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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4화 (14/176)

14화

“샤론의 말을 들어 보니 윈터 경께서 너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더구나.”

늦은 밤, 모두가 잠들고 나서까지 바이올렛과 함께 내일 사용할 장식들을 만들던 엔나가 말했다.

샤론은 이미 소파에서 어린아이처럼 잠들어 있었고, 두 사람은 넓은 나무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바이올렛이 손에 쥔 리본에 시선을 두고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다소 굳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엔나가 말을 이었다.

“남부 생활이 많이 힘드니?”

그러자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좋아하는 돈을 날리고 아무것도 못 얻은 남편이 가엽기도 하고…… 에쉬의 말처럼 그냥 제가 견뎠어야 하는 일을 못 견디겠다고 이기적으로 구는 건가 싶기도 해요.”

“으음, 너의 오빠라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에쉬 로렌스는 기회주의자야. 그런 작자의 말은 마음에 담아 둘 가치가 없지.”

“하, 할머니?”

바이올렛이 놀란 표정을 짓자 엔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떠니? 난 이미 두려울 게 없는 나이야. 두려운 게 하나 있다면 내 손주들과 네가 살아야 할 세상에서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기회를 잡는 일이지.”

“…….”

퉁명스레 말하던 엔나가 작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녹색 리본으로 묶어 만든 다발을 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 정말 근사하구나.”

바이올렛 역시 완성한 다발을 바라보았다. 엔나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어휴, 피곤해라. 난 이만 들어가마.”

“아, 네. 먼저 주무세요.”

“그리고 바이올렛, 힘들면 언제든 여기로 오렴. 너 하나 돌봐 줄 여력은 있단다, 내가.”

엔나의 말에 바이올렛의 얼굴에 여름에 핀 꽃 같은 활력이 번졌다. 그녀가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럴게요.”

*

윈터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대표실을 나왔다. 하옐이 하품을 하며 윈터를 배웅했다.

“회사에서 안 주무시고요?”

“아내가 수도에 있잖아.”

“이혼 얘기 때문에요? 새벽 2시에 집에 가면 좀 나을 것 같으세요?”

“기어오르지 마.”

“저라도 입바른 소리 해야지, 누가 합니까?”

하옐이 입을 삐죽거렸다. 그의 말대로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윈터와 마주치기만 하면 모든 직원들이 창백한 얼굴로 도망치거나, 인사하고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렇게나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하옐뿐이었다.

카닉 호텔의 본사는 레클 강 하구에 있는 섬에 있었다.

윈터는 더운지 셔츠를 팔까지 걷어 올리고 마차로 향했다. 그런 그의 옆에서 함께 걷던 하옐이 감회가 새로운지 섬을 둘러보며 말했다.

“와, 대표님이 처음 이 섬을 사자고 했을 때만 해도 돈 날리고 정신이 나가신 건 줄 알았는데 말이죠.”

“오늘따라 왜 이러지? 돌았어?”

“너무 신나서 그렇습니다! 오늘로 대륙 최대 규모의 호텔 체인으로 딱 올라서지 않았습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게 대표님이랑 상관없으면 도대체 누구랑 상관있습니까?”

하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묻고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에 탄 윈터가 모처럼 마차 창밖으로 섬을 내다보았다.

원래는 강 하구에 존재하는 게 전부였던 섬을 사서 기반을 다지고 그 위로 건물들을 쌓아 올렸다. 지금은 호화로운 상점들이 가득한 쇼핑 관광지로 유명해지며 어마어마한 수익이 윈터의 손에 떨어졌고, 다른 어느 곳보다 광고 효과가 뛰어나 대륙 안 기업들이 너도나도 이곳에 입점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좀 쉴까.”

지난 3년 동안 너무 무리한 게 사실이었다. 며칠씩 밤을 새우고 하루에 몰아서 자는 형편없는 생활을 이어 가다 보니 몸은 버텨도 정신이 피폐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차는 강을 따라 달려 곧 호텔에 도착했다.

생각해 보니 그냥 회사에서 자고 올 걸 왜 돌아온 건지 모를 일이다.

윈터가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며 호텔로 들어섰다.

바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바이올렛과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공주님은 아침 식사 전에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침실 테이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에야 방을 나왔다.

하여튼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과 닮은 점이 없는 여자다.

그는 제 방으로 향하려다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바이올렛의 힘으로 이혼을 추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윈터는 그녀가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아내는 신분증 검사를 당한 일로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윈터가 마음만 먹으면 신분증 검사를 한 그 경관은 물론 웰튼 서 전체를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오히려 그 작자가 운이 좋았던 거지.

그러니 아무리 공주님이라고 해도, 돈으로 엮인 그녀의 발목을 묶어 놓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사는 게 지겨워진 듯한 그녀의 눈빛만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그녀를 가둬 놓는 건 할 수 있지만 혹여나, 정말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아무리 돈과 권력을 움켜쥔 자신이어도 방법이 없었다.

그의 부모는 돈만 주면 기뻐했고, 언제나 사랑을 돌려주었다. 집에 1년 만에 들러도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가족이란 돈으로 유지되는 것 아닌가. 왜 아내와의 관계는 이걸로 유지가 되지 않는 것인지…….

그가 그리 생각하며 바이올렛의 객실 문을 확인했을 때였다. 윈터는 객실 문 옆 표시기가 녹색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투숙객의 외출을 의미했다.

*

만찬 준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끝났다. 엔나가 매우 흡족해하며 샤론과 바이올렛에게 말했다.

“고생했으니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렴.”

“저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바이올렛이 말하자 샤론이 동그래진 눈으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여태 이렇게 고생해 놓고. 당연히 만찬도 하고 가야지.”

“드레스도 안 가져왔고…….”

“나 여분 드레스 있어. 할머니 것도 많고.”

샤론이 붙잡고 절대 안 놓아주려고 고집을 부렸다. 오랜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라 엔나가 편들어 줄 줄 알았더니, 그녀 역시 바이올렛을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얼떨결에 바이올렛은 엔나의 저녁 만찬에 함께했다.

저택에 들어선 손님들은 녹음이 가득한 파티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생기 있는 즐거움을 느꼈다.

녹색의 앙증맞은 잎을 가진 식물들이 테이블이며 불 꺼진 벽난로를 장식하고 있어 어디서나 상쾌한 향기가 났다. 울타리 아래 피어 있던, 고슴도치 같은 보라색 에키놉스 꽃과 아티초크를 섞어 바구니를 채워 걸어 두고 연녹색의 수국 화분을 창가에 두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품위 있는 손님들이 저택을 구경하며 감탄했다.

“밖은 더웠는데 여기 들어오니 시원한 기분이 드는군요.”

“이런 파티는 처음인데 정말 근사하네요.”

엔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문제가 생길 뻔한 걸 바이올렛이 기지로 해결해 주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새로운 분위기를 즐기는 손님들이 하도 칭찬 일색이라 바이올렛은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바이올렛이 부담감에 한숨을 폭 쉬고 있을 때, 그녀 앞에 노신사 하나가 섰다. 그를 알아본 바이올렛의 눈이 커졌다.

“켄제스 경!”

켄제스는 원래 왕실 근위대장이었으나, 왕실이 해체되며 수도 경찰청 청장 일을 맡게 되었다. 바로 곁에서 충성을 다하던 에쉬 로렌스의 명령이니 불만을 표현하지 않고 떠났지만, 언제나 로렌스 가문에 대한 애정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손등을 내밀자 켄제스가 허리를 숙여 바이올렛의 손등에 입을 맞춘 후 다시 몸을 바로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인.”

그 모습을 본 엔나가 걸어오더니 켄제스에게 말했다.

“한동안 사적인 행사에는 절대 안 오시던 분이 웬일로 초대에 응했나 했네요. 바이올렛을 보러 오신 게군?”

“죄송합니다, 부인. 이제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사적인 행사는…….”

“네에. 잘 알겠습니다, 꼬장꼬장한 사람.”

엔나가 핀잔하더니 농담이었다는 듯 웃고 자리를 떠났다. 젊은 시절, 사교계를 주름잡던 때부터 오랜 친구인 두 사람의 모습에 바이올렛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켄제스가 같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네, 잘 지내요.”

“계속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언제나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지키던 켄제스의 진심에 바이올렛의 맑은 눈에 기쁨이 차올랐다.

켄제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웰튼 서에 찾아오셨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신경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경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네요.”

바이올렛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켄제스가 정중히 인사하며 대답했다.

“이렇게라도 뵐 수 있어 기쁩니다.”

어디도 갈 곳이 없을 것만 같았는데, 수도에 오니 그래도 여기저기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이올렛은 문뜩문뜩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 훅 코앞으로 우울감이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바이올렛은 그런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들을 보이지 않게 묻었다. 언젠가 또 드러나겠지만, 잠시라도 두려움 없이 이 따스함에 안기고 싶었다.

엔나는 저녁 만찬에 훌륭한 음식들을 내놓았다.

즐거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느라 식사가 끝났을 때는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바이올렛이 힐끔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설마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바이올렛은 걱정했으나 제가 너무 마음이 약한 거라고 생각하며 단호히 마음먹었다. 그 남자는 결혼식 당일에 사라져서 몇 달 뒤에 돌아왔는데, 자신은 고작 이틀이었다. 애초에 그 남자가 퇴근을 했을지도 미지수였다.

바이올렛이 이제야 들어오기 시작한 디저트에 집중하며 걱정을 지우고 있을 때였다. 하인 하나가 걸어와 엔나에게 소곤거리자 엔나가 말했다.

“어머, 들어오시라고 해.”

“예, 주인마님.”

하인이 나가더니 잠시 후 저택으로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그를 발견한 바이올렛이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윈터?”

바이올렛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윈터는 갑자기 찾아온 것에 대한 미안함에 선물로 가져온 와인들을 엔나에게 건넸다. 그 와인이 상당히 좋은 것들인지 술 좋아하는 엔나의 표정이 놀람으로 가득 찼다.

바이올렛의 눈썹이 난감함으로 기울어졌다. 엔나와 인사를 마친 윈터에게 다가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

그가 대답이 없어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돌렸다.

원래도 허투루 하고 다니진 않지만 이렇게 격식 갖춘 턱시도를 입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머리칼은 완전히 뒤로 넘겨 잘생긴 얼굴을 환히 드러냈고, 사나워 보이는 입매는 불쾌하다는 듯 꽉 다물려 있었다.

이렇게 있는 대로 꾸미고 오니 바이올렛은 새삼 그의 외모에 놀라움을 느꼈다. 하여튼 그렇게 미운데도 외모만큼은 질리질 않았다.

“사업차 온 거예요?”

이것밖에 이유가 없다고, 바이올렛은 확신했다. 그러자 한참 뜸을 들이던 윈터가 대꾸했다.

“지나가다 들렀어.”

“여기를요? 호텔이랑 두 시간 떨어져 있는 곳을?”

“여긴 지나가면 안 되는 곳이기라도 한가?”

“그건 아닌데…….”

바이올렛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윈터는 반드시 지나가다 들른 것으로 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새벽 2시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 겪은 감정 변화를 말하면 바이올렛은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이 비웃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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