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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8화 (28/176)

28화

바이올렛은 제가 선물한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윈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물이 정말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벌어 오는 사람이라 돌려줄 필요 없다는 말,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도 아니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세상 무서울 게 없어 보이던 남자가 그 말을 할 때만큼은 곁이 허전해 보였다.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피곤하네요.”

“당신에겐 그럴 시간이지.”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 어딘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합방일이 이틀 지나긴 했지만 오늘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해요.”

“담백하네, 우리 공주님.”

윈터가 비꼬거나 말거나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물론 당신이 아이도, 잠자리도 싫어하는 건 알지만 부부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잠깐만.”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아이가 싫은 건 내 입으로 말했다고 쳐도. 잠자리는 왜 싫어한다고 생각해?”

“당신이 지난번에 불만이라고 말했잖아요. 항상 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바이올렛은 평소처럼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내심 상처가 컸던지라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해해요.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싫었겠죠.”

겨우 말하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생각보다 수치심도 컸다. 그녀가 서글픔을 참으려 단정히 모은 두 손에 조금 힘을 주고 있을 때, 윈터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뭘 듣고 있는 거야.”

거절당한 건 자신인데 목소리는 윈터 쪽이 기가 찬 듯이 들렸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니 표정도 그랬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내가 가진 욕구 중에 압도적인 1위가 물욕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성욕이 없는 건 아냐. 경건한 당신네 가문 방식이 싫다고 했지, 내가 언제 잠자리가 싫다고 했어?”

“같은 말 아닌가요?”

“꼼짝도 못 하게 하는 주제에 끝나면 양쪽 가문에서 확인까지 하잖아. 무슨 교배 중인 짐승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무례한 말을 하나, 바이올렛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또 공주님같이 군다고 할까 봐 실제로 말하지는 못했다.

윈터가 남들도 다 제 괴로움을 알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당신이 오해하게 말하지 않으면요.”

“그 망할 방식만 아니면 난 당신이 꺼지라고 두들겨 팰 때까지 하려 들걸.”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두 손으로 입을 감싸며 약간의 경계가 담긴 눈으로 그를 보았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오해를 유발하죠?”

“나를 상종 못 할 미친 이상 성욕자로 오해할까 봐.”

“그게 오해라면 이미 했어요.”

“내 말은, 당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다고.”

“싫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니까.”

“조금씩 협의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갑자기 큰 변화는 힘들어요.”

“키스는 해도 돼?”

“네. 지난번처럼 해도 돼요.”

윈터는 괴로워 보였지만 그거면 됐다는 듯 바이올렛을 일으켜 안아 들고 제 침대로 향했다. 그는 아내를 침대에 눕힌 후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잠옷 목 부분에 있던 리본을 이로 당겨 풀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 이건 손으로 해도 돼요.”

“……당신은 평소엔 참 똑똑한데 왜 침대 위에서만 이럴까. 그냥 모른 척하는 거지?”

윈터는 웃어야 할지, 괴로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바이올렛은 그가 왜 그런 표정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합방일이었다. 부부는 최대한 소리를 죽여 침대 위에선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윈터는 평소의 몇 배는 괴로운 밤을 보냈다.

차라리 평소가 나았다.

입을 맞췄다가 뗄 때 바이올렛이 윈터로서는 처음 보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순간에 이성이 얇은 종잇장처럼 찢어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명인지 뭔지 망할 종소리는 틈만 나면 들리지, 아내를 바로 앞에 두고 욕도 못 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윈터는 아내를 곁에 두고 서너 번을 찬물로 몸을 식힌 후에야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러고도 새벽에 깨서 바이올렛의 얼굴을 바라보다 아침을 맞았다.

그러다 인기척에 테라스 쪽을 보니 커튼 너머로 하옐이 보였다. 어제 바이올렛이 침실에서 나오지 않은 걸 알고 침실 대신 그곳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윈터 역시 테라스로 나서자 하옐이 커피를 건넸다. 윈터가 피로를 쫓기 위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켠 후 입을 열었다.

“어제 생각해 봤는데, 아이 말이야. 지금까지 알아본 건 라크라운드에 있는 혼혈들뿐이잖아.”

“그랬죠.”

“원래부터 카닉 일족들이 살던 곳도 조사해 봐. 거기도 뭐 정보가 좀 있을 거 아냐.”

“설마 저보고 대륙을 넘어가서 알리카 지역에 다녀오라고는 안 하시겠죠? 저도 처자식…….”

“없잖아.”

“을 만들 시간을 주시란 겁니다. 좋은 집을 사면 뭐 합니까, 들어갈 시간이 없는데.”

“좋은 집을 살 만큼 돈을 주잖아.”

윈터가 핀잔했다.

“그럼 사람 보내서 알아보게 해.”

“네, 알겠습니다.”

직접 안 가도 된다는 소식에 하옐이 안도했다.

그에게 간단한 보고를 몇 가지 하고 하옐이 떠나자 침실 쪽에서 유리문을 열고 바이올렛이 걸어 나왔다.

“잘 잤어요, 윈터?”

“전혀 못 잤어.”

“전 깊게 잤어요.”

“이런 것도 안 맞는군.”

윈터는 투덜거렸지만, 이제는 이딴 잠자리조차 점점 싫지 않았다.

더 알아본다고 좋은 정보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어떻게든 바이올렛이 자신을 떠날 구실을 없애고 싶었다. 아이를 원하면 만들어서라도 쥐여 주고 싶었다.

바이올렛은 서 있기가 힘들었는지 의자에 앉았다. 윈터가 물었다.

“앉은 김에 칸투스 수도원에 입고 갈 옷을 봐 줘.”

“좋은 생각이네요.”

잠시 후, 하인 하나가 윈터가 당일에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바이올렛이 초대장과 옷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흰색 나비넥타이 있어요?”

“흰색은 없어. 왜?”

“초대장에 기본 격식에 맞춰 입고 오라고 적혀 있어서요. 흰색 나비넥타이가 필요해요.”

“다른 색은 안 돼?”

“라크라운드에서 기본 격식이라고 하면 남자는 흰색 셔츠에 흰색 나비넥타이에요.”

시작부터 크게 틀릴 뻔했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행커치프는 파란색으로 할 거예요?”

“아무거나. 그것도 정해진 색이 있어?”

“그건 아니지만 이왕이면 블루밍 가문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이 좋을 것 같아서요.”

“선호 색이라니, 별게 다 있군.”

윈터의 짜증스러운 중얼거림에 바이올렛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윈터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배울 기회가 없었어.”

윈터가 그걸 모르는 게 한심하다고 생각해 놀란 것이 아니었다.

블루밍 부부가 당연히 알려 줘야 할 것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었다.

수도 사람이 유난히 더한 편이긴 하지만 라크라운드 사람들은 대놓고 무언가를 뽐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래 놓고 선호하는 보석이나 색깔로 은연중에 우월감과 파벌을 드러내는 모순적임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안 그래도 손수건을 하나 샀어요. 미리 잘 사 놨네요.”

바이올렛이 시계를 담았던 상자를 가져와 그 아래 깔아 두었던 진회색 손수건을 꺼냈다.

“로렌스 가문 사람들은 진회색을 선호해요.”

“내가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제 남편이니 되죠. 당신이 싫다면 안 되겠지만.”

“난 작위를 사려고 전 재산을 내놓은 사람이야. 왕족과 같은 색깔을 쓸 수 있다면 감사히 쓰지. 그나저나 뭘 이렇게 많이 샀어?”

“시계랑 손수건 두 가지예요. 그리고 제가 몇 개를 샀든 당신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말에 윈터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만 봐도 몸을 바꾸기로 해서 정말 다행이군.”

“몸 바꾸는 김에…… 하루만 먼저 바꿔서 티 파티 와 주면 안 될까요?”

아무리 윈터가 지원을 빼 버렸어도 이번 주 토요일 점심에는 캐서린이 여는 티 파티가 있었다. 그다음 날이 칸투스 수도원의 후원 파티였다.

윈터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에 바이올렛이 티 파티에 가면 제가 왜 검은 드레스를 입는지 알게 될 거라고 했다.

“크게 사고 칠 텐데.”

“괜찮아요.”

“대신 칸투스 수도원에서 크게 이익을 내줘.”

“최선을 다해 볼게요.”

바이올렛은 담담한 척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티 파티에서 제가 힘들었던 걸 조금은 알아줄까. 혹시 알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여러 생각을 하며 재킷 주머니에 직사각형으로 접은 행커치프를 꽂았다.

“자, 이게 기본 격식이에요.”

“젠장, 이 망할 귀족 짓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거야.”

“당신처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권위를 위협해서 그럴 거예요.”

“뭐?”

윈터가 표정을 구겼다. 바이올렛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해도 작위가 권력의 전부였잖아요. 그런데 점점 더 돈이 작위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게 되니까. 돈은 있고 작위는 없는 사람들이 상류층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고 점점 더 어려운…… 귀족 짓을 만들어 내는 거죠.”

말하고 나서 윈터의 표정을 살피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그가 손으로 부채질하는 시늉을 했다.

“어머, 귀족 짓이라니. 무례하셔라.”

그의 장난에 바이올렛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

토요일 아침, 티 파티에 갈 준비를 마친 바이올렛은 서랍을 열어 작은 약병을 꺼냈다.

그 안에 정원을 관리하며 구한 남부 토끼풀에서 추출한 맹독이 담겨 있었다. 이 정도 양이면 몇 분 내로 목숨을 잃는다고 배웠다.

바이올렛이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조금 무섭네.”

곁에서 짓궂게 농담하던 윈터가 언뜻언뜻 생각이 났다.

바이올렛은 지난 3년간 그를 그리워했다. 멀어진 그를 기다리느라 그리워했고, 가까이에 있어도 닿지 않아 그리워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에 대한 마음이 완벽히 정리되고, 이제는 폭풍에 전부 쓸려 가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남자 때문에 이 행동이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

바이올렛이 침대에 앉아 약병을 열고 그대로 들이켠 후 침대에 풀썩 누웠다.

‘이대로 죽으면 장례식에 올까.’

처음 죽던 날에도 바이올렛은 그게 제일 궁금했다. 남편이 장례식에 와 줄까.

아마 여전히 그가 그리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깜빡 잠들듯이 암전됐다가 눈을 떠 보니 마차 안이었다. 맞은편에 하옐이 앉아 있었다.

“대표님, 어디 안 좋으세요?”

“괜찮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

“아, 일단 마님께서 여시는 티 파티로 가고 있습니다. 이제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작은 마님.”

어디로 가냐는 질문과 부드러운 말씨에 하옐이 바로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바이올렛이 창밖을 보았다.

문뜩 그 불같은 성격에 수틀리면 테이블을 뒤엎어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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