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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2화 (22/176)
  • 22화

    윈터는 무엇보다 먼저 플립을 잘라야겠다고 결심하며 말했다.

    “이까짓 마사지 뭐 얼마나 어렵겠어. 이래 봬도 안 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이야, 내가.”

    “그런가요?”

    결혼 3년 동안은 어려서 하인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웬만하면 숨기려 들었는데, 어쩌다 바이올렛이 알게 되고 나니 의외로 갖다 붙일 곳이 많았다.

    윈터가 바이올렛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들이붓자 바이올렛이 말했다.

    “플립은 그렇게 많이 붓지 않던걸요?”

    “내 방식이 있어.”

    윈터가 성질을 부리더니 향유가 주르륵 흐르는 바이올렛의 발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리고 발등을 엄지로 꽉 눌러 문지르자 바이올렛이 흠칫 떨었다.

    뭐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다른 것보다 일단 정말 아팠다. 플립은 발에 아주 미세한 충격이라도 갈까 봐 조심조심 마사지를 하는데, 윈터는 억센 손으로 아무렇게나 바이올렛의 발과 종아리를 손으로 쭉 눌러 댔다.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바이올렛은 그냥 입술을 물며 아픔을 참았다.

    열심히 마사지를 하던 윈터가 새빨개진 바이올렛의 발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그렁거리는 것을 본 윈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파?”

    바이올렛이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윈터가 기가 차서 말했다.

    “그럼 말을 해야지.”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말하기가…….”

    아닌 게 아니라, 그 큰 덩치로 여자 발을 마사지하는 게 간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과하게 하는 그가 향유 한 통을 거의 다 들이붓는 바람에 온 방에서 재스민 향이 진동을 했다.

    어찌어찌 마사지를 마친 윈터가 슬리퍼를 가져다 바이올렛에게 신겨 주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향유 범벅인 발이 미끄러워 곧바로 슬리퍼가 벗겨졌다.

    아무리 침착한 바이올렛이어도 조금 울컥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플립은 왜 괜히 나가라고 해 가지고.”

    “…….”

    할 말이 없었다.

    윈터가 벗겨진 슬리퍼를 집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감정적인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발을 조금 들자 윈터가 한 손으로 바이올렛의 발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 슬리퍼를 신겼다. 그의 팔 힘이 단단해 바이올렛은 거의 비틀거리지 않고 슬리퍼를 신었다.

    윈터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내의 눈빛을 보고 문득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던 귀족들의 눈을 떠올렸다. 제 눈동자를, 피를 비천하게 만드는 눈빛.

    바이올렛의 눈빛은 그가 증오하는 어떤 것들보다도 강렬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를 지배하려 하는 듯한 우아하고 완벽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 때문에, 자신은 바이올렛이 무너져 제 품에 쓰러져 있길 바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무력하게 내가 만든 왕국 안에 살아.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증오보다 강렬한 감정이 있나. 이건 도대체 무슨 감정인가.

    더 큰 증오일까.

    윈터가 슬리퍼를 신긴 후에도 꼼짝을 않고 제 발목을 움켜쥐고 있자 바이올렛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무슨 일로 온 거였죠?”

    “아.”

    그제야 윈터가 몸을 일으키고 입을 열었다.

    “어제 분가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네.”

    “부모님이 분가는 영 싫어하시는 것 같더라고.”

    “……아.”

    “그래도 당신 말대로 들락거리는 것이 힘든 건 사실이니, 수도에 거처 마련은 하겠다고 했어. 조만간 수도에 집을 구할 거고, 내가 몇 개월씩 수도에 머물러야 할 때는 당신도 같이 가서 거기서 지내. 완전히 분가하는 건 그 뒤에 차차 생각하지.”

    분가가 안 된다는 말인 줄 알고 눈앞이 캄캄해졌던 바이올렛이 뒤늦게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물었다.

    “정말이에요?”

    “그래. 집은 당신이 골라. 난 어차피 잠만 잘 테니.”

    “호텔에서 머물러도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수도는 여기보다 훨씬 파티가 잦은 곳이야. 당신처럼 초대만 받고 주최를 안 해서는 버티기 힘들 거라고.”

    호텔도, 집도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좋았다. 1년에 한 달만 보장되어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 이상의 진전이었다.

    희미한 미소로 기쁨을 표현하던 바이올렛은 곧 더 확실하게 즐거움을 표현해 달라던 윈터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폴짝폴짝 뛰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올렛이 윈터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더니 무척 어색한 자세로 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고마워요.”

    “……뭐 하는 거야?”

    그녀 딴에는 노력한 건데 윈터가 완전히 굳어서 묻자 바이올렛이 실수했나, 생각하며 뒤로 한 걸음 떨어졌다.

    “정말 기쁜지 모르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표현한 거예요.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앞으로는 하지 않을게요.”

    바이올렛이 난처함을 누르고 담담히 말하자 윈터가 확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그러자 바이올렛이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그의 얼굴에서는 강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날렵한 콧대와 다물고 있는 입술, 따로 떼어 놓고 봐도 사나운 성격을 가졌을 듯한 눈썹과 반듯한 이마.

    본인은 여전히 가난을 상징한다고 믿는 그 눈동자에서는 성공한 자들의 오만함이 넘쳐흘렀다.

    바이올렛이 물었다.

    “화났어요?”

    “난 화가 났을 때 이렇게 얌전하지 않아.”

    “……아.”

    바이올렛은 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윈터가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결국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 초대받았잖아요. 늦겠어요, 이러다가.”

    “늦어도 돼.”

    “신사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아요.”

    “도대체 내 어디가 신사라는 거지?”

    “왜 아니죠? 당신은 블루밍 가문의 장남이에요.”

    “내가 그 말을 할 때마다 귀족 놈들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토끼 눈을 하고 날 보더군. 빈민가에서 굴러먹어야 할 거지 새끼가 어떻게 실크해트를 쓸 수 있나, 하는 눈빛.”

    “그렇지 않아요.”

    “맞아. 당신이 그놈들 눈빛을 못 봐서 그래.”

    “몸이 바뀌었을 때 봤잖아. 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을 얕잡아 보는 게 아니라 두려워하는 거예요. 두려워서 신분으로 찍어 누르려 드는 거라고요. 당신이 신사답지 않게 군다면 그들은 당신을 뒤에서 비웃을 거예요.”

    “…….”

    “당신은 이제 오만하게 굴지 않아도 상대를 두렵게 만들 수 있어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던 윈터가 곧 코웃음 쳤다.

    “그래서 우리 공주님이 항상 이렇게 겸손하실 수 있는 거군.”

    “제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무튼 당신이 모르는 소리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 아, 말 나온 김에. 지난번에 몸을 바꿔 준다고 했지? 조만간 한번 바꿔 줬으면 하는 날이 있어. 그곳에 가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그게 어디죠?”

    “칸투스 수도원. 그곳 와인을 호텔에 독점으로 내고 싶은데, 거기 콧대가 보통 높은 게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9월 첫 번째 일요일에 칸투스 수도원 후원 파티가 있었죠.”

    바이올렛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농담조로 말했다.

    “그곳이야말로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으로 가득하죠.”

    그녀의 말에 윈터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바이올렛은 제 말에 윈터가 웃는 이 순간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따라 웃었다.

    “좋아요. 그럼 분가 이야기의 사례로 그날 몸을 바꿔 줄게요. 같이 가요.”

    “잘됐군. 그럼 나갈 준비 해.”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는데 여전히 발이 미끄러웠는지 조금 비틀거렸다. 윈터가 별수 없다는 듯 바이올렛을 번쩍 안아 들어 드레스 룸으로 데려가자 놀란 그녀가 말했다.

    “이제 걸을 수 있어요.”

    “알아.”

    윈터가 대꾸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곧 아내를 드레스 룸 앞에 내려놓고 불을 켰다.

    “그나저나 당신은 도대체 왜 저렇게 시커먼 드레스를 입는 거지? 수도에선 안 그러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질문에 바이올렛이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생각하며 윈터를 보았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녀가 물었다.

    “가 볼래요?”

    “뭘?”

    “토요일이면 어머님이 정원에서 소규모 티 파티를 하시잖아요. 여름 동안은 더워서 안 하지만 8월이 끝나 갈 무렵이면 다시 시작하거든요. 하루 일찍 바꿔서 토요일에…… 물론 그때 가서 바쁘면 말고요. 안 바쁘면 제 대신 한번 가 줘요.”

    “난 파티에 같이 가 준다고 했지, 혼자 가 있겠다고는 안 했어. 애초에, 내가 거길 가는 거랑 검은 드레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아무튼 생각이라도 해 줘요. 그럼 전 준비할게요.”

    바이올렛이 말을 마친 뒤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았다.

    조용한 공간에 혼자 남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수도행으로 그녀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던 남편의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거기에 분가 부탁까지 들어주고 나니, 그녀는 남편에게 조금씩 기대감이 들었다.

    혹시 남편이 제 몸으로 티 파티에 다녀오면 제 쓸쓸함을 알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어쩌면, 남편만 제 마음을 알아준다면 죽음이 너무도 두려워져서.

    그와 몸을 바꾸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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