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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10화 (10/176)
  • 10화

    마차에 탔을 때만 해도 바이올렛은 한 걸음 걸을 힘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혼자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왔다.

    저녁 8시의 기차역은 파티장만큼이나 붐비고 있었다.

    기차 칸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1등석은 한 칸에 한 예약만 받았고, 2등석은 지정석에 스무 명 정도가 탔으며, 3등석은 전부 입석으로 탈 수 있는 한 최대로 밀어 넣어 탔다.

    다행히 주머니에 윈터의 지갑이 들어 있었다. 지폐가 두툼하게 들어 있어서 한 달은 너끈히 살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무척 죄책감을 느꼈지만 지금 당장은 도리가 없었다. 훔친 돈이란 생각에 1등석은 애초에 제외했지만 3등석에 끼어 탈 자신도 없어 2등석을 골랐다.

    사람이 하도 많아 표를 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겨우 소중한 2등석 표를 손에 넣은 바이올렛이 중얼거렸다.

    “혼자 기차를 타 보는 건 처음이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낯설어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바이올렛.”

    이름 말고도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던 게 많았다. 보고 싶었다거나, 오늘은 일하러 가기보다 당신 옆에 있고 싶다거나.

    애타는 마음으로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해도 일이 먼저였던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제가 한심했다.

    “첫사랑이 마음에 오래 남긴 하나 봐.”

    곧 다음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바이올렛이 문 앞에 서 있는 매표원에게 걸어가 표를 내밀었다.

    사용한 표라는 의미로 끝을 찢어 돌려주며 매표원이 인사했다.

    “편안한 여행 되십시오, 신사분.”

    무사히 기차에 올라타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이올렛이 긴장감에 안으로 구부러들었던 어깨를 폈다.

    그러나 곧 다음 문제가 발생했다. 혼자 기차에 타니 표에 적혀 있는 문자와 숫자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리숙하게 두리번거리자 뒤에서 한 여자가 외쳤다.

    “어휴, 이렇게 큰 덩치로 막고 있으면 어떡해요!”

    “아, 미, 미안합니다.”

    바이올렛이 서둘러 사과하고는 그녀에게 기차표를 보여 주었다.

    “어디에 앉으면 되는 겁니까?”

    “어휴,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생각으로 기차를 탔대? 여기 위에 쓰여 있잖아요!”

    여자가 의자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표에 적힌 글자들의 의미를 안 바이올렛이 오른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 정중한 목소리에 여자가 얼굴이 휙 붉어져서 말했다.

    “에구, 예쁘게도 웃네.”

    아까부터 이런 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윈터의 얼굴과 몸을 힐끔거렸다. 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서워할 법도 한데 아이들마저 윈터만 보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편이 저만 첫눈에 반하게 만드는 남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불편하고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바이올렛은 신경을 창문 밖으로 돌렸다.

    그녀가 탄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플랫폼에서 기다리던 사람과 만나 반갑게 웃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그녀의 옆자리에도 누군가가 나타났다. 바이올렛 또래의 여자였는데 귀족으로 보였고, 큰 짐을 선반에 올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 제가 하겠습니다.”

    바이올렛은 신사가 이런 상황에서 앉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들어 볼 엄두도 못 낼 커다란 짐을 선반 위에 가볍게 올려 두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자리에 앉자 짐의 주인인 여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별것 아닙니다.”

    “수도에 가세요?”

    “네.”

    “저도요! 가출했어요!”

    “……네?”

    “부모님이 자꾸 저는 혼자 돈 벌어 본 적이 없어서 돈을 막 쓴다잖아요. 그래서! 가출!”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랬군요.”

    “신사분은요?”

    “사업차.”

    “아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혹시 그분이에요? 윈터 블루밍 경.”

    “맞아요.”

    “제 이름은 샤론이에요. 샤론 도스.”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반가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모자에 가려져 있던 얼굴을 확인하니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도스 공국의 고명딸이며, 바이올렛이 일곱 살부터 머물며 함께 발레를 배웠던 소꿉친구였다. 바이올렛이 말했다.

    “아내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 함께 발레를 배우셨다고.”

    “지, 진짜요? 바이올렛이 제 얘기해요? 저만 생각하는 게 아니군요!”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바이올렛이 종종 제 생각을 한다는 소식에 신이 난 샤론이 재잘재잘 어릴 때 있었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역무원이 출발해도 된다는 의미로 종을 마구 흔들었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차 문이 닫혔다.

    기차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

    윈터가 바다 별장에서 짜증스레 기다리고 있으려니 하옐이 마차와 함께 도착했다. 하옐이 당장 뭐 하나 잡아 죽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듯한 분위기의 윈터에게 달려갔다.

    “대표님!”

    “……어떻게 알았어?”

    표정과 자세는 윈터였지만 외모는 바이올렛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알아보는 걸 미심쩍어하자 하옐이 대꾸했다.

    “전에 카닉 일족들이 몸이 바뀐 경우를 찾아보라고도 하셨고, 여기 말이 한 필밖에 안 묶여 있는데 대표님은 말을 못 타시잖아요.”

    “웬일로 머리 좀 썼군.”

    “전 항상 씁니다. 그리고 이제 말 타는 법 좀 배우시죠? 대표님 운동 신경이면 금방 타실 텐데.”

    “일곱 살짜리들이랑 같이 승마를 배우고 싶지 않고, 시간도 없어.”

    윈터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그 후 그들은 마차를 타고 간신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도 윈터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제임스 블루밍 공작의 축하 파티는 이제 시작이었던 것이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의사에게 손부터 치료를 받은 윈터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하녀들이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가져오자 윈터가 힐끔 드레스를 보았다.

    아내는 아무래도 이 파티가 싫어서 도망친 모양이다.

    어차피 제 몸을 가지고 다니는 이상 위험할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지금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독히 파티를 싫어하는 아내를 대신해 자리를 채워 주는 일뿐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윈터의 좌우명이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한 가지 정도는 이득이 있어야 했다.

    윈터는 하녀들이 가져온 상복 같은 드레스들을 힐끔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제 방으로 향하자 하옐이 따라 걸으며 물었다.

    “뭐 하시게요?”

    “내가 입히고 싶은 거 입히려고.”

    “그럼 나중에 화내실 것 같은데…….”

    “아내가 내 몸을 훔쳐 가서 자기 맘대로 쓰잖아. 나도 마음대로 써야 손해가 안 나지.”

    윈터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 후 제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그가 드레스 룸 안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자 그간 하옐이 틈틈이 사 온 드레스 백여 벌이 걸린 방이 나왔다.

    3년 전, 결혼 직후에는 샌드위치로 모든 식사를 해결할 정도로 바쁘고 재정도 어려웠다. 그래도 나라 빚을 갚아 주었다는 좋은 이미지 덕에 호텔에 손님이 끊이지 않아 작년 봄부터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즈음 바이올렛에게 파티용 드레스 다섯 벌을 보냈다.

    그런데 며칠 뒤, 그중 나무색 드레스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그에게 되돌아왔다.

    드레스와 함께 온 어머니의 편지에는 바이올렛은 왕족이라 이렇게 화려한 드레스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몇 번 더 그렇게 반려된 이후에는 드레스를 사도 전부 제 드레스 룸에 쌓아 두었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 윈터가 드레스를 하옐에게 들게 하고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보석들이 가득했다.

    윈터가 큼지막한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고 팔찌를 아무렇게나 겹쳐 끼우자 하옐이 핀잔했다.

    “여자들은 그렇게 주렁주렁한 건 안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보석상들이. 게다가 이렇게 온갖 보석을 다 달고 나오는 귀부인이 어디 있습니까?”

    “닥쳐. 남편이 너무 많이 사 줘서 별수 없이 다 끼웠다는데 저들이 어쩔 거야.”

    평소 윈터의 입버릇 그대로였지만 바이올렛의 예쁜 입술로 그런 말을 들으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에 하옐이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드레스를 살피던 윈터가 혼자 도저히 못 입겠는지 투덜거렸다.

    “어떻게 입는 건지 전혀 모르겠군.”

    “도와 드려요?”

    “당장 안 꺼져? 어디에 손을 대려고 해. 하녀들 데려와.”

    “……제발 작은 마님 모습으로 욕하지 마세요. 진짜 백 배 상처받습니다.”

    하옐이 울상이 되어 말하며 하녀를 부르러 달려 나갔다. 곧 들어선 하녀들은 해가 졌는데도 번쩍거리는 드레스 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옐이 쫓겨난 후 하녀들이 바지런히 작은 마님에게 드레스를 입혔다. 윈터는 내내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 짧아진 머리칼을 손질하던 하녀 하나가 무심코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하얀 드레스가 잘 어울리세요? 꼭 결혼식 날 신부…….”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가 기겁을 해서 말하던 하녀의 팔을 찰싹 때렸다. 말실수한 하녀가 다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윈터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결혼식이 뭐?”

    “죄, 죄송합니다, 작은 마님!”

    바이올렛에게서는 들어 본 적 없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두 하녀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사과했다. 그러나 윈터는 오히려 더 표정이 구겨져서 두 사람을 추궁했다.

    “왜 내 앞에서 결혼식 얘기를 못 해? 너 말해 봐.”

    윈터가 팔을 때리며 말리던 하녀를 손으로 콕 집어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못 들고 울먹거렸다.

    “겨, 결혼식 날 밤에…… 작은 주인님께서 연락도 없이 사라지셨잖습니까…….”

    “…….”

    “작은 주인님께서 화가 나셨던 건 알지만 그래도 작은 마님께서 드레스도 못 벗고 밤새 걱정하며 기다리신 게 생각이 나서 안쓰러운 마음에……. 주제넘게 죄송합니다!”

    그녀의 말에 윈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결혼식 날, 윈터는 몹시 화가 나서 곧장 수도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작위를 받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수습할 일이 많았다.

    초야를 치르는 것과 상관없이 결혼식 날 밤 합방을 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바이올렛에게 제가 떠난 걸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부부 침실에서 그가 오길 기다렸을 것이다.

    오늘에서야 윈터는 적어도 한 가지, 바이올렛이 이혼하자고 말한 이유를 알았다.

    *

    바이올렛이 수도에 내려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기차에서 내내 몸을 움직이느냐며 윈터에게 핀잔했던 게 미안했다. 긴 다리를 구부리고 2등석에 앉아 오는 것이 너무 힘들어 그녀 역시 몇 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함께 기차에서 내린 샤론이 물었다.

    “경께선 어디로 가요?”

    “필리체 가문으로 갈 겁니다.”

    바이올렛과 에쉬의 어머니, 엘라 필리체 부인은 남편이 죽고 왕실이 해체된 이후 필리체 영지 내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딸에게 작은 피난처 하나 만들어 줄 정도의 애정은 있었다. 물론 그 피난처가 에쉬에게 방해가 된다면 안 되겠지만.

    바이올렛이 문뜩, 샤론을 보며 물었다.

    “도스 공국은…… 새 신분을 잘 만들어 준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워낙 인구가 적어서 들어오기만 하면 바로바로 새 국적과 신분을 만들어 줘요. 물론 범죄자는 안 되지만요.”

    “그렇군요.”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을 마음먹은 이상 이혼 후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만약 이혼을 못 한다면 깊은 밤에 도망이라도 칠 생각이었다.

    죽음이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떠날 생각이었다.

    무거운 마음은 이 땅에 두고 가벼워진 몸으로.

    남편은 제가 떠나도 그리 힘들여 찾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아내가 사라진 것도 한 세 달은 모를 남자라고, 바이올렛은 씁쓸히 생각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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