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윈터가 사라진 후에야 호텔에도, 바이올렛에게도 평화가 찾아왔다.
윈터는 이틀간 객실로 꽃을 보냈다. 무엇이든 과하게 하는 그는 꽃 선물도 과하게 했다.
바이올렛이 언제나처럼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침실에서 나오다가 한숨을 쉬었다. 응접실 바닥, 테이블, 창틀 할 것 없이 꽃으로 채워져 있었다.
“룰루, 이거 아무리 봐도 화내는 거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꽃을 사 달라고 했던 바이올렛의 말을 기억해서는 여기에 아주 꽃집을 차릴 모양새다. 꽃향기 때문에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어야 했다.
지나치긴 해도 바이올렛이 꽃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황당해하면서도 내내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꽃을 말리거나 새로운 꽃다발을 만들기도 하며 은근히 즐거운 이틀을 보냈다.
룰루가 하옐이 또 한바탕 사다 놓은 드레스를 하나씩 꺼내며 물었다.
“아무튼 오늘 두 분 데이트하신다면서요? 어디로 가실 거예요?”
“아는 곳이 없어서, 그 사람 자주 가는 곳 따라가기로 했네.”
데이트가 아닌, 상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보자는 협의였지만 부부 사이의 일을 전부 말할 필요는 없었다.
꽃집 같은 응접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사이, 호텔의 요리사인 투린과 블루밍 가문의 하인 플립이 들어왔다.
최상의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투린의 욕망 덕에 식재료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든 플립이 한숨을 쉬었다. 투린이 바구니에서 크림색의 버터를 꺼내 열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어렵게 공수한 홀린 대륙 중부의 실크 버터입니다. 그 맛이 실크처럼 부드럽다고 소문이 자자하죠. 자그마치 배를 타고 넘어온 이 위대한 버터를 봐 주십시오!”
투린 혼자 감동하는 사이, 룰루가 바이올렛에게 일러바쳤다.
“대표님께선 남부 사람이라 버터 들어간 음식을 안 좋아하시거든요. 저걸 사 보고 싶어 가지고 안달을 하더니 결국은 사 버렸네요.”
“버터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네. 그쪽 지역은 음식에 버터보다 오일을 더 많이 쓰니까요. 그런 것치고도 대표님이 유난히 버터를 안 좋아하세요.”
그러자 플립도 한마디 거들었다.
“육류보단 채소를 훨씬 좋아하시는데, 그것도 남부 특징인가요?”
그 말에 투린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남부 특징이 아니라 대표님께서 어린 시절 극빈층이셔서 육류를 접할 일이 없으셨기 때문이야. 유제품도 그래서 안 좋아하시는 거고.”
“그랬군요…….”
바이올렛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남편이 했던 말처럼, 남편이 자신에 대해 모르는 만큼 자신도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투린의 식재료 자랑이 길어졌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재킷을 두 손가락에 걸어 어깨에 걸친 윈터가 걸어 들어왔다.
“여기가 시장 바닥인 줄 알아?”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나가 보겠습니다!”
수다를 떨던 세 사람이 도망치듯 빠져나가자 윈터가 문을 잠그더니 가져온 재킷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친구 없다더니, 왜 수도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는 거지?”
“그래 보여요?”
바이올렛이 조금 반가워하며 물었다.
3년 내내 걸어도, 멈춰도, 웃어도, 울어도 비난을 듣던 것이 후유증을 남겼는지 드문드문 상대가 속으로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 거란 두려움에 휩싸였다.
윈터가 여전히 구겨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 아내니까 직원들한테 불편한 존재일 텐데도 굳이 여길 찾아와서 떠들어 대잖아. 당연히 당신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거지.”
“식재료 소개랑 옷 고르는 게 재미있어서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아, 저 세 사람이 만장일치로 저 옷을 골랐어요. 곧 갈아입고 올게요.”
바이올렛이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얇은 여름 미니 드레스를 꺼내 들어 보였다.
그 후, 미니 드레스를 가지고 들어가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입기 편한 형태라 혼자서도 금방이었다. 어깨가 얇은 끈으로 되어 있고, 세로로 주름이 있는 하얀 모슬린에 허리 리본은 하늘색이었다.
그녀가 손에 리본을 들고 걸어 나오자 윈터가 다가와 그녀의 허리에 반듯하게 리본을 감아 묶었다. 그사이 바이올렛이 전신 거울로 윈터와 제 모습을 보았다. 윈터의 키가 크다는 건 알았지만 거울로 보니 정말, 많이 차이가 났다. 그녀가 거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엘리도 올까요? 그 애가 경기장에서 당신을 자주 만난다던데.”
“오겠지. 경기장에 살다시피 하니까.”
“친한가 봐요.”
“별로.”
엘리는 바이올렛의 사촌 아리엘라 로렌스를 말했다. 별로,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부르는 애칭을 아는 걸 보니 아주 안 친한 것 같지도 않았다. 지난번에 아리엘라가 둘이 대화가 잘 통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바이올렛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
아리엘라에 대한 생각은 카이슬 경기장 VIP 박스석에 들어서는 순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아래에서 몸을 푸는 선수들을 본 바이올렛이 충격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선수들이 전부 상의를 탈의하고 있었다. 여름 햇빛에 우람한 상체 근육이 보석처럼 번쩍였다.
바이올렛이 즐기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유니폼을 착의하고 유유자적 말을 타는 스포츠와는 완전히 다른 스포츠였다.
바이올렛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에 윈터가 부채를 잡아 내리며 짓궂게 말했다.
“봐. 다른 남자 몸 구경한다고 질투 안 할 테니까.”
“안 하는 거 알아요. 제가 보고 싶지 않아요.”
그사이 박스석을 전담하는 직원들이 맥주병이 가득 담긴 아이스 버킷을 가져왔다. 윈터가 맥주병 하나를 꺼내 박스석 정면의 창틀에 대고 확 당겨 뚜껑을 열고 바이올렛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난처하게 물었다.
“병을 들고 그냥 마셔요?”
“네, 공주님. 그대로 드시면 됩니다.”
윈터가 깍듯이 말하며 놀리자 바이올렛이 그를 흘기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생각보다 이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윈터가 창틀에 구두 신은 두 발을 올릴 땐 좀 충격이었지만.
그는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싸구려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러고는 거기서 꺼낸 담배 한 대를 오른손으로 피우며 등받이에 기대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앉았다. 바이올렛은 살면서 저렇게까지 모든 행동이 삐딱한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제가 지금까지 봐 온 반듯한 정장 차림의 명문가 사내는 어디 가고 이런 예의 없는 남자만이 남았다.
윈터가 지금까지 제 앞에서 보인 모습들은 전부 가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장에 넥타이를 하고 식탁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식사를 하던 그의 모든 ‘귀족적’인 행동은 매 순간 신경 써가며 고생스럽게 만들어낸 모습이 아니었을지.
바이올렛이 손을 내밀었다.
“하나 피워 봐도 돼요? 그 담배.”
“안 돼. 질이 안 좋아.”
“당신에 대해서 알아보라면서요.”
윈터가 쯧 소리가 나게 혀를 차고 담배 한 대를 꺼내 내밀었다.
그때, 열린 창틀 너머에서 아리엘라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윈터, 여기서…… 바, 바이올렛?”
그녀는 이미 꽤 많이 취한 것 같았다. 그녀가 창틀에 털썩 앉아 의외라는 듯 두 사람을 보았다.
“웬일이야? 부부가 같이 다 오고.”
바이올렛이 무심코 윈터를 보았다. 그가 대꾸했다.
“데이트.”
“뭐야, 무슨 데이트하는 부부가 그렇게 서먹서먹해? 하여튼 바이올렛이 좀 뻣뻣한 편이지. 어릴 때도 그랬어. 모범적이고 재미없고…….”
아리엘라가 말을 하는 도중에 윈터가 바이올렛의 허리를 안아 들더니 제 무릎에 격자로 앉혔다. 바이올렛이 균형을 못 잡고 그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며 놀란 눈으로 윈터를 보았다.
“미, 미쳤어요?”
“데이트 같지가 않다잖아. 그보다 내 아내가 미쳤냐는 소리도 할 줄 아네. 쓰레기 같은 우리 팀이 이기는 것만큼 기적이군.”
아리엘라가 멈칫하며 그 모습을 보더니 손을 흔들고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윈터가 한숨을 쉬며 바이올렛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 애 좀 어떻게 해 봐. 당신 사촌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바이올렛은 제게 기댄 윈터의 머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윈터가 확 고개를 들어 불만스럽게 물었다.
“바이올렛, 내 말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정말…… 엘리와 안 친하네요, 당신.”
“친해야 돼?”
윈터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당장 소리칠 것 같아 바이올렛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리엘라와 바람을 피우고 있을 거라 반쯤은 확신했던 제가 우스워졌다. 아리엘라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접근하려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촌인 아리엘라는 어릴 때부터 늘 바이올렛의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무엇이든 자기도 똑같은 걸 가지고 싶어 했고, 더 나은 걸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러다 아리엘라는 자신이 바이올렛보다 나은 한 가지를 발견했는데, 그게 자유였다.
바이올렛은 발레를 아무리 좋아해도 발레리나가 될 수 없었고, 꽃을 아무리 좋아해도 정원사가 될 수 없었다. 그녀의 직책은 언제나 라크라운드 왕실의 유일한 왕녀 전하여야만 했다.
아리엘라는 모르겠지만, 바이올렛은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언제나 질투를 느꼈다.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아닌 아리엘라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여전히 제가 이런 오해를 한 데에는 대화를 하지 않으려 들었던 윈터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아리엘라에게 한 그의 대응은 솔직히 아주 조금, 시원했다.
아리엘라가 떠났으니 무릎에서 내려가려는데 윈터가 붙잡고 내려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매끈한 두 다리를 손으로 감싸 자기 쪽으로 바짝 당겼다. 그녀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윈터를 바라보았다.
“내려 줘요, 그만 무례하게 굴고.”
“오늘 당신에게 무례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을지 궁금하군.”
“이제 더 이상 안 할게요.”
“내기하자. 한 번이라도 더 하면 어떡할래?”
내기가 일상인 윈터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묻자 바이올렛이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
“좋아요. 뭘 걸건데요?”
“앞으로 세 번. 연달아서 당신이 오라는 파티는 어디든 가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옆에만 있는 걸로.”
“……거짓말.”
“진짜야.”
윈터가 의외로 제법 쓸 만한 것을 내기에 걸었다. 생각보다 탐나는 상품에 바이올렛이 고민했다.
“난 걸 만한 게 없어요.”
“몸이 바뀌는 법은 당신만 알잖아. 종종 당신의 우아함이 필요한 곳이 있어.”
“그랬군요.”
몸이 바뀌는 게 그에게 필요할 때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바이올렛은 제 목숨에 여전히 큰 미련이 없었고, 혹시 제대로 몸이 바뀌지 않아 그대로 죽는다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필요하죠?”
“그렇게 간단히 되는 일이었어?”
“쉬워요.”
“그럼 그냥 방법을 알려 주지?”
“필요하면 스스로 알아내요.”
바이올렛이 그렇게 말하고는 그제야 놓아주는 윈터에게서 벗어났다.
그녀가 옆에 앉자 윈터가 슬쩍 진짜로 가지고 싶은 것을 말했다.
“내기에 입맞춤을 걸기도 하더군.”
“내 입맞춤보단 필요할 때 몸을 바꾸는 게 소용이 있잖아요.”
“그렇게까지 필요하지도 않아. 입맞춤을 걸어. 한 번, 내가 만족할 때까지. 어차피 당신이 조심하면 이기는 내기잖아. 뭘 걸어도 당신이 유리해.”
“그건 그러네요. 내기해요, 그럼.”
바이올렛은 어차피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고, 져도 입술 잠깐 맞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사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