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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3화 (13/176)
  • 13화

    윈터는 제 침실로 돌아가 바이올렛이 하루 종일 마음대로 끌고 다닌 제 몸단장을 시작했다.

    윈터는 단장에 소홀하지 않은 편이었다. 그렇다고 유행에 매우 민감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언제나 면도를 말끔히 했고, 몸에 딱 맞게 재단한 옷을 입었으며, 머리 손질 시간도 길었다.

    그는 제 외모가 쓸 만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므로 미인계라고 못 쓸 법도 없었다.

    일할 준비를 마친 윈터가 방에서 나왔다. 평소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을 하러 갈 그였지만 오늘은 바이올렛이 상당히 걱정스러웠다.

    처음 느껴 본 월경통은 정말 끔찍했다. 게다가 기분까지 더러워져서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고, 소리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걸 아내가 도대체 어떻게 참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윈터가 바로 나가려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 바빠 죽겠는데.”

    그가 룰루에게 말해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바이올렛이 약을 먹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윈터가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이올렛.”

    그녀는 깊이 잠들어 듣지 못한 듯했다. 윈터가 말을 이었다.

    “아프지 마.”

    그리고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작은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내 집에서 나갈 생각도 말고. 그냥 나랑 살아.”

    그가 말을 마친 후에도 한동안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근질거리는 기분이라 목을 슥슥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얼굴 보니까 이상하게 일을 못 가겠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마차 앞에서 기다리던 하옐이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어요?”

    “뭐 어쩌라고.”

    윈터가 털썩 마차에 앉자 하옐이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올해도 칸투스에서 후원 파티를 한답니다.”

    칸투스는 라크라운드 중남부에 자리한 수도원이었다.

    칸투스의 수도사들은 매년 소규모 후원 파티를 열었고, 후원금의 보답으로 직접 만든 와인을 선물했다. 윈터는 그 와인을 얻어 마셔 본 이후 칸투스 와인에 매우 욕심을 냈다. 최종적으로는 수도에 새로 짓는 최고급 호텔에 독점으로 제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윈터가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 와인을 구하는 건 지독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는 윈터가 예법과는 담을 쌓고 지낸다는 데 있었다. 칸투스의 수도사들은 상당수가 왕족의 핏줄이라 콧대가 높았고, 굉장히 높은 수준의 예법을 요구했다. 하옐이 은밀히 말했다.

    “혹시 말입니다, 작은 마님께서…… 두 분이 몸을 바꾸는 방법을 아신다면 말이에요.”

    “……딱 그날만 바꿔 달라고 하라고?”

    “대표님도 이미 생각해 보셨죠?”

    “해 보기야 했지.”

    윈터가 잠시 생각하다 대꾸했다.

    “생전 파티 한 번 가 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내가 부탁하면 해 주겠어? 이혼 얘기까지 나오는 마당에.”

    “그건 그렇네요…….”

    “출발해.”

    윈터가 턱짓했다. 그 후, 그는 하옐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두 사람의 몸이 바뀌는 원인은 카닉 일족의 피가 섞인 자신에게 있었다. 그런데도 방법은 바이올렛이 알고 있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그 방법이 도대체 뭐야.’

    그는 실마리를 찾기 위해 처음 두 사람의 몸이 바뀌던 상황부터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

    “아, 집에 가기 싫다.”

    잠에서 깬 바이올렛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기분 좋게 해가 들이치는 창문을 바라보던 바이올렛은 자신을 벽장에 밀어 넣던 에쉬와 캐서린 부인을 떠올렸다.

    윈터가 인사도 없이 파티에서 나와 자신을 찾으러 온 모양이니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미리부터 두려워하지 않으려 고개를 저었다.

    상체를 일으킨 바이올렛이 테이블에 놓인 초콜릿 탑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어 가운을 여미며 걸어간 바이올렛은 층층이 이어 붙인 원형 초콜릿 하나를 떼어 냈다.

    “……뭐지?”

    바이올렛이 의아하다 못해 무서워하는데 침실로 룰루가 들어왔다.

    “이제 깨셨어요? 어제 내내 주무신 걸 보니 약이 독했나 봐요.”

    바이올렛이 돌아서 보니 룰루의 손에 또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도대체 이게 다 뭔가?”

    “하옐 비서님이 주방장에게 디저트 만들 재료비를 주고 가셨거든요. 얼마를 주고 가셨는지 몰라도 이 정신 나간 양반이 정도를 모르고 디저트 산을 만들어 놓았네요. 누가 다 먹으라고. 아직도 많아요.”

    “이게 다가 아닌가?”

    “그럼요! 조금만 모양이 찌그러져도 못 쓴다고 버리려 들어서 호텔 직원들이 아침 대신 해결했어요.”

    룰루가 투덜거렸다. 초콜릿 탑과 케이크를 보니 아무래도 나눠 먹을 사람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바이올렛이 테이블 앞에 앉으며 말했다.

    “은밀히 전신을 좀 보냈으면 하네. 아무도 모르게.”

    “몰래요?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그 친구가 나름 가출 중이라 누구한테 들키면 안 되거든.”

    “작은 마님 친구분이 가출이요? 어휴, 말썽쟁이셔라.”

    룰루가 유쾌하게 웃었다.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바이올렛은 곧장 어머니를 찾아갔다.

    마차로 30분을 달리니 필리체 영지 안, 엘라가 기거하는 저택이 나왔다.

    에쉬도 그곳에 살고 있었고, 농사짓는 시늉을 하는 밭도 저택 바로 앞이었다.

    딸이 마차에서 내려서자 엘라 필리체 부인이 환한 얼굴로 마중 나왔다.

    “바이올렛, 여기까지 무슨 일이니?”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어머니.”

    바이올렛이 인사하자 엘라가 물었다.

    “들어가 차를 한 잔 하겠니?”

    “좀 걸으실래요? 주변 구경시켜 주세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엘라가 미소를 지었다.

    바이올렛이 저택 주변으로 난 산책로를 걸으며 말했다.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넌 이제 블루밍가의 사람인데 어떻게 자주 오겠니.”

    엘라가 언제나 흥분하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잘 지내니 걱정할 게 없구나. 우리 불쌍한 에쉬는 어찌해야 할지.”

    “오빠도 잘 지내는 것 같던걸요.”

    바이올렛이 열 살이던 해,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그 전에도 엘라는 아들밖에 몰랐지만 그 이후에는 남은 아들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바이올렛은 어머니를 이해했다. 큰오빠의 이른 죽음은 엘라의 세상을 절반으로 쪼개 버린 것과 같았으니까.

    엘라가 마음 아프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잘 지내긴. 원래 가졌어야 할 왕좌도 내놓은 아이야. 그 애 심정만 생각하면…….”

    “……어머니, 저도 힘들 때가 있어요.”

    “너는 혼자서도 잘하잖니.”

    혼자서 잘해 온 것이 아니라 혼자 해내야만 해서 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바이올렛이 입술을 물었다가 어머니를 닮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남편은 한번 나가면 언제 집에 들어오는지 기약이 없고, 남부 귀족들은 전부 저를 싫어해요. 이제 정말 지쳐서…….”

    “바이올렛.”

    엘라가 못 듣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네가 주변 사람에게 잘하면 해결되는 일인데, 그걸 누굴 탓하겠니?”

    “…….”

    어머니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바이올렛이 블루밍 가문에 처박혀 있지 않으면 에쉬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문제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 시점에서 이미 어머니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엘라가 딸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가여운 것은 에쉬뿐이었다.

    바이올렛은 가끔, 어머니에게 가여운 딸이 되고 싶었다.

    *

    바이올렛은 복잡한 마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다행히 기분이 나아질 만한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꿉친구였던 샤론에게서 온 전신 연락이었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이 종종 놀러 가던 수도 남쪽, 오겔 화원으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바이올렛은 룰루가 미리 챙겨 둔 짐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던 플립과 함께 호텔을 나섰다.

    바이올렛이 오겔 화원에 도착하자 샤론이 멀리서부터 신이 나서 달려왔다.

    “바이올렛!”

    “샤론!”

    바이올렛은 최근 샤론을 만났지만 샤론은 그녀를 너무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과격하게 환영하며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와, 샤론은…… 엄청 자랐네.”

    어릴 땐 아가 역할을 하던 샤론이 어느새 바이올렛보다 쑥 자라 있었다. 윈터의 몸일 땐 몰랐는데, 제 몸으로 돌아와 보니 차이가 느껴졌다.

    샤론이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할머니가 기다리셔.”

    “정말 오랜만에 뵙네.”

    이 화원의 주인은 샤론의 외조모인 엔나 테시아 오겔이었다.

    엔나는 언제나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말투도 그랬지만 바이올렛은 그녀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허리에 매달린 샤론을 힘겹게 끌고 저택으로 들어서자 엔나가 불퉁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우리 손녀 녀석이 성장하질 않아 놀라셨겠군요, 부인.”

    “말씀 낮추셔요!”

    “이제 어른인데 그건 무례지요.”

    엔나가 대꾸하다가 바이올렛의 섭섭해하는 표정에 슬쩍 웃었다.

    “하지만 뭐,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별수 없구나. 대신 너도 예전처럼 할머니라고 부르렴.”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안도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럴게요.”

    *

    꽃을 좋아하는 바이올렛에게 화원 구경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비록 여름이 시작되며 화원이 녹음으로 물들었지만 바이올렛은 꽃이 없어도 무슨 꽃나무인지를 알았다. 샤론이 엔나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바이올렛은 정말 모르는 꽃이 없죠, 할머니? 잡초까지 다 알고 있다니까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왜 네가 자랑하는지 모르겠구나.”

    “제 친구를 자랑하는 거예요!”

    “그런 게냐? 그럼 네 자랑이기도 하구나.”

    두 사람의 칭찬에 바이올렛이 민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플립이 등나무 그늘 아래에 천을 깔고 챙겨 온 디저트들을 보기 좋게 정리해 주자 여자 셋이 동그랗게 앉아 도란도란 꽃놀이를 시작했다. 온갖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해가 지기 시작했다.

    그때, 하녀 하나가 정신없이 달려왔다.

    “마, 마님! 큰일 났습니다! 내일 저녁 만찬에 쓸 꽃을 실은 마차가 왔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겼는지 꽃이 다 시들어 못 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말에 엔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화원의 장미도 다 졌는데……. 화원에서 하는 꽃 없는 만찬이라니, 손님들이 실망하겠구나.”

    늘 무뚝뚝하던 엔나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 정도 표정을 짓는 거면 속은 정말 더없이 울적한 상태이리라. 그때, 엔나가 제가 더 안타까워하는 바이올렛에게 슬쩍 물었다.

    “뭐 괜찮은 방법이 없니, 바이올렛?”

    “아, 그럼…… 여름 화원으로 만찬 주제를 바꾸시는 건 어떠세요? 조개꽃이 가득 피어 있던데 정말 귀여워요.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녹색 리본으로 장식하고 화이트 와인 같은 투명한 술에 청포도나 그린 올리브를 담아서 여름밤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바이올렛이 모처럼 들떠서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엔나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윈터 경이 하루라도 네가 없으면 죽니?”

    바이올렛이 웃으며 고개를 젓자 엔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자고 가렴. 네가 도와주면 내 섭섭하지 않게 사례하마. 너에게 없는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급여로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돈을 벌어 보고 싶었거든요.”

    “할머니, 저도요! 가출해서 돈이 없어요!”

    옆에서 샤론도 거들자 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어서어서 움직이자.”

    엔나가 말하며 마음이 급한지 서둘러 저택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바이올렛이 플립을 돌아보며 말했다.

    “플립, 미안하지만 남편에게 오늘 오겔 화원에서 묵는다고 전신을…….”

    말하던 중에 바이올렛이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걸 누굴 탓하겠냐고 말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3년간 윈터가 집에 왔을 때 바이올렛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늘 연락이 없었고, 자신은 늘 막연히 기다리기만 했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올 가능성이 높으니 연락을 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네. 혹시 남편이 호텔로 돌아와서 물어보면 룰루가 여기로 연락하겠지.”

    “네,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플립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바이올렛의 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 사람도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 기다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좀 느껴 줬으면 좋겠는데…….’

    바이올렛은 그렇게 생각하며 엔나와 샤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윈터가 확인하든지 확인하지 않든지 늘 제 일정을 알려 주던 그녀 딴에는 꽤 큰 일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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