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바이올렛은 제가 남편과의 내기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시작부터 상의를 탈의한 우락부락한 두 팀의 선수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오로지 완력만 가지고 겨루는 경기였다.
그때, 커다랗고 둥근 통을 목에 건 남자가 부부가 경기를 관람하던 창틀 앞에 멈춰 섰다.
“대표님, 누구한테 거실…… 아, 아이고!”
윈터의 옆에 앉은 바이올렛을 알아본 남자가 기겁을 해서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안절부절못하고 울상이 되어 윈터에게 물었다.
“무, 무, 무릎 꿇어야 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누구 앞이라고.”
윈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자 남자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놀란 바이올렛이 급히 일어나 남자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그럴 것 없소. 왕실은 해체된 지 3년이고, 해체되지 않았더라도…… 그냥 남편이 놀린 거라오.”
바이올렛의 말에 남자가 억울함과 공주님이 제 팔을 잡아 주셨다는 감격을 동시에 느끼며 일어섰다. 이어 남자가 모자를 벗어 손에 쥐며 윈터에게 우는소리를 했다.
“깜짝 놀랐잖습니까! 왜 놀리고 그러세요!”
“네놈이 멍청한 걸 누굴 탓해. 나는 다우저에게 걸지.”
윈터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며 말하자 남자가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판을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크랙 다우저’라고 적힌 선수의 이름 아래 윈터의 이름과 그가 건 돈의 액수를 적었다.
윈터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바이올렛에게 설명했다.
“우선 합법이고, 오늘 여기 있는 선수 중에 가장 먼저 피를 낼 선수에게 돈을 거는 거지.”
“말도 안 돼요. 나까지 놀리는 거죠?”
“어느 부분이 말이 안 돼?”
윈터가 오히려 되물었다.
바이올렛은 이게 농담이 아니란 사실에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저런 내기가 있는 것도 이상했고, 그게 합법이란 것도 믿기지 않았다.
돈 통을 멘 남자가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공주님께서는 어디 거실 건가요? 공주님께서 첫 번째로 돈을 건 선수는 평생 영광으로 여길 겁니다!”
“나는 다음번에 걸겠소.”
바이올렛이 거절하려 하자 윈터가 선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 경마는 해 봤지?”
“네. 아버지 따라서 한두 번.”
“선수들이 다 말이라고 생각해.”
“사람이에요.”
“그래도 말이라고 생각하고 골라. 당신에게 암말이 있다고 생각하고 종마 고르듯이 찬찬히 보라고.”
“윈터, 어떻게 그렇게 무례한 말을…….”
‘무례’라는 말을 이미 내뱉은 바이올렛이 뒤늦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윈터의 귀에 이미 들어갔는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고, 종마란 말에 낄낄거리던 남자는 ‘무례’란 말에 움찔해 웃음을 그쳤다.
윈터가 말했다.
“너무 쉽게 이겨서 미안해질 정도군.”
“하지만 방금 한 말은 너무 심했어요. 취소해 주세요.”
“취소하지. 그냥 당신이 무례하단 말을 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어.”
윈터가 달래듯 말하고 선수를 고르라는 듯 경기장을 턱짓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카이슬 선수들은 정말로 경주마 같았다. 윤기 흐르는 피부에, 덩치가 아주 크면서도 허투루 쓰는 근육이 없어 보였다.
바이올렛이 침착하게 살피다가 어느 한 선수를 가리켰다.
“저 선수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군요.”
“샌토르 탄이군요. 좋은 선택이십니다.”
판에 바이올렛의 이름이 적혔다.
그로부터 20분 정도 지났을 때, 경기장에서 주먹질에 피가 튀어 오르자 심판이 경기를 중단했다.
“샌토르다!”
누군가가 소리치니 관객들이 샌토르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기 중에 주먹질을 한 샌토르가 퇴장당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피 튀기는 경기장은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룰을 익히고 나니 조금씩 흥미가 생겼다. 자극적인 음식이 자꾸 당기는 것과 비슷한 기분으로 힐끔힐끔 보게 되는 것이었다. 3년간 두더지처럼 어둡고 조용한 곳에 살아서인지, 낯선 모든 것들이 흥미로웠다.
경기가 진행되는 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스석에 와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윈터는 이야기하던 중간에 종종 웃음을 터트렸는데, 바이올렛은 지난 3년간 윈터가 이렇게 소년처럼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제가 죽었다면, 그는 훨씬 더 자유로워졌을 텐데.
바이올렛은 몸이 바뀌었던 것은 윈터의 혈통 때문일 텐데도, 결과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란 게 이상했다.
*
두 사람이 호텔로 돌아와 목욕을 마친 것은 9시쯤이었다.
윈터는 다시 호텔 밖으로 나가 인근에 열린 야시장에서 좋아하는 크롤러 도넛 한 봉지를 샀다. 갓 만든 따끈따끈한 크롤러 도넛에는 설탕이 듬뿍 묻어 있었다.
“이것도 안 먹는 거 아냐? 좀 까다로우셔야지.”
윈터가 투덜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경기장에서 저녁 식사로 생선 튀김을 샀는데 바이올렛이 잘 먹지 못했다. 윈터가 좋아하는 음식이란 걸 눈치챘는지 열심히 먹어 주려고 애를 썼지만 접시에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윈터 역시 귀족들의 식사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올렛의 마음은 이해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잠옷 차림의 바이올렛이 나왔다.
아내는 혼자 있을 때도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을 만큼 우아했다.
차림새가 단정한 건 물론이거니와 테이블에 읽고 있던 신문 한 부와 차가 놓여 있었고, 예상대로 출출했는지 비스킷이 담긴 나무 바구니가 그 옆에 함께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윈터가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투린이 쓸데없이 떠드는 걸 들어 보니 로렌스 왕가는 이유식으로 캐비아를 먹이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어려서부터 온갖 음식에 익숙해진 바이올렛은 투린이 신경 쓴 부분을 정확히 알아냈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 덕에 요즘 투린의 직업 만족도는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정도로 상승했다.
그런 바이올렛에게 길거리에서 산 도넛을 주려고 했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문이 다시 열리더니 바이올렛이 윈터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 내가 뭐 실수했어요?”
바이올렛이 걱정스럽게 물어 와 윈터가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당신이 무슨 실수를 했겠어. 지적받을 건 내 행동들뿐이었겠지.”
“아…… 미안해요.”
화내러 온 게 아니었는데, 바이올렛은 제가 무례하다고 지적했던 것들에 대해 화를 낸다고 생각했는지 난처하게 사과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본 윈터가 그녀의 팔을 잡아 객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후 봉지를 내밀었다.
“출출해서 샀는데 너무 많더군.”
“그게 뭐예요?”
“이렇게 생긴 도넛 처음 봐?”
“네. 한 번도 안 먹어 봤어요.”
바이올렛이 봉투를 얼굴 가까이에 가져가 냄새를 맡고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냄새가 너무 좋네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두 사람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바이올렛은 설탕이 듬뿍 묻은 달콤한 도넛을 꺼내다가 테이블 위에 후두둑 떨어지는 설탕에 당황했다.
“어머…….”
“신경 쓰지 마. 원래 그렇게 먹는 거야.”
윈터의 말에 다소 안심한 바이올렛이 입을 약간 벌리고 끝만 조금 먹고 떨어졌다. 그러나 곧 윈터가 입을 크게 벌려 도넛을 베어 먹는 걸 보고 자기도 크게 입을 벌렸다. 우물거리던 바이올렛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세상에, 정말 맛있어요.”
아까 생선 튀김을 먹으며 ‘맛있네요.’ 하고 마치 만찬에 참석한 손님이 맛없는 음식 칭찬하듯 말하던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바이올렛은 금방 달콤하고 쫄깃쫄깃한 크롤러 하나를 다 먹어 치웠다. 그녀의 입가에 묻은 설탕을 본 윈터가 저도 모르게 픽 웃자 바이올렛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누가요?”
“여기 두 사람밖에 없는데 설마 내가 귀엽겠어?”
귀엽다는 말이 너무나 낯설어 바이올렛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워 전혀 귀여운 아이가 아니었고, 어른이 된 후에는 칭찬을 들을 일이 많지 않았다.
어느 부분이 귀여웠던 건가, 바이올렛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윈터는 뒤로 기대앉아 다른 의자에 발을 걸친 뒤 럼을 한 잔 마셨다. 그가 입을 열었다.
“하녀와 요리사가 마음에 든다면 블루밍 가문으로 데려가. 그 정도 거리는 갈 만큼 급여를 더 쳐줄 테니.”
“아뇨. 괜찮아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룰루와 투린은 수도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까지 자신과 나눠 주는 그들에게 블루밍 저택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종종 정신 나간 듯이 구는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비난하는 소리를 코앞에서 들으며 서 있던 티 파티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가 말을 돌리기 위해 윈터를 보았다.
“아, 대가로 입맞춤을 하기로 했죠. 지금 할까요?”
“그럴 생각으로 왔어.”
“그랬군요.”
바이올렛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윈터의 앞에 서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잡고 평소 하듯이 입술로 가볍게 윈터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됐나요?”
“전혀.”
“입맞춤이라고 했잖아요. 문제가 있나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신문을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바이올렛의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테이블 위에 앉혔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어 윈터를 올려다보았다.
“테이블 위에 앉으면 안 돼요.”
“입맞춤은 해도 돼.”
윈터가 테이블을 손으로 짚으며 몸을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윈터가 멈춰서 그녀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바로 입을 맞추지 않고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가만히 뜸을 들이는 건지…….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긴장해 몸을 조금씩 뒤로 기울였다. 그러자 윈터가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강하게 안아 가까이로 당겼다. 바이올렛은 너무 가까워진 윈터의 얼굴을 살며시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목구비와 목덜미, 체격은 이상하게도 바이올렛에게 위협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하게 했다.
그가 원하는 입맞춤은 도대체 뭘까, 그녀가 생각하는 순간 서로의 입술이 닿았다.
남편과는 아무래도 입 맞추는 방식조차 완벽히 다른 것 같았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