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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5화 (25/176)

25화

바이올렛이 남편에게 벽장에 갇힌 일을 말하지 않았던 건, 그가 몇 번이고 이야기하자는 제 말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남편이기 때문에, 이런 일에 전혀 화를 내지 않을 줄 알았다.

윈터가 화를 내는 건 몇 번 봤지만 저렇게 크게 화내는 건 결혼식장 외에서는 별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윈터의 대답을 기다리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해?”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요.”

“그럼 이게 아무 일도 아닌 게 돼?”

“내가 언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어요?”

“표정이 그렇잖아!”

못 견디고 윈터가 언성을 높였다가 욕설을 한 번 내뱉고는 혼잣말을 했다.

“이혼을 당하든 말든 당사자는 나인데 왜 주변에서 참견인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에요.”

그때, 문이 열리며 하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대표님, 이제 진짜 가셔야 하는데요!”

“기다려. 곧 나갈 테니까.”

“진짜 급한데요.”

“내 말 안 들려?”

윈터가 인상을 쓰고 하옐을 돌아보자 그가 움찔거리며 조용히 침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윈터는 다시 사냥감에 집중하듯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갇힌 건 나인데 왜 그가 이리 화를 내는 걸까. 바이올렛이 작게 한숨을 쉬고 물었다.

“이번엔 진짜로 화났죠?”

“누구한테?”

“저한테요.”

“내가 지금 당신한테 화난 걸로 보여?”

“네.”

“3년 내내 그랬어?”

그의 질문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윈터가 이번엔 무채색으로 보일 만큼 표정을 지우고 물었다.

“3년 내내 내가 화난 것 같아 보였냐고. 항상.”

“음…….”

바이올렛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화난 것 같아 보인 게 아니라, 화가 났었잖아요. 날 만했었고.”

“…….”

“아무튼 난 이제 정말로 자야겠어요. 피곤하네요.”

바이올렛이 침대에 걸터앉아 슬리퍼를 하나씩 벗었다. 그런데 나가야 할 윈터가 오히려 따라 들어오더니 그녀의 침대에 풀썩 누워 버렸다.

바이올렛이 드물게도 인상을 쓰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드러누웠다. 왜?”

“내 방이에요.”

“딱하기도 해라. 이젠 막 침대도 남편한테 뺏기고.”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바이올렛은 납득이 안 되는 표정이었지만 윈터가 팔을 붙잡아 당기는 바람에 별수 없이 그의 옆에 누웠다.

자기도 피곤한 척 누워 놓고, 윈터는 바이올렛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 차갑기도, 따듯하기도, 어찌 보면 남편 같기도 한 눈빛에 바이올렛이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바쁜 것 같던데요?”

“당신 잠들면 갈 거야. 나 쫓아내고 싶으면 빨리 잠들어.”

윈터가 말하며 먼저 눈을 감자 바이올렛도 따라서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됐으니까 일하러 가요.”

“왜 자꾸 쫓아내? 언젠 계속 있으라며.”

“이건 약속이고 예정된 일이잖아요.”

그렇게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 나가지 않아 이상했다.

결국 윈터는 나가지 않고 내내 곁에 누워 있었고, 바이올렛은 그런 그가 신경 쓰였지만 너무 피곤했던 탓에 그대로 잠이 들었다.

*

바이올렛이 일찌감치 잠들자마자 윈터는 곧 부모님의 저택에 들어섰다.

해가 지고 난 뒤라 그의 부모는 워호슨의 몇몇 귀족들과 만찬장에서 와인과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캐서린이 다가왔다.

“윈터, 무슨 일이니?”

그러자 윈터가 날카롭게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아내를 벽장에 가두는 벌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또 뭐가 수틀려 저렇게 성질난 얼굴인가 했다.

윈터의 다혈질 다스리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힌 캐서린이 다정히 말했다.

“윈터, 우린 다 널 생각해서 한 거야. 알잖니?”

“그게 도대체 어떻게 절 위한 겁니까?”

“너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혼 이야기가 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바이올렛은 너한테 이러면 안 돼. 난 내 아들 상처받는 거 못 본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도 아닌데 그렇게 벌을 주신 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바이올렛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하니? 그랬다면 미안했다. 내가 가서 사과하마. 난 다 너희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캐서린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하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던 윈터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꼭 사과해 주십시오.”

“해야지. 그 애가 상처받았다면 당연한 거 아니겠니?”

“아무튼……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

“그럼. 앞으로 절대 안 그러마.”

그제야 휘몰아치던 윈터의 화가 누그러졌다. 그는 언제나 애정에 결핍되어 있었으므로 어머니의 이런 다정한 말들을 듣고 나면 사고가 흐려지기 일쑤였다.

캐서린이 윈터의 팔을 따듯하게 다독이며 물었다.

“온 김에 식사하고 가겠니?”

“아뇨, 바로 가 봐야 합니다. 그럼 바이올렛은 사과를 받고, 저는 올해 파티 비용은 더 이상 드리지 않는 정도로 끝내죠.”

“……응?”

그의 말에 여간해선 당황하지 않던 캐서린이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아내와 어머니 사이 일은 알아서 해결하시면 되죠. 그런데 어쨌든 이번 일은 어머니가 저에게 참견을 하신 거니까 저도 참견을 하겠다, 이 말입니다.”

캐서린은 문득 아들의 좌우명과도 같은 말을 떠올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손해는 보지 않겠다는 것.

설마하니 여기서 기분 나쁜 것까지 돈 문제로 끌고 갈 정도로 아들이 돈에 미쳐 있는 줄은 몰랐다.

캐서린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바이올렛이 그렇게 하라고 했니? 그 애는 항상 파티에 오는 걸 싫어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윈터가 어떻게 그렇게 당연한 걸 눈치채지 못하냐는 듯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도 참. 돈이 얽힌 건데 당연히 제 생각이죠.”

“윈터!”

결국 내내 부드러워 보이던 캐서린의 언성이 높아졌다. 윈터가 표정을 구기고 말을 이었다.

“제가 이제 스물일곱입니다. 어린애도 아닌데 애초에 왜 제 이혼에 참견을 하시고 그러셨습니까? 게다가 제가 고작 몇 달 돈 안 드린다고 파티 못 여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진짜 바쁩니다. 잔소리하실 거면 잊지 말고 어디 적어 두셨다가 다음 달에 하시죠. 질릴 때까지 들어 드릴 테니까.”

그는 아내에게만이 아니라 제 부모에게도 모질 때가 있었고, 성질도 급했으며, 욱하기도 했다.

캐서린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단호하게 돈을 끊어 버리겠다고 나온 적은 없었다. 웬만하면 부모의 말을 들어주는 아들이었기에 캐서린의 충격은 더욱 컸다.

작위가 전부가 아니게 된 세상에서 블루밍 부부는 사교계를 통해 더욱 권력을 견고히 할 수밖에 없었다. 파티를 열지 못하는 것은 권력에 흠집이 나는 것으로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모 입장에서는 날벼락과 같은 조치를 취한 윈터는 하옐이 발을 동동 구르다 울화병이 나기 전에 급하게 제 집으로 돌아갔다.

*

바이올렛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남편이 떠난 후였다. 잠결에 당분간은 큰 파티가 없을 거고 어쩌고 하는 윈터의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반은 잠들어 있던 터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미리 플립에게 제대로 이야기를 전해 주라고 하여 잠에서 깬 바이올렛이 윈터의 조치를 알게 되었다.

무대 공포증이 생긴 가수가 무대에 올라가 입을 다물듯이, 바이올렛을 공포증에 빠지게 하는 것이 캐서린의 파티였다. 캐서린이 당분간 돈이 없어 그 좋아하는 파티를 쉽게 못 열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담겨 있던 두려움이 사라져 한결 가벼워졌다.

그 덕분인지 윈터가 없는 동안 저택은 한동안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다만 남편이 떠난 이후부터 플립이 자꾸만 바이올렛의 주변을 맴돌며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당황해 시뻘게진 얼굴로 윈터가 감시를 하라고 했다는 것을 실토했다. 바이올렛은 내가 뭘 잘못했다고 감시를 당해야 하나 싶어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며칠이 지나고는 익숙해져 그리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8월이 끝나 갈 즈음에 바이올렛의 머리칼은 조금 더 자라 한 갈래로 묶어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다.

부쩍 그녀를 좋아하게 된 하녀, 젠이 노란 민들레가 그려져 있는 흰색 리본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묶었다.

거울과 마주 앉은 바이올렛이 여느 때와 달리 조금 흘러내린 잔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정말 안 이상하니?”

“전혀요! 엄청 귀여우세요!”

왕실 여자들은 보통 머리를 장식할 때 헝클어진 느낌이 전혀 들지 않도록 깔끔하게 머리칼을 묶고 핀으로 정리했다.

그런데 윈터가 빗질을 안 하면 마주 앉아서 대화도 못 하는 게 무슨 부부냐고 물었던 게 신경 쓰였다. 그 얘기를 젠에게 했더니 그럼 요즘 유행하는 머리를 해 봐야 한다고 우기며 느슨하게 묶어 주었다.

젠이 재잘거렸다.

“예전에 제가 있던 집 마님은 이런 게 유행이라고 하셨어요. 뭐랄까, 남부 소녀 같은?”

“왜 남부 소녀 같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구나. 난 수도 사람이고 어른인데.”

“아휴, 작은 마님은 왜 이 예쁜 얼굴을 그렇게 고지식하게 낭비하세요? 제가 알아서 할래요.”

젠이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삐죽거렸다. 바이올렛은 그런 젠이 귀여워 조금 미소를 지었다.

젠의 취향대로 머리칼을 묶고 난 바이올렛이 지난번에 산 장화를 신은 후 정원으로 나왔다.

다행히 좋아하는 만큼 재능도 있는지, 윈터가 보면 또 정원사를 해고하겠다고 나설 정도로 그녀가 신경 쓴 곳마다 근사해져 있었다.

바이올렛이 정원 관리에 열중해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몸을 돌렸다.

돌을 깔아 만든 길 위에 어머니, 엘라 필리체 부인이 서 있었다.

“어머니?”

“세상에, 너 이게 무슨 꼴이니?”

엘라가 경악이 담긴 눈으로 딸을 보았다. 그러자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 당황해하던 바이올렛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남편이 너무 단정한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전 이제 왕족이 아니라 블루밍가 사람이라.”

바이올렛의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느껴지는 말에 엘라가 못마땅해하면서도 더 이상 차림새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았다. 바이올렛이 장갑을 벗어 양동이에 넣고 저택으로 향하며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손주는 언제쯤 보여 줄까 싶어 왔단다. 도무지 기미가 안 보이니. 3년이면 이미 충분히 지난 거 아니니?”

“남편이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매번 남편 탓만 하면 어떡하니. 네가 노력을 해야지.”

이혼은 절대 안 된다던 에쉬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동생을 이혼시키지 않을 대책’으로 떠올린 게 아이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바이올렛이 담담히 물었다.

“오빠가 가 보라고 했나 보군요. 아이 이야기를 해 보라고.”

“그 애도 네가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지. 맡은 일이 많아서 그렇지, 마음이 여린 아이잖니.”

씁쓸히 미소 지으며 고개만 끄덕인 바이올렛이 저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저녁이면 남편이 돌아올 테니 다시 설득해 볼게요. 일단 차 한잔 하세요.”

그래도 모처럼, 어머니와 단둘이 차 한잔 마실 기회가 생긴 건 나쁘지 않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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