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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0화 (20/176)
  • 20화

    “봐서.”

    의외로 윈터가 덤덤히 대꾸하자 바로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며 말을 꺼냈던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당신 말대로 굳이 내가 이 먼 거리를 오갈 이유가 없잖아. 바로 분가를 하는 건 어려울 거야. 블루밍가는 대대로 영지에 모여 살았으니. 그러니까 봐서.”

    그의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실감이 안 나서 오히려 가라앉은 듯이 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윈터가 불퉁하게 물었다.

    “진짜 좋은 거 맞아?”

    “맞아요. 많이.”

    “그럼 팔짝거리고 뛰어다니기라도 해. 이래선 진짜 좋은 건지 구분이 안 가니까.”

    “정말로 기뻐요.”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로, 정말로 몹시 기뻤다.

    “여전히 모르겠네. 진짜 좋은 건지 아닌 건지는 내가 알아서 구분해야겠군.”

    그의 농담 섞인 대답에 바이올렛이 이번엔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수도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블루밍 저택에서의 생활도 견딜 만할 것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았다.

    수도에 정착한다면 이 삶도 그럭저럭 살 만해질지 모르겠다고,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윈터가 계속해서 일에 미쳐 산다고 해도 수도에는 자신을 따돌리는 사람들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소중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몸이 바뀌기 시작한 이후부터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윈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면, 제가 좀 더 설득한다면 아이를 낳는 것을 수락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바이올렛은 블루밍 저택에서 나올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으로도 여러 가지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었다.

    *

    블루밍 영지로 향하던 기차가 잠시 멈춰 섰다.

    선로에 문제가 생겨 두 시간 정도 후에 다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기차는 완벽한 운송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고장이 잦았다. 그래도 두 시간 정도면 괜찮은 축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역 밖으로 나가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수도와 남부 지역 사이에는 계속해서 평야가 이어졌다. 그들이 내린 롱 리우드는 제법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 특히 근처 평야들의 농산물이 이곳으로 몰려 시장을 형성했으므로 많은 돈이 오가는 곳이기도 했다.

    바이올렛이 여름 녹색으로 물든 롱 리우드 평야를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녀가 윈터에게 말했다.

    “항상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뭐가?”

    “롱 리우드 평야요. 당신이 내 사유 재산으로 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두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윈터가 툴툴거렸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블루밍 저택으로 돌아가면 또다시 윈터가 수도로 떠날 것이고, 대화할 기회는 한동안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결혼식 끝나고, 당신이 떠난 후에 에쉬에게 들었어요. 2,400만 라크네 중에 저 롱 리우드 땅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한 돈도 끼어 있었다고. 그런데도 제 사유 재산을 마련해 준 거라고.”

    “그게 뭐. 그럼 공주님을 굶기기라도 하란 건가?”

    윈터가 반항하는 청소년처럼 굴자 바이올렛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도 고맙다는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팔짝팔짝 뛰어다녀 주세요.”

    윈터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그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받아들이도록 하지.”

    떠나기 전,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롱 리우드 평야를 돌아보았다.

    윈터는 그녀의 앞으로 500카타샨 넓이의 롱 리우드 평야를 재산으로 주었다. 그 땅을 팔면 30만 라크네에 해당하는 큰돈이 되었고, 중개인을 통해 소작을 주고 있는 지금도 매달 바이올렛이 사용하는 200라크네의 돈이 나왔다. 소박하게 생활하기에 부족한 돈은 아니어도 결코 저축은 할 수 없는 돈이었다.

    그럼에도 바이올렛은, 하물며 도망칠 생각을 할 때에도 저 땅을 팔아 버릴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가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팔지 않고 자신에게 준 땅 아닌가. 그에게 고스란히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재산을 나눴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강한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이올렛은 윈터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긴 시간 동안에도 그를 깊이 사랑했었다.

    *

    영지로 돌아와 짐을 풀자마자 윈터는 바로 마차에 올라타 제 부모에게로 향했다.

    공작 부부의 저택에 들어서니 그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티타임에 한창이었다.

    바이올렛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어도 그녀가 저택에 있을 때와 수도에 있을 때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차릴 것이다.

    윈터 역시 모를 수 없었다. 블루밍 저택을 나온 바이올렛은 여전히 지쳐 보였지만, 그런 중에도 생기가 있었다.

    하기야, 갑자기 제 고향 수도를 떠나 3년을 살았다.

    윈터는 몸이 바뀌고 아내가 남부에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녀왔니, 윈터?”

    캐서린이 반가워하며 일어서자 윈터가 인사만은 공손히 하고 난 후 입을 열었다.

    “분가를 할까, 합니다.”

    “분가라니?”

    “아무래도 영지에서 수도는 너무 멀어서요. 그쪽으로 아내와 자리를 잡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

    “바이올렛이 그러자고 했니?”

    캐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윈터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윈터. 지금도 널 자주 볼 수 없는데 분가까지 하면 영영 집에는 안 올 거 아니니.”

    “오히려 어머니가 부르실 때 올 거예요.”

    “내가 너한테 못해서 그러니?”

    “무슨 소리세요. 어머니는 언제나 잘해 주시죠.”

    “하지만 아무래도 친어머니처럼 느껴지진 않는 거겠지, 아직도…….”

    캐서린의 섭섭해하는 목소리에 윈터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려드는 기미를 보이자 제임스가 말했다.

    “분가는 좀 더 생각해 보거라.”

    그의 말에 캐서린이 동조했다.

    “그래. 좀 더 지나고 생각해 봐, 윈터. 아직 우리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단다.”

    “두 분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수도에 거처는 마련할 겁니다. 아내까지 저처럼 호텔을 전전할 순 없잖아요.”

    그 말에 캐서린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그게 뭐가 문제니? 보통 호텔도 아니고. 우리 아들이 세운 훌륭한 호텔인데.”

    “저야 평생 떠돌이니 괜찮지만 아내는 아니잖습니까? 손댈 수 없는 곳은 자기 집이 아니죠.”

    윈터가 슬슬 짜증낼 기미가 보였다. 그는 훌륭한 아들이었지만 그 불같은 성격을 항상 부모에게 감추는 것은 아니었다.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처 정도는 마련해 두는 게 좋지.”

    “예. 그럼 허락하신 줄 알겠습니다.”

    윈터가 말을 마친 뒤 마차로 돌아갔다.

    아들이 떠나자 블루밍 부부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윈터에게 디에브 이상으로 애정을 퍼부었다. 애정이 고프던 소년은 평생 경험한 적 없는 따듯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윈터 블루밍은 열두 살에도 매우 기민한 두뇌를 가졌음이 보였고, 냉정했으며, 돈을 버는 데 있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야망을 가졌었다. 그 소년이 추후에 성공을 거둘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자였으므로 이 가문을 물려줄 필요는 없었으니 부부에게 이보다 좋은 투자처는 없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윈터는 제 상황이 안정되자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신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로렌스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를 제외하곤 언제나 부모가 바라던 것처럼 블루밍 가문의 품격을 유지해 주었다. 심지어는 재산이 바닥났을 때도, 제가 굶더라도 다른 가족들의 생활비는 마련한 윈터였다. 그는 가족에게 강한 애착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 애착이 아내에게 향하는 것도 모자라 수도로 가겠다고 한다면 부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제임스가 일어나 카펫 위를 걸어 다니며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았잖소. 이제 와서 도대체 무슨 분가란 말이오?”

    “나도 모르겠어요.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바이올렛이 우리한테 들어가는 돈을 끊으라고 말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오?”

    두 사람 사이에 불안이 흘렀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두 사람을 옭매었다. 캐서린이 입을 열었다.

    “바이올렛은 제가 우리 아들과의 자식을 밸 수 없다는 걸 몰라요. 아마 윈터는 그 사실을 절대 바이올렛에게 말하지 않을 거예요.”

    제임스도 그 사실에 동조했다. 장래의 돈줄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는 해도 그들은 지난 15년간 윈터에게 많은 애정을 쏟았다. 아들이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내라는 걸 두 사람 다 잘 알고 있었다.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바이올렛이 알면 크게 화를 낼 일이죠. 당연히 이혼 사유이고…….”

    “그렇다면 그걸 이용해보는 것이 어떻소. 내 아는 사람이 있소.”

    제임스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

    부모에게 분가 이야기를 하고 난 뒤, 윈터는 곧장 바이올렛에게로 향했다.

    우선 수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주기적으로 시간을 보내자는 말을 전하기 위해 침실로 들어가 보니 바이올렛은 먼 길을 오는 것에 지쳤는지 침대에 파묻혀 잠들어 있었다.

    “하여튼 저 체력으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군.”

    윈터가 중얼거리곤 아내에게 눈을 못 뗀 채 한참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아내가 잠들었으니 그사이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윈터는 하녀를 시켜 바이올렛의 드레스 룸 문을 열게 했다.

    이곳으로 돌아오자마자 바이올렛은 어둡고 밋밋한 드레스 차림으로 돌아갔다. 수도에서는 밝고 화사한 옷을 즐기던 그녀가 왜 여기서는 저렇게 제 피부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만 골라 입는지 모를 일이었다.

    드레스 룸 안으로 들어선 윈터가 중얼거렸다.

    “서쪽의 마녀들도 이것보단 다양하게 입겠군.”

    굳이 이걸 왜 여러 벌 샀나 싶은 드레스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녀의 방에서 나온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아내는 사유 재산이 아니면 다른 건 건드리지 않아. 땅을 좀 더 사 주는 게 낫겠군.”

    “아무래도 말입니다, 대표님.”

    하옐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은 마님께서 혹시…… 헐값에 롱 리우드 땅을 빌려주고 계신 게 아닐까요?”

    “뭐?”

    “그렇잖습니까. 대표님이 결혼하실 때 작은 마님 사유 재산으로 혼전 계약서에 적은 땅의 넓이가 5,000카타샨이나 됩니다. 소작을 주면 아무리 호구를 잡혀도 달에 2,000라크네는 받을 수 있는 땅 아닙니까.”

    “그것밖에 안 돼?”

    “일단 대표님, 품위 유지로만 2,000라크네를 쓴다면 웬만한 귀부인 두 배이고요, ‘호구를 잡히면’이라고 말씀드렸고요.”

    하옐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웬만큼 호구를 잡히지 않고서야 그 질 좋은 땅을 가지고 이런 드레스들밖에 못 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공주님이시니 번거로워 소작을 줘도 매달 들어오는 것이 2,000라크네, 땅을 팔았다면 수도 없이 많은 드레스와 보석을 살 수 있는 돈이다.

    윈터가 혀를 차자 하옐이 물었다.

    “알아볼까요? 그 땅을 얼마에 소작을 주고 있는지.”

    “아내 앞으로 된 땅을 마음대로 알아볼 수 있나?”

    “돈으로 못 할 게 없죠. 게다가 중간에 중개인이 떼먹거나 했다면 어차피 족쳐서 알아내야 하는 일이고요.”

    윈터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알아봐.”

    “예.”

    하옐이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 나갔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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