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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5화 (15/176)
  • 15화

    “망가졌네.”

    지난 새벽. 윈터는 바이올렛이 이 시간까지 안 들어왔을 리 없다고 확신하며 초록색으로 고정된 표시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때렸다. 그러다가 성질을 못 참고 그 옆에 있는 벨을 쾅쾅 두들겼다.

    그 바람에 객실 바로 옆에 마련된 방에서 자던 룰루가 기겁을 해서 뛰쳐나왔다.

    “어디 불이라도 난…… 대표님?”

    룰루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벨을 눌러 대는 윈터를 보았다. 그러자 윈터가 표시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설부 불러서 당장 고치라고 해.”

    “예? 말짱한데요.”

    “이거 안 보여? 외출 중이라잖아.”

    “맞아요. 작은 마님께서는 오늘 안 들어오셨거든요.”

    “뭐?”

    “놀러 가신다더니 무척 재밌으셨는지 연락도 없으시네요.”

    “……연락이 없어?”

    얼굴이 새하얘진 윈터가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놀러 간 거 맞아? 확실해?”

    “확실해요! 주방장이 디저트를 엄청 만들어 놔서 나눠 드실 거라면서 챙겨 나가셨어요.”

    “내 아내는 3년 내내 집 안으로도 사람을 안 부르던 여자야. 놀러 나간 것도 모자라서 외박을 한다고? 바이올렛이? 연락이 안 왔으면 무사한지 확인을 했어야지!”

    구겨진 윈터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룰루가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 손주를 본 룰루 역시 이 호텔에서 온갖 진상을 마주하며 잔뼈가 굵어진 사람이었다. 그녀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물가에 애 내놓은 것도 아니고 화원에서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요? 날도 좋은데 좀 놀러 갈 수도 있지! 대표님은 맨날 수도에 사시면서 겨우 하루 안 들어오는 걸로 그러세요, 왜?”

    룰루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기 싫어하는 윈터는 목까지 욕설이 차올랐으나 바이올렛이 룰루를 좋아하는 게 보여 차마 내뱉진 못했다. 윈터가 최선을 다해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짧은 티 파티도 치를 떨고 싫어하는 사람이 밤새워서 놀고 있을 리가 있냐는 거지, 내 말은.”

    “작은 마님이 사람 모여 있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티 파티를 싫어하신다는 거예요? 잘못 아신 거 아니에요?”

    “3년을 산 내가 더 잘 알아. 아무튼 열쇠나 내놔.”

    윈터가 열쇠를 뺏듯이 쥐어 바이올렛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느 때의 바이올렛처럼 단정한 방이 나왔다. 룰루가 이 호텔의 온갖 좋은 방은 다 보여 줬을 텐데 굳이 작고 별 볼 일 없는 이 방을 고르는 그 취향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윈터는 응접실 의자에 앉아 객실 문을 바라보며 바이올렛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놀다가 늦어서 자고 오기로 한 거라면 내일 아침이면 올 테지. 몇 시간 뒤면 그녀가 말짱히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듯이,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으면 이렇게 겁이 나지 않았을 텐데…….

    그는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윈터는 아침에는 오겠지, 점심에는, 설마 저녁 먹기 전에는 오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도 바이올렛이 오지 않자 혹시 그녀가 어떻게 된 건 아닌가, 겁을 내다 결국 바이올렛이 놀러 갔다는 오겔 화원으로 연락했다.

    바이올렛이 거기 있다는 이야기에 안심하긴 했는데, 그래도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일을 해 보려고 해도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

    블루밍 가문에서 윈터를 받아 주어 살게 되었을 때, 그는 1년 정도는 드문드문 제가 하인으로 일하던 식당 주인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가는 꿈을 꾸었다.

    연관성은 모르겠지만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내내 그 악몽을 꾸는 기분과 똑같았다. 아내가 하루 사라진 걸로 열두 살짜리 꼬마가 부모를 잃는 악몽을 꾼 것과 비교하다니, 아무래도 제가 지나치게 안이해진 모양이었다.

    정작 엔나의 저택에 와 보니 아내는 말짱한 얼굴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살면서 아내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워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동시에 제게 이렇게 큰 공포를 느끼게 한 그녀가 미워졌다. 세상에 누가 연락도 없이 이렇게 늦는단 말인가? 기다리는 사람은 어떻게 하라는…….

    적반하장으로 생각하던 윈터가 슬슬 기시감을 느끼고 있을 때, 엔나가 와인을 가져와 두 사람에게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이렇게 좋은 와인들을 받아도 되나 모르겠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까요.”

    “무슨 소릴. 바이올렛의 남편이면 언제나 내 손님이지. 게다가 이런 와인을 들고 온 손님이면 자던 중에도 달려 나올 거요.”

    엔나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하고 떠나자 바이올렛이 와인 잔을 바라보며 윈터에게 물었다.

    “이게 그렇게 좋은 와인이에요? 자다 깨서도 반길 만큼?”

    “좋기도 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와인이지.”

    “그랬구나……. 몰랐어요.”

    “공주님께서 웬일로 모르는 게 다 있군.”

    “전 이상하게 레드 와인을 마시면 잘 취해서. 거의 안 마셔요.”

    바이올렛이 향을 먼저 맡고 와인을 홀짝홀짝 넘겼다.

    “아, 향이 정말 좋네요. 달콤하기도 하고…….”

    “잘 취한다며.”

    “당신이랑 같이 돌아갈 거니까요.”

    바이올렛이 무심코 말해 놓고 멈칫하더니 윈터를 보았다.

    “아, 혹시 바로 가야 해요?”

    “…….”

    “너무 늦었는데 내일 하는 건 어때요? 와인이 달아요. 한 잔만 다 마시고 가면 좋겠어요.”

    바이올렛이 와인 핑계를 댔다. 제가 머물러 달라고 하면 머물러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윈터가 입을 열었다.

    “……안 가. 더 마셔.”

    “그래요? 별일이네요.”

    바이올렛이 안심하며 다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윈터의 팔을 잡아끌었다.

    “인사하러 가요.”

    윈터는 결혼 후 처음으로 바이올렛에게 이끌려 다니며 만찬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 바퀴를 쭉 돌고 났을 땐 바이올렛의 잔이 비어 있었다. 한 잔으로 뺨이 발그레한 걸 보니 정말로 레드 와인에 잘 취하는 모양이었다.

    만찬은 밤새도록 이어질 분위기였지만 부부는 두 시간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일찍 저택을 나왔다. 엔나와 샤론이 붙잡았지만 또 오겠다는 말로 달래니 시무룩하게 두 사람을 놓아주었다.

    마차로 향하는 바이올렛은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걸어가던 그녀가 휘청거리자 윈터가 서둘러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제 쪽으로 몸을 돌려 보니 뺨에 술기운이 복숭아처럼 피어 있고 말간 두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그녀가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해 보고 싶었어요.”

    “……뭘?”

    “사람들한테 남편 소개하는 거. 해 보니까 좋네요.”

    윈터는 고작 파티 한 번 함께해 준 것으로 아내가 이렇게 행복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제가 중간에 가 버릴까 자꾸 신경 쓰는 아내가 윈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마차에 탄 바이올렛은 졸음이 쏟아져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 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나 곧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신경 쓰여 눈을 뜨고 윈터를 보았다.

    “어제 파티 준비하느라 잠을 잘 못 자서 피곤하네요.”

    윈터가 바이올렛의 머리를 감싸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두 시간을 이렇게 어떻게 가. 그냥 자.”

    그의 행동에 바이올렛의 눈이 다시 뜨였다.

    평소 안 하던 그의 행동이 이어지자 잠이 확 깨 버렸다.

    망설이던 바이올렛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윈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윈터를 보았다.

    “윈터. 이번엔 정말 얘기 좀 해요.”

    “이혼 얘기라면 대답했잖아. 안 된다고.”

    “이혼이 안 된다면…… 아이에 대해서 얘기해요.”

    “…….”

    죽음이라는 출로가 막혔을 때 그녀는 떠나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웬만해서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라크라운드 왕실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결혼을 유지하려면 우선 이 두 가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도로의 분가와 아이였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손을 당겨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바쁜 건 아는데. 그래도 이제는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 필요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윈터의 손이 빠져나갔다.

    “생각 없어.”

    그가 이 대화를 끝내자는 듯이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이올렛이 그의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에요? 생각 없다는 게.”

    “아이. 필요 없다고, 전혀.”

    “……그게 다예요?”

    윈터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바이올렛은 물끄러미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대화를 피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별말 없이 반대쪽 창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군요. 이제 알았네요.”

    그리고 마차 안에는 더 이상 대화가 없었다.

    호텔에 도착할 즈음, 윈터는 바이올렛 쪽을 보았다. 그녀는 술이 깼는지 꼼짝도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윈터는 지금 바이올렛이 말하는 것이 이혼을 대신하는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알기 때문에 속이 탔지만 그는 아이에 대한 것만은 여지를 줄 수 없었다.

    그게, 그에게는 불가능했다.

    *

    바이올렛은 아침 늦은 시간에 눈을 떴다.

    기억이 끊기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많이 피곤했던 탓에 마차에서 내려 호텔에 들어온 것과 부축하려는 윈터를 밀쳐 낸 기억이 어렴풋했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는데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지나치게 밝았다.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리다가 11시를 넘긴 시계를 발견하고 기겁을 해서 일어났다.

    “루, 룰루? 왜 안 깨워 준…….”

    서둘러 일어난 그녀는 열린 침실 문 너머로 보이는 남편의 모습에 멈춰 섰다. 윈터가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차를 우리다가 바이올렛 쪽을 보았다.

    “내가 깨우지 말라고 했어. 설마 이 시간까지 잘 줄은 몰랐거든.”

    “거기서…… 뭐 해요?”

    “시간 내잖아.”

    “……네?”

    “이리 와. 식사하게. 굶어 죽기 직전이니까.”

    바이올렛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걸어 나가려다 힐끔 거울을 보고 놀라서 침실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급한 성질을 있는 대로 죽이고 있던 윈터가 구겨진 표정으로 걸어와 문을 열어젖혔다.

    “설마 더 자려는 건 아니겠지. 겨울잠 자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산발이네. 자르길 잘했어.”

    “내가 말을 끝내게 좀 내버려 둘래요?”

    견디다 못한 바이올렛이 따지듯 말하자 윈터가 팔짱을 끼고 언제나 그랬듯 짜증이 묻어나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해 봐, 어디.”

    “머리가 산발이니까 나가 줘요.”

    “싫어.”

    “그리고 전 당신처럼 아침 식사에서 삶은 채소를 먹지 않는데요.”

    “뭘 먹는데?”

    “구운 빵과 잼이요.”

    “아침부터 단 게 들어간다고?”

    “커피보다 많은 설탕을 부어 먹는 당신이 할 말은 아니죠.”

    “어쩐지 몸이 바뀌면 내주는 커피마다 맹탕이더라. 당신 입맛이 문제였군.”

    “내가 문제라고요?”

    바이올렛이 기가 차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윈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다.

    “그걸 이제 알았나 보군. 그럼 실컷 빗질하고 나와. 어차피 너무 굶어서 이젠 배고픔이 느껴지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비꼬던 윈터가 침실 문을 닫았다.

    바이올렛은 황당함이 물든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제 술 취해서 제가 헛소리라도 한 걸까?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기껏해야 아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자는 정도뿐이었다.

    예전에도 바이올렛이 몇 번 시도해 본 대화였고 남편이 언제나 나중에, 라며 미루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이가 필요 없다는 말이 상처이긴 했지만 평소 남편에게 외면당하며 느끼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 와서 저렇게 아침 식사씩이나 하겠다며 시간을 낼 정도로 큰일은 아니란 의미였다.

    “무슨 수작일까…….”

    그가 이유 없이 이렇게 시간을 낼 리 없었다.

    분명히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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