“대표님!”

“왜 이렇게 늦어!”

“뛰어왔는데요!”

하옐이 대꾸하며 커다란 우산을 내밀었다. 윈터가 그것을 받아 들어 펼치자 바이올렛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윈터 역시 바이올렛의 맑은 하늘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어차피 비와 우산 때문에 안 보여.”

그러더니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바이올렛의 입술이 놀람으로 조금 열렸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들뜬 와중에도 남편이 원하지 않던 아이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자신을 바라보는 윈터의 눈빛에 어쩐지 안심이 됐다.

이제는 몸을 바꾸지 않아도 남편과 좀 더 알아 갈 수 있을 것이고, 알면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 행복해지리라.

그럼 윈터가 곁에 있어도 느껴지던 이 막막한 그리움도 반가움으로 바뀌게 될까.

바이올렛이 간절히 바라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싶어 손을 뻗는데, 윈터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우산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비가 그치네.”

지나가는 비였는지, 금방 비가 그쳐 가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손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소나기였나 봐요.”

곧 구름이 걷히며 서서히 노을이 물드는 하늘이 드러났다. 잠시 후, 수도사 몇이 후원금을 적어 내기 위한 봉투를 들고 나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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