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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9화 (29/176)
  • 29화

    바이올렛은 윈터의 건강한 몸이 편안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하게 느껴졌다. 비교적 윈터의 체형에 맞춰 만든 마차조차 천장이 낮게 느껴져 답답했다.

    밖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열던 바이올렛의 시선이 남편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에 닿았다.

    “……진짜 안 풀었네, 시계.”

    그녀의 혼잣말에 잠깐도 못 쉬고 서류를 확인하던 하옐이 대꾸했다.

    “엄청 애지중지 하시더라고요. 원랜 물건에 싫증 잘 내시는데 말입니다.”

    “다행이네.”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조금 미소를 지었다.

    그 후에도 한동안 시계를 살폈다.

    *

    침대에서 아내의 몸으로 눈을 뜬 윈터는 몸이 으슬으슬거리는 기분에 표정을 찌푸렸다.

    “젠장, 하루도 건강한 꼴을 못 봐. 의사를 바꿔도 돌팔이라니.”

    그는 있는 대로 성질을 내며 몸을 일으켜 거울을 보았다. 바이올렛은 여름 끝에 어울리는 어두운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꽤 밝은 옷이었다.

    윈터는 잠시 제 아내의 얼굴을 이리저리 감상한 후 자리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몸이 바뀌는 단서가 뭐라도 남아 있을지 몰랐다. 제 혈통 때문에 몸이 바뀌는 건데 제가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게 억울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사방을 뒤지던 그는 침대 아래 떨어져 있는 약병 하나를 찾았다.

    약병에는 진통제라고 적혀 있었다.

    “월경통 약인가?”

    윈터가 혼잣말을 하는데 어느새 들어온 젠이 얼른 약병을 잡아챘다. 그녀가 빈 병을 보며 펄펄 날뛰었다.

    “작은 마님! 또 진통제를 다 드셨어요? 제가 약 너무 많이 드시면 몸에 안 좋다고 했잖아요!”

    “…….”

    아내를 걱정하는 잔소리만 아니면 벌써 욱해서 뭐 하나 집어 던졌을 것 같은 소란스러움이었다.

    *

    잠시 후, 윈터는 블루밍 저택에 도착했다.

    티 파티 장소에 내려서니 연분홍색 테이블보로 덮인 긴 테이블에 음식들이 있고, 우아하게 차려입은 손님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한쪽에서는 티 파티의 재개를 축하하기 위해 부른 가수들이 볼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손님들을 다정하게 맞이하던 캐서린이 서둘러 다가와 며느리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바이올렛, 이제 마음은 좀 풀렸니?”

    “예? 아, 예…….”

    바이올렛의 기분이 안 풀렸으면 어떡하나, 약간 걱정하며 적당히 대답하고 나니 캐서린이 그를 데리고 테이블로 향하며 말했다.

    “윈터에게 들었단다. 그렇게 속상해했다고……. 내가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러셨군요.”

    윈터는 바이올렛이 받을 사과를 제가 받는 게 민망해 건성으로 넘기며 티 파티를 돌아보았다. 그때, 지나가던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공주님, 오늘따라 근사하시군요.”

    윈터가 칭찬이라고 생각해 대답하려는데 캐서린이 부드럽게 며느리의 팔을 감싸 잡으며 말했다.

    “이제 바이올렛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죄에도 다 시효가 있지 않나요?”

    칭찬이 아니었나?

    윈터가 멈칫하는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늘 이렇게 감싸시니 아직도 자기가 공주님인 줄 아는 거 아닙니까.”

    나무란 것이 맞았다. 캐서린이 아니었다면 모를 뻔했던 윈터가 따지듯 말했다.

    “왜 자꾸 결혼한 여자에게 말을 겁니까?”

    “그, 그거야 공주님께서…….”

    “세상에, 무례해라.”

    바이올렛이라면 분명 뭘 말해도 무례하다고 하리라. 윈터가 맘대로 생각하고 정색하자 남자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여튼 시답잖은 사람이 참 많은 세상이었다.

    윈터는 사람들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바이올렛이 여기 친구가 없는 건 알고 있었으니 온 김에 고급 정보나 풀어 친구를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윈터는 이 지역 상권을 꽉 틀어쥐고 있었으므로 이 자리에도 아는 얼굴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래서 리온 로드 입구 쪽에 앞으로 가게가 많이 들어선다는군요.”

    “두 번째에 있는 건물에 뭐가 들어설까요?”

    몇 번 사업차 만난 적 있는 사람들이 윈터 소유의 건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윈터가 곧바로 끼어들며 말했다.

    “극단이 들어선다던데.”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물었다.

    “어떻게 아세요?”

    “남편이 알려 주더군요.”

    “어머, 그래요?”

    “다른 것도 물어봐요. 오늘 돈 되는 정보 좀 풀어 드릴 테니까.”

    무심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여 돈을 표현하던 윈터는 아내라면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뒤늦게 떠올리며 뒷짐을 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윈터 경께서 얼마 전에 번화가 상인들을 싹 다 불렀다던데, 정말이에요?”

    “왜 싹 다 부릅니까? 고급 상점만 불렀지.”

    “어, 어쨌든 부르긴 부르신 거네요?”

    “소문 참 빠르네요.”

    그의 말대로 소문이 빨랐다. 사람들은 윈터 블루밍의 아내가 풀어 주는 ‘돈 되는 정보’를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그때, 작은 소란이 들려 돌아보니 귀부인 하나가 옷에 음식이 쏟아져 쩔쩔매고 있었다. 윈터가 별 관심 없이 고개를 돌리는데 앞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윈터 경께서 부인을 용서해 주시고 나니 희생양이 바뀌네요. 그 사이에.”

    용서란 말에 무슨 소리인가 싶어 표정을 구긴 윈터가 다시 돌아보았다.

    옷을 멍하니 보던 귀부인은 죄지은 사람처럼 나무 그늘 아래 서 있었다.

    윈터가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저기 있어요?”

    “걱정해 주지 마세요. 저 사람이 부인을 얼마나 괴롭혔어요. 자업자득이죠.”

    그러자 옆에서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다.

    윈터와 바이올렛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눈치 빠른 귀족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와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세한 상황까진 몰라도 그동안 바이올렛이 남편에게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이었고, 그래서 제 주제에 맞게 어둡고 수수한 차림새를 하지 않으면 괴롭힘과 비난에 시달렸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같이 가 주면 안 돼요? 한 번이면 돼요.”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그냥 당신이 온 것만 알려 주면 될 텐데.”

    바이올렛은 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그에게 부탁했었다.

    나중에는 화도 내고 애원도 하며 강경하게 나왔지만 몸이 바뀌던 날까지 윈터는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평생 제 피를 원망하던 윈터는 요즘만큼 제 혈통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몸이 바뀌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도 일을 우선하고 있었을 테니까.

    *

    슬슬 바이올렛이 도착할 때가 되어 윈터는 마차가 서는 곳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지금까지의 파티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동안 어땠는지 궁금했다.

    그가 초조해하고 있을 때, 그의 동생인 디에브가 다가왔다.

    “바이올렛, 여기서 뭐 해요?”

    윈터가 짜증스레 그를 돌아보았다.

    “아내…… 남편 기다려요.”

    그 말에 디에브가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온 적이 없잖습니까.”

    “오늘은 와요.”

    “바이올렛.”

    디에브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 올 사람 그만 기다리고 나한테 의지해요.”

    “……너한테 의지를 왜 해?”

    너무 황당해 불쑥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디에브는 신경 쓰지 않고 대답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외로워만 할 거예요.”

    “내가 지금 친구가 없는 건 내가 세상을 따돌려서…….”

    “고집 그만 부려요, 바이올렛.”

    디에브가 형수의 어깨를 자연스레 손으로 감쌌다.

    그의 행동에 윈터가 인상을 쓰며 디에브를 거칠게 밀쳤다. 그러자 디에브가 우습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 웃음에 윈터는 멈칫했다. 디에브는 제가 밀쳐 내는 것이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윈터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멀리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마차에서 제 형이 내리는 모습을 본 디에브가 움찔하더니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윈터가 곧바로 마차로 달려가자 바이올렛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몸이 닿으면 다시 바뀌잖아요.”

    “바꿔. 칸투스 수도원에서는 그냥 당신이 딱 달라붙어서 내 행동 하나하나 잔소리해. 지금은 그까짓 와인 공수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무슨 급한 일인데요?”

    “소개. 다른 사람들한테 남편 소개하는 게 좋다며. 오늘도 해.”

    윈터가 말하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의 몸이 바뀌었다. 그 후에도 윈터가 바이올렛을 놓지 않자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디에브 그 자식 계속 저렇게 집적거렸어?”

    “…….”

    “내가 처리할게.”

    그는 중얼거리며 바이올렛을 한동안 놓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놀라서 꼼짝도 못 하던 바이올렛이 손을 들어 윈터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한참 후 윈터가 바이올렛을 놓아주며 말했다.

    “열이 많이 나는데.”

    “어젯밤부터 조금요.”

    “그 망할 의사를 바꿔야겠어. 이렇게 툭하면 아픈 게 말이 돼?”

    “그래도 베릴이 주치의가 된 후에 훨씬 두통이 나아졌는걸요? 약이 좋은가 봐요.”

    윈터는 오늘따라 별로 말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그를 티 파티에 혼자 둔 것이 괜히 미안해져 윈터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정말로.”

    “……응.”

    그때, 캐서린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어머. 웬일로 시간이 됐니, 윈터?”

    “아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누군지 알아 두러 왔습니다.”

    그가 언제 우울했냐는 듯 당장 싸울 듯이 말하자 바이올렛이 화들짝 놀라 윈터의 팔을 당겼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마음으로 하던데.”

    “억지예요.”

    “나 원래 억지 엄청 부리는 거 몰랐나?”

    윈터가 두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고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긴 후 사람들을 살폈다.

    바이올렛은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와 주면 좋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든든할 줄은 몰랐다.

    제가 죽음을 고민하기 전에 와 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윈터가 너무 성질을 부릴까 걱정되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바이올렛이 갑자기 느껴지는 울렁거림에 멈칫했다.

    최근 의사가 약을 바꿨을 때부터 매스꺼움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비위가 상한 건 처음이었다.

    바이올렛이 멈춰 서서 혹시나 싶어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윈터와 잠자리를 한 것이 지난 일요일이니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혹시 임신을 했더라도 벌써 증상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몸을 바꾸고 난 후유증이리라.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혼잣말하며 스스로를 달랬지만 자그마한 희망에 자꾸 기대게 되는 것은 별수 없는 일이었다.

    윈터와 사이가 가까워지며 바이올렛은 우연히 아이가 생겨 버리면 남편에게 어떻게 고백할까, 하는 상상에 빠질 때가 많았다.

    배 속에 아이가 있다면 아마 제 스스로 독약을 먹는 일 따윈 하지 못하리라.

    그럴 리는 없지만, 가급적 술은 마시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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