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하옐이 바이올렛의 사유 재산 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롱 리우드 평야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사유 재산을 이렇게 마음대로 확인하려 들면 안 되는데…….”
“남편이 아내 재산 좀 본다고 무슨 큰일 납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좀 봅시다.”
하옐의 말에 관리자가 꿍얼꿍얼 대꾸했다.
“본인이 오시면 되잖소. 거 본인만 데리고 오면 다 보여 드릴 거를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드쇼?”
“급해서 그래요, 급해서. 그리고 솔직히 부부 사이에 사유 재산은 웬만하면 보여 주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다 옛말이지. 요즘은 부부여도 네 재산, 내 재산 구분이 철저해서 쉽게 안 보여 줘요.”
“내 참.”
하옐이 별수 없다는 듯이 가방에서 하얗고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식대나 좀 하십쇼.”
“절대…….”
“이걸로는 뭐 아내 되시는 분 구두라도 하나 사다 주고.”
그가 봉투 하나를 더 얹어 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이렇게 챙겨 드릴 때 보여 주세요. 혹시 압니까? 제가 엄청난 쓰레기라 밤에 그냥 쳐들어와서 꺼내 볼지.”
하옐이 웃고 시작하자는 듯 말했지만, 윈터 블루밍의 위엄과 악명을 알고 있는 관리자는 저 말이 꼭 농담만은 아닐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관리자가 슬그머니 서류실 열쇠를 집어 들었다.
회사 내의 온갖 더러운 짓을 도맡는 하옐은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서류실에서 자료를 찾아 나오는 관리자를 기다렸다.
잠시 후, 관리자가 서류를 하옐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기 있소.”
하옐이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라고 적힌 서류를 확인했다. 왕족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 후에도 왕실 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로렌스가 마지막에 적혔다. 왕실이 해체되어 바이올렛 블루밍이라고만 적는 것이 맞을 텐데도 잘못된 서류가 태반이었다.
그녀 자체의 혼란이 서류에도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하옐은 서류를 확인했다.
“왜 서류가 500카타샨의 땅과 4,500카타샨의 땅으로 나뉘어 나오는 겁니까?”
“아, 그건 그냥 표기 문제요. 원래 왕족들의 사유 재산은 그런 식으로 표기를 나눠 놓거든. 아마 4,500카타샨은 개인의 재산이면서 동시에 왕실 재산으로 포함되기도 할 거요.”
“아니, 왕실이 해체된 지가 언젠데 이 망할 서류들은 다 이 모양입니까?”
하옐이 짜증을 내며 500카타샨의 서류부터 확인했다.
윈터가 처음 롱 리우드 땅을 샀을 때부터 함께 일했던 하옐은 이 땅에 대해 정확히 알았다. 기차역에서 먼 이 500카타샨의 땅은 그리 질 좋은 땅이 아니었다. 그 땅의 수익으로 잡혀 있는 200라크네는 그가 보기에 딱 적당한 가격이었다.
하옐은 곧 나머지 4,500카타샨으로 나뉜 서류의 소작을 확인했다.
그 땅에서는 월 2,800라크네의 돈이 나오고 있었다. 이것 역시 합당한 가격이었다.
‘다달이 3,000라크네를 받아서 이렇게밖에 활용을 못 하신단 말이야?’
하옐은 ‘작은 마님이 도박에라도 빠진 게 아니면 이럴 리가 없다’라고 생각하며 서류를 넘겼다. 꼼꼼하게 마지막까지 서류를 확인하던 하옐이 미간을 좁혔다.
왕실 재산으로 적힌 4,500카타샨의 소작료 수령인은 두 사람이었다.
바이올렛 블루밍 로렌스.
그리고 칼슨 로우.
“칼슨 로우가 누구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 그 가수인 칼슨 로우?”
“가수?”
“왜 그 금발에 노래 잘하는 가수 있지 않소. 엄청 바람둥이라는.”
“그자가 왜 우리 작은 마님…….”
하옐이 입을 다물었다.
작은 마님의 땅에서 나오는 소작료를 외간 남자, 그것도 라크라운드 최고의 미남자이며 트러블 메이커인 가수가 마음껏 수령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남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직은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 작은 마님의 사유 재산에 문제가 있었다.
하옐이 서류를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내가 왔다는 건 전부 비밀로 해주십쇼.”
“내가 누구한테 이걸 말하겠소?”
관리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하옐은 일단 이 소식을 윈터에게 전하기 위해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
“작은 마님.”
곤히 잠들어 있던 바이올렛은 자신을 깨우는 하녀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주인어른과 마님께서 오늘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하셨어요.”
“……오늘?”
“네. 정오까지 오라고 하셨어요.”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정오까지 네 시간 정도 남았지만, 바이올렛은 조금이라도 흠이 덜 잡히고 싶은 마음에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수도에서 있었던 일이 다 꿈인가 싶었다. 침대에서 내려서는데 몸이 무거웠다.
블루밍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아픈 걸 보니 어쩌면 정말 꾀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덫에 갇힌 짐승이 되어 날이 너무 좋은 날, 나갈 수 없는 하늘을 바라만 보는 기분이었다.
호텔에서는 무엇 하나 바라지 않아도 룰루가 다 해 주었지만 여기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다. 수면제를 삼키고 죽으려 들기 직전에는 너무 넋이 나가 있어 하녀들이 심술을 부리느라 구두를 가져다주지 않으면 신는 것을 잊고 온종일 맨발로 돌아다녔다.
바이올렛이 숨을 깊게 쉬고 어깨를 바르게 해 섰다. 그 뒤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때마침 앞에 플립이 서 있었다.
“저택까지 오시는 내내 구두를 신고 계셔서 혹시 피곤하실까 하여…….”
“아, 그럼 부탁하네.”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자 플립이 곧 미온수를 가지고 돌아왔다.
플립은 바이올렛의 슬리퍼를 매우 조심스럽게 벗긴 후 그녀가 딱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천천히 발등에 끼얹었다. 그는 수도에 있는 내내 바이올렛의 피로를 이렇게 풀어 주었으므로, 바이올렛은 그것에 익숙해졌다.
처음엔 민망했는지 후다닥 끝내 버리던 플립은 제 손에 점점 보들보들해지는 작은 마님의 발과 다정다감한 칭찬에 재미를 붙여 그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자려는…….”
문을 열고 들어서던 윈터가 말을 멈췄다.
이게 무슨 일인가, 그가 미간을 좁히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플립이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마사지를 하려 하자 윈터가 말했다.
“나가.”
“예? 하지만 아직…….”
“놓고 나가라고.”
윈터는 제가 몸이 바뀌었을 때 실수를 해도 아주 대단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았다.
다른 사내놈에게 제 아내 발끝 하나라도 만질 수 있는 물꼬를 터 준 것이다. 그것도 제 스스로.
바이올렛이 별수 없이 도중에 일어나는 플립에게 인사했다.
“고맙네, 플립.”
플립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침실을 나갔다.
바이올렛이 물기를 닦기 위해 수건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미 수도로 갔을 줄 알았어요.”
“……안 가서 다행이지.”
윈터는 당장 침실 안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싶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초에 플립에게 마사지를 부탁한 것은 몸이 바뀌었을 때의 자신이었다. 바이올렛도, 플립도 잘못한 게 없었다.
윈터가 씩씩거리며 분노를 가라앉히더니 바닥에 놓인 향유를 집어 들고 툴툴거렸다.
“어떻게 쓰는 거야, 이건.”
“뭐 하게요?”
바이올렛이 도무지 예상이 가지 않아 묻자 윈터가 미간을 좁히고 대답했다.
“내가 하려고.”
“뭘요?”
“플립을 쫓아내고 향유를 들었는데, 내가 달리 뭘 하겠어?”
“글쎄요?”
바이올렛이 여전히 감을 못 잡자 윈터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발 마사지해 준다고.”
“……누가요?”
“내가!”
윈터가 결국 답답함을 못 참고 소리를 쳤다.
이 쉬운 말이 뭐가 어렵다고 저렇게 못 알아들을까, 싶었다. 그제야 바이올렛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물었다.
“아, 이제 향유 사업도 하려는 건가요?”
“…….”
이 여자 눈엔 제 모든 행동이 돈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게 분명하다고, 윈터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모든 상황에서 사업 관련된 일이냐고 묻지는 않을 테니.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