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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6화 (26/176)

26화

바이올렛이 살고 있는 저택 안은 값지고 구하기 힘든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엘라는 사위가 재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감할 일은 없었다. 하녀 하나가 밀고 온 트롤리에는 온 세상에서 가져온 찻잎들이 가득했고, 테이블에 내려놓는 찻잔들에는 하나하나 세밀하게 자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엘라가 입을 열었다.

“사위가 돈을 많이 벌긴 버는구나.”

“차는 남편이 수입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종류가 많아요. 필요하면 가실 때 챙겨 드릴게요. 아마 초콜릿도 수입한다는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바이올렛이 고민하자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들어서던 플립이 재빨리 말했다.

“말도 수입하십니다.”

“아,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도대체 말을 어디서 어떻게 수입한다는 건지…….”

바이올렛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윈터는 말을 탈 줄은 모르는데 볼 줄은 알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엘라가 넓고 화려한 응접실 너머로 보이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자꾸 안쓰러운 아들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바이올렛,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니? 남편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고. 이럴 때 아이가 생기면 오히려 둘 사이가 나아지지 않겠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엘라가 자리에 앉으며 시작된 아이 타령은 차가 식을 때까지 이어졌다. 바이올렛이 윈터 핑계를 대 보아도 설득하면 될 일 아니냐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바이올렛이 골치 아파하고 있을 때,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이 벌떡 일어났다.

“남편 왔네요. 데려올게요.”

“그러렴.”

엘라가 허락하자 바이올렛이 그곳을 도망쳐 나왔다. 제 힘으로 어찌할 수도 없는 아이 타령에 바이올렛은 지쳐 있었다. 그러니 윈터에게 작정하고 따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린 윈터가 냉정해 보이는 얼굴로 걸어와 덥석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말도 없이 장갑을 벗겨 손가락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말싸움을 걸 타이밍을 놓친 바이올렛이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손가락을 접으며 물었다.

“잘 다녀왔어요?”

“어어, 보면 알잖아.”

윈터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접혀 가던 하얀 손가락을 다시 펼쳤다. 양손을 확인한 후 얼굴과 목덜미까지 확인한 뒤에야 상처가 없는 것을 알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다짜고짜 검사당한 두 손을 모아 품으로 당긴 그녀의 황당한 눈빛을 발견한 윈터가 변명하듯 말했다.

“또 어디 갇혔다가 나왔는데 나한테 말 안 할까 봐. 내가 확인해야지, 별수 있어?”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갇히다니?”

아무리 이방인이지만 사위이니 마중을 나가야 한다고 뒤늦게 판단해 따라 나왔던 엘라가 물었다. 윈터가 곧바로 답하려는데 바이올렛이 서둘러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엘라는 미심쩍은 듯했지만 설마 제 딸이 어디 갇혔으리라고는, 그것도 원인이 제 선량하고 가여운 아들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윈터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엘라가 특유의 쌀쌀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 주고 휙 몸을 돌려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그녀가 떠나자 한숨을 쉰 바이올렛이 윈터를 보았다.

“비밀로 해 줘요.”

“장모님도 자기 아들이 어떤 놈인지 아셔야지.”

“큰오빠 죽은 이후부턴 작은 오빠가 세상인 줄 아는 분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폭력은…… 좀 충격을 받으실 거예요.”

윈터는 입을 떼려다 다시 다물었다.

처음엔 아내가 죽을까 했다는 소리에 무슨 나약한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의지할 곳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너무 늦지 않게 알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혹시나 모르는 일 아닌가.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심 안도하는 그에게 바이올렛이 물었다.

“잠깐 몸 좀 바꿔 줄래요?”

“왜?”

“아이를 낳기 싫은 건 당신인데 잔소리는 내가 듣고 있잖아요. 당신이 말씀 좀 드려요. 게다가 아직 정원 일도 안 끝나서.”

“당신이 정원 일을 하면 귀족 아가씨 소일거리지만 내 몸으로 하면 누구라도 그냥 정원사라고 생각할 거 아냐.”

윈터는 겉으론 그렇게 툴툴거렸지만 아이 얘기만 나오면 피가 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드문드문 어딘가 망가진 것처럼 구는 아내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아무튼 아이 얘기는 내가 말씀드릴게. 장모님 가시면 나랑 얘기 좀 해.”

“아…… 미안해서 어쩌죠? 저 약속이 있어요.”

윈터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리온 로드에 있는 실크 상점에서 북 클럽이 열린대요. 상인들과 하급 관료들이 오나 봐요.”

“당신이 실크 상점 따위에서 하는 모임에 왜 어울린다는 거지? 아무튼 나도 가지.”

“남부에도 친구를 만들어 보려고요.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요.”

“무슨 얘기 좀 하기가 이렇게 힘들어?”

윈터는 욱해서 말하면서도 제 말에 어폐를 느꼈다. 바이올렛도 그걸 느꼈는지 남편을 흘기며 대꾸했다.

“애초에 당신이 일주일 전에 온다고 해 놓고 너무 늦게 와서 일정이 겹친 거잖아요.”

“두 번 안 가고 한 번에 해결하느라 그랬지!”

윈터가 억울해하자 바이올렛은 고집불통 어린아이를 보듯 그를 바라보고는 폭 한숨을 쉬었다.

“일찍 돌아올게요.”

“젠장.”

윈터 역시 제가 어린애처럼 느껴졌는지 짜증을 내면서도 순순히 물러섰다.

*

엘라는 이미 잔소리를 충분히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을 나섰다. 윈터는 엘라를 가장 가까운 제 호텔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택으로 돌아와 보니 바이올렛은 막 나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플립이 바이올렛에게 양산을 씌워 주는 것이 보였다. 하얀 레이스 장갑을 끼고 난 바이올렛이 플립에게 손을 내밀었다.

“양산은 내가 들겠네.”

“무거우니 제가 들겠습니다.”

“남편도 자네만큼 내 체력을 얕보진 않을걸?”

“야, 얕보다니요!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플립이 기겁해서 말하자 바이올렛이 농담이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플립이 결국 양산을 내미는데, 갑자기 윈터가 중간에서 그것을 확 낚아챘다. 그러더니 구겨진 표정으로 플립을 보며 물었다.

“내가 아직도 널 안 잘랐나?”

“예. 해고할까 말까 고민하시다가 마셨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일까지 맡기고 가셨습니다.”

플립의 말에 양산을 쥔 윈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바이올렛을 아끼는 게 플립이라, 그에게 바이올렛이 어디 하나 다치지 않게 감시하라고 맡겼던 것이다.

윈터가 결국 양산 중간을 휘어 버리자 바이올렛이 놀라서 말했다.

“윈터, 손 조심해요.”

윈터가 혀를 차며 그것을 팽개치더니 한 손을 바이올렛의 머리 위, 해가 있는 곳에 두어 햇빛을 가렸다.

“양산은 리온 로드에 가서 새로 사.”

“저걸 고쳐서 쓸게요. 아끼던 거란 말이에요.”

“똑같은 걸로 열 개 만들어 놓으면 되잖아.”

양산이 너부러지긴 했지만 바이올렛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끼던 거라며 답지 않게 투정한 것도 햇살을 가려 주는 그의 손이 살며시 마음을 들뜨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 이야기로 무거워졌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바이올렛이 점점 더 쉽게 체념하기 시작했던 탓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정말로 그녀에게 소박한 행복이 되기도 했다.

바이올렛이 멈춰 서서 윈터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제 손을 내밀어 살며시 그의 손에 올려 보았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윈터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당신 손에 해가 다 가려지네요. 종종 이렇게 다녀요, 우리.”

“…….”

눈꼬리가 휘어지도록 사랑스럽게 웃는 아내를 보자 윈터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종이 우렁차게 울려 댔다.

이게 뭐지? 도대체 아내는 지금 뭘 이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거지?

그리고 이 종소리는 갑자기 어디서 들리는 건지…….

바이올렛이 문뜩 놀라서 눈이 커졌다.

“이러다 늦겠어요.”

그녀가 서둘러 마차에 올라타자 윈터가 마차를 출발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한 발을 올려놓고 말했다.

“잠깐만.”

그가 지갑을 뒤적거리더니 리온 로드라고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건 리온 로드 내에서 쓰는 화폐 같은 거야. 북 클럽 사람들한테 밥 사 줘, 이걸로.”

“아,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바이올렛은 종이가 신기했는지 거절하지 않고 받아 챙겼다.

*

“공주님께서 오실까?”

“오실 리가 있어요? 이런 상인들 모임에.”

“그래도 남편이 카닉 혼혈이시잖아요.”

“아니, 윈터 블루밍 씨가 그냥 카닉 혼혈이에요? 여기 번화가 땅이 다 그분 소유인데.”

모린의 실크 상점 북 클럽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였다. 가진 건 돈뿐인 사람들의 이런 소소한 모임에 공주님이 끼시겠다니, 이만저만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냥 공주님도 아니고 남편이 윈터 블루밍인 공주님이었다.

모임 시간이 5분쯤 지나가자 다들 안 오는 모양이라고 확신했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일시에 사람들이 문 쪽을 보았다.

그곳에 여자가 서 있었다. 수수한 차림새였음에도 모임의 사람 모두 그녀가 바이올렛 블루밍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녀는 반듯한 자세와 표정을 가지고 있었고, 상대를 긴장하게 하는 특유의 경직된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북 클럽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맞게 왔소?”

바이올렛이 묻자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사람들 중 하나, 의사인 폴라가 몸을 일으켰다.

“맞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늦어서 미안하오, 첫날부터.”

바이올렛이 그리 말하며 제 이름표가 붙은 의자에 앉아 책을 무릎에 두었다. 실크 상점 주인, 모린이 안절부절못하다가 물었다.

“의, 의자가 불편하실…… 아, 별말은 아니에요, 공주님.”

언제나 자신에게 말 거는 사람을 주의 깊게 마주 보는 바이올렛의 관심이 부담스러워 모린이 말 중간에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락하고 좋은 향이 나는 상점에 초대해 주어 고맙소.”

모린이 다시 힐끔 바이올렛을 보았다. 제 우려보다도 어려운 분위기를 내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묘한 호감이 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금방 그 자리의 이방인에 대해 잊고 북 클럽이 시작되었다.

토론은 길어졌고, 덕분에 북 클럽도 그들 모두의 예상보다 길어졌다.

“슬슬 배고프네요.”

누군가가 하는 말에 그제야 생각났는지, 바이올렛이 윈터가 준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식사를 대접하라고 이런 걸 주던데. 여기서 쓸 수 있는 게 맞소?”

윈터 블루밍의 이름과 리온 로드의 도장이 찍힌 어음이었다. 그 안에 있던 사람 중 윈터와 사업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은 전부 얼굴이 하얘져서 벌떡 일어났다.

윈터 블루밍이 일로 관계된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할 때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나랑 거래 끊기 싫으면 이제부터라도 잘하자.’

바이올렛은 제 남편에게 원망이 쌓여 있었지만 그가 내키면 나쁜 짓도 얼마든지 저지를 사람이란 것은 몰랐다. 지금 리온 로드에 있는 사람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바이올렛뿐이었다.

모임의 사람들은 윈터가 아내에게 굳이 밥을 사 주라고 한 이유를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아내에게 잘해 주라는 건지, 아니면 돌려보내라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오히려 오래 붙잡고 있으라는 건지…….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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