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파티에서 뛰쳐나온 윈터는 다행히 마지막 기차가 출발하기 직전에 역에 도착했다.
곧장 1등석에 올라탄 그는 지쳐서 더 이상 앉아 있을 기력도 없었다. 1등석은 의자를 눕혀 침대 형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가 드러눕자 얼떨결에 끌려온 플립이 담요를 가져와 물었다.
“작은 마님, 담요 드릴까요?”
윈터가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플립이 담요를 잘 펼쳐 그에게 덮어 주고 저 멀리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누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윈터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가 허리를 손으로 꽉 누르며 말했다.
“약 가져와.”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하녀에게 부탁해 작은 마님이 먹는 약을 전부 챙겨 온 플립이 묻자 윈터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허리랑 배.”
허리 통증이 심한 데다 배도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파 왔다.
플립이 약 봉투에 적힌 설명들을 꼼꼼하게 살피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물과 함께 작은 환을 가져다주자 윈터가 물었다.
“무슨 약이야?”
“……진통제입니다.”
플립이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윈터가 약 봉투를 뺏어 들었다.
봉투 겉에는 월경통에 먹으라고 적혀 있었고, 예상 기간이 딱 내일부터였다. 짜증이 치민 윈터가 약 봉투를 구겨 집어 던졌다.
플립이 서둘러 달려가 약 봉투를 집어 잘 접은 후 다시 상자에 넣었다.
“역에 도착하시면 하나 더 드셔야 합니다.”
윈터는 전혀 약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몸 중간 토막을 어디 빼놓고 싶을 정도로 고통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환을 삼키고 다시 드러누웠다. 약효가 돌 때까지는 이 통증을 느껴야 한다니 미칠 노릇이었다.
한참 몸부림을 친 후에야 통증이 가라앉으며 윈터가 지쳐 잠들었다.
그 모습에 플립은 월경통이 정말 끔찍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걱정에 안절부절못했다. 평소의 작은 마님이라면 기차에서 이렇게 늘어져 잠들지 않았을 테니까.
다행히 약 기운으로 버티며 수도 기차역에 도착했다.
하옐은 전신으로 여기저기 연락해 윈터의 몸의 행방을 찾았다. 카닉 호텔과 필리체 가문, 인근 상인들에게 연락하던 하옐이 잠시 후 의자에 앉아 앓고 있는 윈터에게 돌아왔다.
“대, 대표님. 지금 작은 마님께서…….”
“어디 있대?”
“그게…… 서에 계신답니다.”
“서? 무슨 서?”
“웰튼 경찰서요…….”
경찰서?
윈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짓을 하면 제 몸을 훔치고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경찰서에 간단 말인가?
“우리 아내는 생각보다 사고뭉치군.”
윈터가 중얼거리며 마차를 잡아탔다.
*
원래대로라면 바이올렛은 필리체 가문에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걸음은 곧바로 수도 기차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웰튼 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 로비 대기실에서 신문을 읽던 바이올렛은 갑자기 신문을 뺏어 구겨 버리는 제 몸을 발견하고 눈빛이 흔들렸다.
윈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네. 경찰서까지는 예상을 못 했군.”
제 모습이 건들거리고 있으니 바이올렛은 영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 바른 자세로 앉아 신문 따위를 보고 있는 제 모습이 어색한 건 윈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빨리 찾을 줄 몰랐네요. 계획이 많았는데.”
“벌써 이렇게 사고를 쳐 놓고 계획은 무슨 계획.”
“사고 친 게 아니라, 새벽에 이방인만 골라 신분증 검사를 한 경관을 찾으러 온 거예요.”
그녀의 담담한 대답에 윈터가 혀를 찼다. 올곧은 편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 불의도 못 참는 성격인 줄은 몰랐다. 윈터가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일이 많으니 일단 기다리라고 해서요.”
“일이 많을 리가 있어? 그냥 이렇게 방치해 두면 알아서 가려니 하는 거지.”
이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란 공주님.
윈터가 그리 생각하며 제 몸의 팔을 툭 쳤다.
그러자 지난번처럼 곧바로 두 사람의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바이올렛이 갑자기 확 느껴지는 허리 통증에 비틀거렸다. 윈터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부축해 앉히며 말했다.
“조금 아까 약 먹었어. 곧 약이 돌 거야.”
“그렇군요.”
“달거리가 가까운 몸을 맡기고 도망쳐? 시작하면 나보고 어떻게 해결하라고?”
“한 번쯤 경험해 보는 것도 좋지 않아요?”
“전혀.”
윈터가 치를 떨며 대답하더니 문을 턱짓했다.
“가자. 당신 좀 누워야겠다.”
“잠깐만요. 경관을 만나고 갈 거예요.”
“내가 처리하면 돼.”
“제가 말할게요.”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켜 유리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녀를 알아본 경관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도 경찰은 매우 보수적인 집단이었으므로 왕실이 해체되었다고 해도 대다수가 자신은 왕실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은 새벽에 남편의 신분증을 확인한 경관을 바로 발견했다. 경관, 에펄스는 제가 윈터 블루밍의 신분증을 검사한 걸 기억했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펄스가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걸어와 말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바이올렛 부인?”
기차역에서 잡히는 현행범이 워낙 많아 웰튼 서 오른쪽 벽이 전부 유치장으로 되어 있었다. 바이올렛의 시선이 유치장 안에서 멈췄다.
유치장 안에는 열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두 명만이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명만이 남편과 같은 회색 눈을 가진 이방인이었다.
바이올렛의 눈빛에 노기가 차오르는 것을 눈치챈 에펄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잘 모르셔서 그러신데, 이방인들은 위험한 짓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갑을 찬 자들이 특히 더 위험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입니까?”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제가 뭘 모른다는 겁니까?”
바이올렛이 묻자 에펄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대답이 없자 바이올렛이 말을 이었다.
“공평하게 대해 주세요.”
“하지만…….”
“공평함에 대한 대답으로 어떻게 ‘하지만’이라는 말이 붙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함에도 상대의 말문이 막히게 하는 위엄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그를 주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바이올렛은 일말의 두려움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에펄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일괄적으로 수갑을 풀겠습니다.”
“그럼 조치를 취하시길 기다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에펄스가 서둘러 유치장으로 달려가 회색 눈을 가진 자들에게 채웠던 수갑을 풀었다. 바이올렛은 아무 표정도 없이 그가 수갑을 들고 밖으로 나오는 것까지 시선으로 확인했다.
바이올렛이 경관들에게 인사를 하고 윈터에게 돌아가자 뚫어지게 그녀를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다 했어?”
“아뇨, 이제 청장을 찾아갈 생각이에요.”
“웃기시네.”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왜 막느냐고 따지려는데 윈터가 그녀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나중에 가. 일단은 눕고.”
“전 건강해요.”
“건강 좋아하네.”
“어릴 때 발레도 했고요.”
“그러셨겠지. 온갖 공주님 같은 건 다 배웠군.”
그가 빈정거리며 그녀를 데리고 서를 나왔다.
*
바이올렛은 그대로 윈터의 손에 붙잡혀 카닉 호텔로 끌려왔다. 윈터는 마치 도망쳤던 환자라도 찾아온 것처럼 바이올렛을 침대에 억지로 데려다 눕혔다.
“이렇게까지 아프지 않아요.”
“내가 더 잘 알아.”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는데, 윈터가 그녀의 머리맡을 손으로 짚고 심각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아프다고?”
“그렇죠.”
“시작하면 얼마나 더 아픈데?”
“두 배 정도.”
바이올렛의 대답에 윈터의 표정이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의 두 배란 말이지.”
“제가 좀 심한 편이에요.”
“뭐 그래. 그건 일단 됐고. 당신, 친구 없어?”
“……갑자기 그건 왜요?”
“어젯밤에 파티에 있는데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잖아.”
“아…….”
윈터가 늘 제가 파티에서 당하던 일을 경험하고 왔다는 걸 안 바이올렛이 흐릿하게 웃었다. 윈터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추궁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파티를 많이 열었는데 어떻게 친구 하나가 없어?”
바이올렛은 잠시 턱을 들어 윈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워호슨들이 바이올렛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블루밍 부부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미워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정확한 재산 규모는 몰랐지만 블루밍 공작가의 실질적인 경제권을 남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 그가 지난 3년간 어떤 사교 행사에도 함께해 주지 않는 것은 아내에 대한 강한 원망으로 비쳤다. 그리고 윈터가 원망하는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하기에 귀족들은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바이올렛은 그것에 대해서는 남편을 비난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3년이 지난 이제야 남편이 자신을 원망하고 있음을 제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어차피 그런 이유를 들며 앞으로 함께 파티에 가 달라고 말해 봤자 그가 들어줄 리 없다. 바이올렛은 이제 남편에게 아무 기대도 가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의 거절을 견디기엔 그녀의 마음이 너무 약해져 있었다.
바이올렛이 대답 대신 말을 돌렸다.
“그래도 오다가 친구를 만났어요.”
“누군데.”
“도…….”
도스 공국을 말하려던 바이올렛이 입을 다물었다.
혹시 제가 이혼을 할 수 있는 모든 경로가 막혀 버리면 그곳으로 떠날지도 모르니까, 아무래도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바이올렛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왜 말을 하다 말아.”
“언제는 대화할 시간도 없다면서요? 이제 당신 바쁜 거 아니까 더 이상 투정 안 부릴게요. 그동안 미안했어요.”
바이올렛이 얼버무렸다.
이제 거의 대화가 끝났으니 바쁜 윈터는 떠나는 게 평소의 패턴이었다. 그런데 그가 오히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까 일을 떠올렸는지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다음에 혹시 또 몸이 바뀐 상태에서 그런 경관 놈을 만나게 되면 발로 차 버려. 그 정도는 내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어떤 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별로 합법적인 방법은 아닐 것 같아 눈을 가늘게 뜨고 흘겼다. 그러자 윈터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며 말했다.
“그런 표정 처음 봐.”
“……무슨 표정이요?”
“음, 약간 화난 표정으로 보이는데.”
바이올렛의 동그래진 눈과 조금 열린 입술에 윈터가 바로 손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사이에 당신 몸에 익숙해진 모양이야. 아, 드레스를 입으려면 속옷도 갈아입더군?”
“……그 얘길 굳이 왜 하죠?”
“당신이 따질 말은 없지. 내 몸 훔쳐서 도망간 주제에.”
그가 능청스레 한 말에 귓가가 조금 붉어진 바이올렛이 문 쪽을 보며 물었다.
“바쁘죠?”
“그렇게 쫓아내지 않아도 나가.”
윈터가 핀잔하더니 어린아이들이 인사하듯 손을 대충 흔들어 인사하고 침실을 나갔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끌어안은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제 몸이 얼마나 끌고 다니기 힘들었으면 저 숨 막히게 바쁜 남자가 시간까지 들여 자신을 여기 눕혀 놓는 건지.
“운동을 좀 해야 하나…….”
바이올렛이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