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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1화 (11/176)
  • 11화

    바이올렛이 수도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 무렵이었다.

    이 시간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기차역에서 커피에 간단한 간식을 곁들여 먹으며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바이올렛 역시 새벽에 어머니를 찾아가는 건 무례한 것 같아 역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반면 샤론은 호텔에서 보내 주는 마차를 타러 역 앞으로 나갔다. 바이올렛은 샤론과 마차 기다리는 것을 함께 해 주었다.

    샤론이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경께선 정말 바이올렛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샤론이 할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못 참고 말을 내뱉었다.

    “사실은! 바이올렛이 어릴 때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엄청 컸거든요. 그런데 두 분이 사이가 안 좋다는 헛소문이 돌아 가지고…… 좀 걱정했어요.”

    “……그랬나요?”

    내가 그랬었나?

    바이올렛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잖아요. 돌아가신 로렌스 전하께선 정책 실패로 정신이 없으셨고, 선왕후 전하께선 아들밖에 모르시고……. 아이들은 다 그렇겠지만 바이올렛은 자기 가족을 꾸린다는 환상이 유난히 컸어요. 세상에 그렇게 소꿉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도 없을 거예요.”

    샤론의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제가 소꿉놀이를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샤론이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주로 아가 역할이었던 건 불만이었어요. 전 아빠가 하고 싶었단 말이에요! 아니면 의사 선생님!”

    그러고 보면 샤론의 두 살 위 오빠이며 도스 공국의 후계자 페런 도스는 동생들의 소꿉놀이에 곧잘 장단을 맞춰 주곤 했다. 그리고 생일이 늦은 샤론은 바이올렛보다 훨씬 늦게 자라 늘 아가 역을 맡았다.

    그리운 추억을 생각하니 모처럼 즐거워서 웃음이 났다. 샤론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바이올렛이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요.”

    그때 마차가 도착했다. 바이올렛이 마차에 타는 그녀에게 서둘러 말했다.

    “아내에게 연락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꼭이에요? 오빠도 바이올렛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한단 말이에요!”

    샤론이 몇 번이고 확인을 얻어 낸 후 그곳을 떠났다.

    바이올렛은 제가 아직 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종종 떠올려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그렇게 힘이 생겨서 다시 역으로 들어설 때였다.

    경관 하나가 다가와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실례합니다, 신사분. 잠시 신분증 확인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괜찮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새벽 시간엔 원래 무작위로 검사를 해서요.”

    “아,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경관이 눈이 커져서 말했다.

    “이런! 윈터 블루밍 경이시군요. 못 알아 뵈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죄송할 이유가…….”

    얼굴이 창백해진 경관은 바이올렛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 멀리 도망쳐 버렸다. 바이올렛이 황당해하는데 지나가던 청년이 말했다.

    “새벽부터 재수 없게 걸리셨네요.”

    바이올렛이 의아해하자 청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 저도 아버지가 이방인이시거든요. 다행히 저는 합격선을 넘어서 눈도, 머리도 까만색을 물려받았어요. 아버지는 아직도 이렇게 신분증 검사를 당하실 때가 있어요.”

    바이올렛은 그의 설명으로 ‘합격선’이라는 말의 의미를 눈치채고 표정이 굳었다.

    라크라운드에 자리 잡은 이방인, 카닉 일족을 상징하는 것은 은발과 회색 눈이었다. 윈터는 아버지의 흑발과 어머니의 회색 눈을 물려받았다.

    남편은 제가 누군지 알면 경관이 하얗게 질려 도망칠 정도의 힘을 얻었으나, 여전히 차별받지 않는 외모의 합격선은 넘지 못한 것이다.

    *

    윈터의 친모는 윈터가 다섯 살이던 해 아이를 잠시 식당에 맡겨 두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윈터는 그때부터 그 식당 주인의 하인으로 들어가 일했다.

    하여튼 열두 살까지는 매를 맞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그즈음 하인으로 있던 집에서 도망쳐 나와 귀동냥으로 듣던 바이델린 산맥으로 갔다. 거기서 여태까지 모은 쌈짓돈을 전부 털어 원두 한 수레를 샀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다시 바이델린 산맥을 넘어 블루밍 가문으로 향했다.

    어쨌든 거기 아버지가 있다고 친모에게 들었으니까. 윈터를 보자마자 두 사람은 당황했지만 소년이 끌고 온 수레에 쌓여 있는 원두를 발견했을 땐 표정이 달라졌다.

    혼자 산맥을 넘는 사이 그 원두 가격은 열 배가 되었다. 소년은 돈을 버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었다.

    라크라운드는 급변하고 있었고, 이제 신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는 끝이 났다. 블루밍 공작 부부가 라크라운드 남부 귀족, 워호슨의 종주 노릇을 계속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부부가 돈에 대해 가진 재주라고는 쓰는 재주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돈의 흐름을 정확히 알고 있는 가족 구성원이 필요했다.

    그런 판단이 끝난 두 사람은 윈터를 따듯하게 맞아 주기로 결정했고, 소년은 열두 살에 처음 맛본 안정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이후에도 소년은 늘 돈으로 애정을 샀다. 그의 부모가 된 이들이 돈에 애정을 팔았으니까.

    윈터가 스물일곱 살이 되는 올해까지 한 번도 그 애정 거래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렇게 관계를 유지해 오던 블루밍 공작 부부는 오늘, 커다란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윈터가 새로운 가정을 꾸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매우 초조하게 여겼다. 에쉬는 반대하지만 솔직히 지금 그들 입장에서는 큰아들 부부가 이혼을 하는 것도 아주 나쁜 선택지는 아니었다.

    최악은 두 사람의 사이가 너무 좋아져 블루밍 가문의 영지를 나가는 경우였다. 혹여 바이올렛이 부모의 파티 비용을 왜 다 내냐고 제 남편을 꼬드기기라도 하면…….

    캐서린이 먼저 초조함을 표정에서 지우고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바이올렛이 늦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제임스가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아이가 꾀병이 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내 생일에도 늦을 줄은 몰랐군.”

    “곧 오겠지요. 그리고…… 몸이 약한 것도 사실 아닌가요?”

    “의사가 꾀병이라지 않소.”

    “하지만 3년째…….”

    캐서린이 말끝을 흐리자 옆에서 귀부인 하나가 작게 소곤거렸다.

    “아이가 생기지 않으시죠, 두 분은.”

    “그게 참, 저도 걱정이랍니다.”

    캐서린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도 다들 아이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바이올렛에게 있다고 확신하며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때, 연회장 입구에서 이질적인 침묵이 흘렀다.

    바이올렛이 주변이 밝아지도록 새하얀 드레스와 커다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하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걸어와 부부에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특별히 신경 쓰느라.”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캐서린이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바이올렛, 오늘 주인공은 내 남편인데 너무…… 화려한 것 아니니?”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 하고 가라고 남편이 이만큼이나 사다 바쳐서요.”

    바이올렛이 말하며 보란 듯이 팔찌 세 개를 겹친 왼팔을 들어 보였다.

    “하나라도 빼놓고 오면 제 남편이 섭섭해해서 별수 없었답니다.”

    윈터에게 자길 벽장에 가뒀다고 말한 모양이라고, 에쉬가 캐서린 부부에게 알려주었다. 평소 바이올렛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례한 말투와 눈빛에 캐서린은 위협을 느꼈다.

    캐서린은 일단 물러나기로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윈터가 그렇게 부탁한 거라면 별수 없구나.”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님.”

    바이올렛이 적당히 얼버무리더니 생긋 웃고 휙 돌아섰다.

    인사를 했으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예의였다. 바이올렛이 저렇게 그냥 돌아서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차림새까지 하고 나타났으니.

    부부는 그녀에게 믿는 구석이 생겼음을 확신했고, 깊은 불안감에 빠졌다.

    *

    윈터는 제가 바이올렛처럼 격식을 완벽하게 차려 인사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빨리 인사를 마치고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고 믿었다.

    윈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렁주렁한 목걸이를 달고 나온 걸 후회했다. 그가 목을 비틀며 함께 온 하옐에게 말했다.

    “중간에 벗으면 안 되나.”

    “당연히 안 되죠. 연회장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다 합쳐도 그만큼 안 될 것 같은데. 모든 사람이 알걸요.”

    “이러다 목이 부러질 것 같은데.”

    구두도 힘들고 드레스도 불편했지만 목걸이가 가장 괴로웠다. 아내의 가냘픈 목과 어깨로 이 무게를 버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제 여자들이 왜 주렁주렁한 걸 안 다는지 확실히 알겠군.”

    윈터가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머리를 이리저리 경박하게 돌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를 향하고 있었다. 특히 남자들 중에는 아예 넋을 놓고 보다가 윈터의 사나운 눈빛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는 자들도 많았다.

    아내는 원래도 미인인 데다 휘황찬란한 보석까지 두르고 나타났으니 이목을 끄는 것이 당연했다.

    윈터는 남자들의 시선에 짜증을 느끼며 하옐에게 말했다.

    “대충 바이올렛이 인사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알아봐. 적당히 인사하고 떠나게.”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어머니가 여신 티 파티에 주로 오는 아내의 또래 여자들. 얼굴은 다 알 것 아냐.”

    “대표님이 한 번도 티 파티에 가신 적이 없는데 제가 누가 참여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한 번도 안 갔나?”

    “예. 한 번도.”

    이혼 사유를 두 가지나 알았으니 나름 성과가 좋은 밤이다.

    윈터가 혀를 차며 한숨을 쉬고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하옐이 말했다.

    “일단 아무하고나 눈을 마주쳐 보시죠? 아는 사이면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겠죠.”

    “별수 없군.”

    이런 사교 활동을 극도로 싫어하는 윈터는 별수 없이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을 찾아 눈을 마주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 가볍게 인사하고 마주 미소를 짓는 게 끝이었고, 몇몇은 아예 못 본 척 무시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바이올렛과 친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친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여는 티 파티에 제가 들인 돈이 얼마인데.

    윈터는 아내가 파티에서 같이 있어 달라고 말할 때마다 어린애 취급을 하며 제 일을 우선했던 것을 약간 후회했다. 파티에서 아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녀의 친분 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윈터가 슬슬 짜증을 내며 하옐에게 말했다.

    “아는 사람이 안 왔나 보군. 그냥 나가지?”

    “에이, 오늘 워호슨들은 싹 다 왔을 텐데 말이 됩니까? 작은 마님이 유령도 아니고…….”

    파티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을 라크라운드 남부에서는 유령이라고 불렀다. 건너 건너 겨우 초대받아 파티에 들어와서 인맥을 만들어 보려고 애쓰다 실패하는 사람들을 말하던 것이 이제는 인기가 없고, 따돌림당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되었다.

    유령이란 말이 신경 쓰였는지 잠시 생각하던 윈터가 하옐에게 말했다.

    “너 나가 봐.”

    “예? 왜요?”

    “잠깐만 나가 봐. 30분 뒤에 들어와.”

    윈터의 말에 하옐이 의아해하며 연회장을 나갔다.

    그로부터 30분 후, 연회장으로 돌아온 하옐이 윈터에게 물었다.

    “왜 나갔다 오라고 하신 거예요?”

    “……아무도 말을 안 걸어.”

    “예?”

    “아무도 아내에게 말을 안 건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들어와 한 시간이 지났는데 여기 있는 수많은 블루밍 가문의 손님들 중 바이올렛에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윈터가 곧바로 돌아서서 연회장을 나갔다. 하옐이 정신없이 따라 달리며 물었다.

    “어디 가시게요?”

    “내가 지금 어딜 가겠어. 아내 찾으러 가지. 빨리 와, 막차 끊기기 전에.”

    윈터의 걸음이 빨라졌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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