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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7화 (27/176)

27화

윈터가 새로 고용한 의사, 베릴은 제임스 블루밍 공작이 준 약과 돈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제임스 블루밍은 벌써 세 번째, 그에게 돈을 주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약을 맡기고 있었다.

임신을 촉진하는 약이라고 들었다. 아들 부부가 임신을 원하지 않으니 비밀로 해 달라며 돈을 얹어 주어 그러려니 하고 바이올렛에게 줬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우연히, 들은 것과 달리 바이올렛은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제임스 블루밍은 왜 몰래 이 약을 먹이고 있단 말인가?

임신을 촉진하는 약이 아닌 건가?

그런 의심이 시작되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실토할까 싶었다.

그러나 이미 두 번 돈을 받고 바이올렛에게 이 약을 먹인 것만으로도 처벌을 면하기 힘들 것 같았다.

베릴은 겁에 질려 있었으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녀인 젠에게 제조한 약 봉투를 내밀었다.

“오늘도 똑같이. 작은 마님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약을 드시게 해.”

“네! 아휴, 약을 안 드시면 금방 머리가 아프다고 하셔 가지고 걱정이에요. 완전히 낫는 방법은 없어요?”

“찾아봐야지.”

베릴이 어색하게 말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질 뻔했다.

*

북 클럽이 열리는 실크 상점의 주인, 모린은 윈터가 번화가를 저택으로 부르던 날 왔던 상인 중 하나였다.

그녀가 윈터 블루밍의 저택에서 북 클럽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해 버리는 바람에 공주님이 듣고 여기 참가하신 게 문제였다.

윈터 블루밍의 어음이 등장한 후로 다른 회원들의 눈초리를 견디기 힘들었다.

갑자기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바이올렛이 걱정스레 말했다.

“혹시 못 쓰는 종이라면…….”

“못 쓰다니요! 어디서든 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대륙에서도 쓸 수 있을걸요!”

그런데 왜 이렇게 머뭇거리나, 바이올렛은 신경 쓰여 하며 북 클럽 회원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불편해 보였다.

바이올렛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따돌림의 후유증이 심해, 금방 그들의 불편한 표정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나는 돌아가서 식사를 해야겠소. 그리고…… 괜찮으면 한 번 정도는 저택으로 와서 모이셔도 좋소. 그냥 마음 내키는 날…….”

바이올렛이 아쉬운 마음에 원망 살 각오를 하고 말하자 모린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초대하시면 당연히 가죠. 그건 그거고, 식사하고 가시면 안 돼요?”

“맞아요, 드시고 가세요! 각종 고기를 구워서 파는 곳이 있는데 엄청 맛있거든요. 그냥…… 부군께 시원찮은 거 먹였단 말만 하지 마세요…….”

바이올렛이 예의상 하는 말인가, 하고 망설이는데 뒤에서 다른 회원들이 등을 떠밀었다.

다행히 저녁 식사를 하며 그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윈터 블루밍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바이올렛은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그녀가 떠나는 걸 진심으로 아쉬워해 정말 제가 마음에 든 건가, 하고 살며시 들떴다.

마차로 돌아가던 바이올렛의 걸음이 보석상 앞에서 잠시 멈췄다. 그러자 그녀와 함께 나와 있던 플립이 물었다.

“작은 마님, 구경하고 가시겠습니까?”

“잠깐 괜찮나?”

“그럼요.”

플립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바이올렛이 보석상 안으로 들어섰다.

쇼윈도 너머로 보이던 백금 손목시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는 한참 망설일 가격이었고, 반대로 윈터가 하기에는 너무 저렴할 것 같은 물건이었다.

결혼 후 처음 2년 동안은 그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작은 파티를 준비했는데, 윈터가 한 번도 집에 오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요리를 해 보았는데 그대로 다 식어 버렸고, 나중에 먹어 보니 그가 집에 제때 오지 못해 다행인 음식들뿐이었다.

한참 망설이던 바이올렛이 제가 결혼하기 전에 가져온 브로치를 떼어 손에 쥐었다.

물건을 사보기만 했지, 팔아 본 적은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 번화가에서 윈터의 이름을 팔면 사기당할 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상인이 다가오자 한참 망설이던 바이올렛이 우선 제 신분을 밝혔다.

“내 남편인 윈터 블루밍 경께 선물을 하고 싶은 게 있소.”

그러자 상인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그, 그냥 가져가십시오! 뭐가 필요하십니까!”

“어떻게 그러겠소. 마침 안 쓰는 브로치가 있는데 겸사겸사 처분해 줬으면 좋겠네만.”

“어디 보여 주십시오!”

상인이 바짝 긴장하며 브로치를 살폈다.

유행이 한참 지나긴 했지만 제법 가치 있는 물건이라 다행히 차액이 남았다. 바이올렛은 그 차액으로 칸투스 수도원에 갈 때 쓸 손수건과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 수에 맞춰 간식거리를 사 집으로 돌아왔다.

*

윈터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침실에 들어간 후였다.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닌데 피곤했나, 생각하며 그녀 역시 목욕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자리에 누우려는데 때마침 젠이 약을 챙겨 그녀의 침실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식사는 했니?”

“그럼요,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 작은 마님이 시내에서 사다 주신 과자들도 벌써 싹 없어졌어요. 엄청 맛있더라고요.”

젠이 말하며 의사가 준 환을 숟가락에 올려 꿀을 듬뿍 뿌린 후 바이올렛에게 내밀었다. 바이올렛은 그것을 한입에 꿀꺽 삼키고 물을 들이켰다.

“고마워, 젠.”

“네에,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젠이 경쾌하게 말하고 침실을 나갔다.

그 후에도 잠깐 망설이던 바이올렛은 문을 힐끔 확인하고 가운을 챙겨 입은 후 손목시계가 담긴 상자를 챙겨 방을 나왔다.

혹시나 싶어 윈터의 침실로 가 보니 아직 불이 꺼지지 않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윈터.”

바이올렛이 문을 두들기며 말하자 안에서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간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아직 하옐이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닌 것이 민망해 바이올렛이 다시 문을 닫을까, 고민하는데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뭐 해. 꺼져.”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옐이 말하며 잽싸게 침실을 나갔다. 바이올렛이 조금 붉어진 얼굴로 걸어가 제 쪽으로 걸어오는 윈터의 앞에 섰다.

그녀는 바로 선물을 건네기가 부끄러워 딴소리를 했다.

“아, 할 얘기 있다고 했죠?”

“앉아 봐.”

윈터가 의자를 빼 주며 말하자 바이올렛이 자리에 앉았다. 윈터가 맞은편에 앉아 뒤로 기대며 말을 이었다.

“수도에 당신이 좋아할 만한 저택이 있더라고. 지금 하옐이 협상하고 있어.”

“어떤 저택이죠?”

“약간 언덕에 위치한 곳이야. 해가 아주 잘 드는 정원이 있고, 하얀 울타리도 있더군.”

“세상에…….”

“매입에 성공하면 내년 봄은 거기서 지내자. 정원을 꽃으로 뒤덮든 뭘 하든 당신 마음대로 해.”

윈터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다가 힐끔 바이올렛을 보니 말간 눈동자에 순진한 기쁨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윈터가 픽 웃었다.

“어이구, 좋으신가 봐?”

“고마워요.”

바이올렛이 행복함에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음. 아까 길에서 손목시계를 하나 봤는데요.”

“귀족들은 손목시계를 안 한다고 들었는데, 웬일로. 사 줘?”

“아뇨, 이미 샀어요.”

“그런데?”

윈터가 이미 샀으면서 어쩌란 거냐는 듯이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녀는 또 거절당할까 겁이 나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그것을 열었다. 그리고 윈터의 손목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그는 키가 큰 만큼 팔다리도 길어 그렇게 당겨도 별로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눈짐작으로 사 와서 길이가 맞으려나…….”

바이올렛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작정 손목시계를 채웠다. 다행히 그녀의 짐작이 정확히 맞아 손목시계는 윈터에게 아주 잘 어울렸고, 길이도 맞았다.

바이올렛이 천천히 손을 뗐다.

그제야 윈터를 살피니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또 화내는 거 아닌가 걱정할 즈음, 그가 입을 열었다.

“주변에 손목시계 차는 사람이 나밖에 없지?”

“네.”

“그래서 그걸 보니까 내 생각이 났어?”

“어울릴 것 같았어요.”

윈터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 실수한 건가, 바이올렛이 고민하는데 윈터가 중얼거렸다.

“나에게는 규칙들이 있어.”

“무슨 규칙이요?”

윈터는 잠시 제가 바이올렛을 처음 만나던 날을 떠올렸다.

결혼식 당일, 그는 하옐과 이야기하며 마차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대표님, 기사들 인사받는 법 아세요? 귀부인들이 먼저 이렇게 손등을 내밀면 두 손으로 잡아서 입 맞추는 시늉을 하면 된대요.”

“알아. 근데 그걸 나한테 왜 말해?”

“대표님도 약혼하면서 이미 ‘경’ 칭호를 받으셨잖아요.”

“그래, 그거 받은 지 한 달이 지났는데 그런 인사법은커녕 나에게 ‘경’이라고 부르는 사람조차 한 번을 못 봤어. 다 ‘씨’라고 부르지. 그런데 하늘 같은 공주님이 이제 막 기사 작위 받은, 눈동자도 회색인 놈을 그렇게 바로 인정해 주겠어?”

“하긴, 그렇죠?”

그렇게 비꼬고 있던 차였다. 마차가 멈추기 전까진 돈을 주고 작위를 샀을 뿐,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마차 문이 열리고 그는 완전히 얼어 버렸다. 마차에서는 생각보다 너무나 어리고, 눈부시고, 고귀해 보이는 여자가 내렸다.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는, 하늘에만 피는 꽃 같은 여자가.

그리고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등을 내밀며 윈터를 바라보았다.

윈터는 처음으로 제가 산 것들의 무게에 짓눌렸다.

도망치고 싶었다.

“윈터, 무슨 규칙인데요?”

바이올렛이 재촉하듯 다시 묻는 바람에 윈터는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제 손목시계에서 시선을 떼고 아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벌어 오는 사람이야. 돌려줄 필요 없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왜 없어. 그게 내 규칙인데. 그리고 난 기다리는 사람도 아니고, 기다려야 하는 사람도 아니야.”

가장 중요한 규칙은 누가 버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다섯 살 이후로 그랬다. 금방 오겠다고 해 놓고 도망쳐 버린 어머니가, 그가 기다려야 했던 마지막 사람이며 그를 버렸던 마지막 사람이었다.

열두 살에 생긴 가족들도 그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제 스스로가 그저 가진 것을 늘릴 때만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으며, 스스로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 뒤에 선 이방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아내는 결혼 첫날부터 그의 규칙들에 훼방을 놓았다.

손목시계 같은 건 평생 해 본 적도 없는 공주님께서 손목시계를 샀다. 손목시계를 보고 떠올릴 사람이라고는 자신뿐일 텐데.

바이올렛이 말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어요.”

“여기. 나.”

“말도 안 되는 규칙이에요.”

그녀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고, 윈터는 괜스레 투덜거렸다.

“당신은 무슨 공주님이 손목시계를 사 와. 평범한 사람처럼.”

“마음에는 들어요?”

“들어. 평생 차고 있으려고.”

그의 농담에 바이올렛이 그제야 안심하며 웃었다. 윈터는 물끄러미 그녀의 웃음을 바라보다 저도 한 번 슬쩍 웃었다.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제가 평범한 남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냥 평범한 남편도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기다리면 돌아오고, 나와 상관없는 물건에도 상대를 떠올리고, 상대의 신분이나 혈통에 부담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돈으로 제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그런, 평범한 남자.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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