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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6화 (16/176)
  • 16화

    윈터 블루밍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가족에 대한 애착이 큰 남자였다.

    통계적으로 은발과 회색 눈 중 하나만을 물려받아 태어난 카닉 일족 혼혈들은 반드시 같은 카닉 일족의 피가 섞인 이성과만 임신이 가능했다.

    하옐을 시켜 굳이 재조사까지 했는데 마찬가지였다. 은발과 회색 눈을 둘 다 가진 카닉 일족들은 누구와 만나도 아이가 태어났지만, 회색 눈만 가진 자들과 카닉 일족의 피가 없는 이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카닉 일족은 과거에 다른 대륙의 극북(極北)에 산 모양이었다. 지리적으로 매우 폐쇄적이라 외부인을 아예 만나지 않은 상태로 오랜 세월 살아왔기에 이러한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라크라운드에 이방인이 자리 잡은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므로 차별이 있다고 해도 많은 가문에 섞여 들어갔다.

    그러나 만약 세상에 단 한 명, 절대로 카닉 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여자를 뽑으라고 한다면 그건 단연 그의 아내 바이올렛이었다.

    라크라운드 왕실의 순혈 공주님.

    혈맥 어디에도 비천한 이방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그녀만큼은 이 더러운 피에서 안전하셨을 거라는 말이었다.

    지난 3년간 피임 한 번 없이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이 그 명백한 증거였다.

    이혼 이야기까지 나온 마당에, 윈터는 더더욱 이 사실을 아내에게 알릴 생각이 없어졌다.

    *

    냉큼 침실로 달려 들어온 룰루는 초조한 얼굴로 빗질을 반복하는 바이올렛에게 이르듯이 말했다.

    “아이고, 작은 마님! 대표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6시부터 저러고 앉아서 사람들 다 불안하게 하는데 아주 미치겠어요.”

    “왜 갑자기 저렇게 안 하던 짓을 할까?”

    바이올렛 역시 영문을 몰라 하며 빗질을 하는 사이, 룰루가 침실에 작게 붙어 있는 드레스 룸 문을 열며 물었다.

    “옷 갈아입고 나가실래요?”

    “화낼 것 같으니 그냥 나가겠네.”

    “복 받으실 거예요, 작은 마님…….”

    수장이 내내 호텔에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은 진이 빠졌다. 어제부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바이올렛의 객실 응접실에 앉아 표정만 구기고 기다리고 있으니 다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룰루가 서둘러 실크로 된 가운을 가져다 그녀에게 걸쳐 주었다.

    바이올렛이 가운을 여미며 침실을 나서 윈터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들이켜는 윈터를 본 바이올렛이 손잡이에 구부린 손가락을 건 그를 따라 검지를 구부려 보이며 말했다.

    “고리에 그렇게 손가락을 걸면 안 돼요.”

    “그럼 이 손잡이는 뭐하러 있어?”

    그러자 바이올렛이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손잡이 밖을 잡아 들었다.

    “걸어서 들지 말고 이렇게 잡아서 들라고 있나 봐요.”

    “내가 말했나? 귀족들은 쉬운 일을 어렵게 골라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고.”

    “처음 듣네요.”

    “어쩐지 차를 마시기만 하면 날 구경거리로 보더라니.”

    바이올렛이 말해 줘서 다행이었다. 윈터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연습하는 사이, 룰루가 식사 거리를 가져왔다. 룰루가 떠난 후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이야기 좀 하자며, 항상.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하고 싶은지 들어나 보려고.”

    이혼 이야기가 나오고 제가 외박을 감행한 후에야 이야기를 하잔다. 바이올렛이 씁쓸히 대답했다.

    “참 늦게도 듣고 싶어지네요.”

    “이제라도 하자는데 왜 이렇게 비뚤게 나와?”

    “우리가 몸이 바뀌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어차피 이제 슬슬 쉴 생각이었어.”

    “세상엔 타이밍이란 게 있잖아요.”

    윈터가 혀를 찼다. 그러고는 이내 차에 설탕을 들이부은 후 티스푼으로 마구 휘저은 뒤에 물었다.

    “몸 바뀌는 건 무슨 수를 쓴 거지?”

    “말 안 할래요. 저도 무기 하나는 있어야죠.”

    바이올렛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말하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아이는 왜 싫어요?”

    “나중에. 당신이 이혼할 마음이 사라지면 그때 얘기하지.”

    “아이가 있어야 이혼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은데요.”

    내내 바이올렛이 부정적으로 나오자 윈터가 성질이 났는지 툭 참아 오던 말을 내뱉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잠자리를 해서는 아이가 생길 것 같지 않던데.”

    이번엔 바이올렛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문제라도 있나요?”

    “당신네 집안에서 도대체 뭘 가르쳤는지 모르지만 옷도 다 벗으면 안 된다, 소리도 내면 안 된다, 만지지도 마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순진한 아가씨 속여 먹은 거 아냐?”

    “그게 무슨…….”

    바이올렛이 너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는 듯이 윈터를 보았다.

    “블루밍 가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우리 집안은 애초에 잠자리에 대해서 교육씩이나 하지 않던데.”

    “지금 로렌스 가문을 모욕하는 거예요?”

    “아, 그렇게 되나. 그거 미안하군.”

    ‘망할, 예쁘지만 않았으면…….’

    로렌스 가문 식의 성교육에 대해 미리 알았다면 윈터는 애초에 이 결혼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잠자리에서 옷을 다 벗지 않는 건 물론이고, 가슴이나 엉덩이는커녕 다리도 맘껏 만질 수 없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 결혼식장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똑바로 바라보고 싶어 하던 블루 다이아몬드 같은 그 눈동자와 뭐가 그렇게 신기했는지 조금 열려 있던 분홍색 입술. 맑고, 투명하고, 그럼에도 선명한 아내의 얼굴을 보면 윈터의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참을성이 되돌아왔다.

    작위가 날아가고 재산도 날아가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데다 잠자리는 고문과 같았음에도 그녀와 결혼한 것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말간 얼굴에 못마땅함이 차오르자 윈터가 억울함을 못 참고 투덜거렸다.

    “그런 상종 못 할 이상 성욕자 보듯 하지 마. 어차피 이번 달도 최대한 몸이 닿지 않게 노력할 테니까. 내 입장에선 그게 더 이상 성욕자 같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그러지. 하지만 다음에 꼭 해 줬으면 하네.”

    바이올렛은 윈터가 왜 저렇게 억울해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동안 궁금했던 게 있긴 했어요. 당신에게 묻고 싶었던 거.”

    “그래, 이제야 좀 대화가 되겠군.”

    그런데 정작 알고 싶은 것이 있다던 바이올렛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윈터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왜, 얼마나 어려운 말을 하려고 그래?”

    “궁금한 건.”

    빛이 바랜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윈터에게 닿았다. 바이올렛이 찻잔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당신한테 난 그런 거죠? 비싸게 주고 샀는데 못 쓸 물건.”

    “……뭐?”

    잘못 사들인 물건. 집에 가져와 봤더니 우리 집이랑 너무 안 어울려서 창고에 처박아 둔 골동품 같은. 볼 때마다 화는 나는데, 그런데 버리기에는 들인 돈이 아까워서, 그래서 못 버리는 그런 물건.

    “저 같아도 쉽게는 못 버릴 것 같아요. 그래서 늘 당신에게 미안했어요. 그런데 그럼 나는 뭐가 되나. 쓸모는 없고, 그런데도 버려지지도 못하는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이올렛은 제 처지가 우습고, 한심했다.

    3년 내내 제 방, 5층 침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구석에 처박힌 2,400만 라크네짜리 잘못 산 물건이 되어 그냥 가만히, 죽은 듯이, 장식품처럼 살았다. 그러다 가끔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하면 화가 나서 발로 한 번 툭 차고 지나가는 그런.

    그런 3년.

    그러니까 그동안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말은 그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건지.

    나를 잘못 사들인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지 못하고 3년이 지나자 지금은 그저 지쳐서 빨리 포기하고 버려 줬으면 하는 마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건, 당신이 언제쯤 나를 버려 주려나 하는 거예요. 당신도 당신 사랑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게 언제쯤이면 될지.”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 끝에 침묵이 흘렀다. 여름의 바람 소리만 한동안 공간을 채웠다. 한참 후, 윈터가 물었다.

    “말 다 했어?”

    “어느 정도는요.”

    “비꼰 건데.”

    “…….”

    윈터는 바이올렛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은 필사적이었다.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많은 사랑을 주었다.

    제가 아내에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돌겠군.”

    그는 제 험악해진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윈터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에 스물일곱이 되는 사이 단단히 굳어진 고정관념을 깨야만 했다.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버리거나 할 생각이 없고, 당신도 나를 떠나면 안 돼.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나도 해결 방안을 찾도록 노력하지.”

    “무슨 노력을 해요?”

    여전히 비협조적인 그녀의 질문에 윈터가 골치가 아픈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걸 알면 내가 여기까지 몰렸겠어? 난 돈으로 해결하는 것밖에 못 해. 평생 그래 왔으니까.”

    “도대체 당신이 돈이 얼마나 많다고 그렇게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그녀가 모르는 소리를 하자 윈터가 얼굴을 감싸 쥐었던 손을 내리고 기가 차다는 듯이 아내를 보았다.

    “나한테 관심이 전혀 없군.”

    “그렇지 않아요.”

    “웃기지 마. 나에게서 재산을 빼면 뭐가 남아.”

    윈터가 투덜거리며 걸어와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 일으키더니 창가로 끌고 갔다.

    고층의 창으로는 왕성의 일부와 레클 강 하구의 섬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윈터는 제 커다란 손으로 바이올렛의 손을 움켜쥐고, 그녀의 검지 아래로 손가락을 넣어 펴서는 창문 중앙에 가로선을 그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네.”

    “내 거야.”

    바이올렛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윈터를 보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져 바이올렛이 놀란 듯 뒤로 물러섰다.

    공허하던 아까의 눈동자를 보다가 지금 당황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을 보니 윈터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가 제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바이올렛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바이올렛은 자신을 노려보는 윈터의 회색 눈동자가 바짝 날이 선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이혼하려면 돈을 갚고 어쩌고 해서 그런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시나 본데, 이혼하자는데 네네, 거리고 있을 머저리가 어디 있어?”

    “…….”

    “난 당신처럼 고상하게 말 못 해. 몰랐다면 당신도 나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거지. 그래, 원하면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볼 테니까 당신도 나에게 익숙해져 봐. 사람 미치게 만들지 말고.”

    그는 제 손아귀에 있던 바이올렛의 손을 가까스로 놓았다. 그러더니 돌아서서 객실을 나갔다.

    바이올렛은 어쩐지 진이 빠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이올렛은 당혹감 때문에 온몸을 진탕으로 끌어당기던 우울감에서 완벽히 벗어났다.

    다만 도저히 남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을 자신을 버려 달라는 말이 왜 이렇게까지 그를 화나게 하는 건지.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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