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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9화 (9/176)

9화

벽장에 웅크려 있던 바이올렛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내리 문을 두드리다 중간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벽장을 밀어 보니 다행히 문이 열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나갈 힘이 없어 한동안 벽장에 기대앉아 있던 그녀의 시선에 화병에 꽂힌 장미가 보였다. 윈터가 준 꽃은 시들었지만 비슷한 새 장미를 가져다 두었다. 꽃 선물을 받았다는 걸 매일 떠올리고 싶어서였다.

꽃을 보니 그가 떠올랐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그때는 윈터의 그 말을 그저 거짓말이라 생각하며 넘겼는데, 지금은 그 거짓말이 필요했다.

몸이 바뀐 이후로 윈터는 바이올렛의 몸이 약하다는 것을 그녀 자신 이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지금 바이올렛은 누구라도 좋으니 제 손의 상처를, 제 마음의 상처를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를 찾겠다고 결심하고 힘겹게 걸어 나왔다.

다행히도 윈터는 오늘 파티에 온,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 몇을 부부의 저택으로 데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서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무언가에 짜증내고, 욕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원망이 먼저였다.

그가 집에 오자마자 아내를 먼저 찾았다면, 인사를 건네러 와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그는 벽장 안의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눈을 뜬 자신은 이토록 서글프지 않았으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바이올렛은 한 번 더 그의 손을 당겨 볼 생각이었다. 오늘만큼은 제 옆에 계속 있어 달라고 부탁해 보려고.

바이올렛이 가까스로 담담한 얼굴을 하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무거운 슬픔에 눌려 있으면서도 예의를 잊지 못하고 부드럽게 고갯짓을 해 손님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다들 낯이 익으시군요. 편히 쉬시다 가세요.”

그녀의 인사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답인사를 했다. 인사를 마친 바이올렛이 조심스럽게 윈터를 불렀다.

“윈터,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러자 윈터가 낮게 대답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 중입니다, 부인.”

“나도 중요한 얘기예요. 정말로…… 정말로 중요해요.”

“침실에 가 있어요. 곧 갈 테니까.”

손님들이 있어 윈터는 부드럽게 말하려 애썼지만 슬슬 신경질적임이 묻어났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오히려 그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지금 들어 줘요.”

“곧 간다니까.”

윈터가 말하며 바이올렛의 손에서 스르륵 제 손을 빼냈다.

바이올렛은 비어 버린 제 손을 내리지 않고 잠시 동안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결혼 첫날, 온 용기를 꺼내 잡은 그의 손이 빠져나갔던 것처럼 오늘도 그랬다. 그는 늘 제 일이 먼저였고, 용기 내서 붙잡은 바이올렛의 손을 비참하게 했다.

아마 영원히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바이올렛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저택을 나왔다.

오늘 밤새 이어질 블루밍 공작의 생일 파티에는 참석해야 할 것이다. 에쉬나 캐서린이 찾아와 왜 축하 파티에 오지 않았냐고 윽박지를지 모르니까. 더 이상의 비난을 듣고 나면 자신은 정말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의 걸음은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때, 그녀가 벽장에 갇혔었다는 걸 하인들의 입을 통해 뒤늦게 들은 플립이 달려 나왔다.

“작은 마님!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

그러자 마구간에서 말을 끌고 나오던 바이올렛이 그를 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서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

“바다요?”

“응. 여기 영지 끝에 바다 별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3년이나 살면서 한 번도 못 가 봤거든. 엄두도 못 냈네.”

“자, 잠시만요! 따듯한 차라도 챙겨 올 테니 같이 가셔요, 작은 마님!”

그의 말에 시든 듯이 건조하던 바이올렛의 눈에 여린 생기가 돌았다.

“고마워. 여기서 내 걱정해 주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네.”

“그런 말씀 마시고…….”

“바다만 보고 돌아올게. 늦었으니 들어가서 쉬렴.”

그녀의 말에 플립이 울상이 되어 별수 없이 물러섰다.

어려서부터 승마를 배운 바이올렛이 매우 교과서적인 자세로 말에 올라탔다. 동작의 반듯함과 달리 제 드레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 그녀의 하얀 종아리가 드러났다. 플립이 기겁을 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바다만 보고 오셔야 합니다!”

“그럼. 달리 할 게 뭐 있겠어.”

바이올렛이 씁쓸히 말하고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 별장은 멀었다. 말을 타고 한 시간을 가니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말에서 내린 바이올렛이 감탄해 바다를 바라보았다. 밤에 가까워지는 어둑한 노을과 잔잔한 바다가 아름다웠다. 말 달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별장지기인 노파가 놀라서 마중 나왔다.

“작은 마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셔요?”

“바다가 보고 싶어서 왔으니 신경 쓰지 말고 다시 들어가게.”

“작은 마님께서 오셨는데요……. 곧 차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정말 괜찮아. 잠시 쉬다 떠날 걸세.”

그녀가 한사코 달래자 별장지기가 별수 없다는 듯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갔다.

바이올렛은 별장지기가 별장을 지키기 위해 총을 구비해 두는 창고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 작은 총 하나를 꺼낸 바이올렛이 바다로 나가는 길이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살랑거리는 바닷바람이 그녀의 반짝이는 머리칼을 장난치듯 헝클었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아, 좋다……. 진작 와 볼걸.”

결국은 사랑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미련하게 매달리고, 싫은 소리도 못 들은 척하며 웃고, 선물 한 번 받아 본 적 없으면서 누구 생일마다 호들갑을 떨며 준비했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바이올렛은 별장에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지난번처럼 몸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바이올렛은 아예 여기서 제 인생이 끝나기를 바랐다.

바이올렛이 총을 장전했다. 그리고 제 목에 가져가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

윈터는 바이올렛이 신경 쓰여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는 이런 큰 행사를 아주 싫어했다. 어머니에게도 바이올렛이 매번 빠져나가려고만 한다는 말을 들었고, 몇 번은 바이올렛이 수도로 데려가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이혼 이야기였다.

이혼 이야기만 아니기를 바라며 무심코 바이올렛이 붙잡았던 제 손을 본 윈터의 걸음이 빨라졌다. 피가 묻어 있었다.

“젠장.”

다쳤던 건가?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서 찾아왔던 거였나?

뒤늦게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는 바이올렛의 침실로 달려갔다.

그녀의 방에 도착해 보니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윈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문을 열어 보니 방이 비어 있었다.

“어디 간 거야. 얘기를 하자더니.”

윈터가 중얼거리다가 화병에 꽂힌 장미를 발견했다. 그는 그 장미를 시답지 않게 보며 말했다.

“……꽃을 정말 좋아하긴 하나 보네.”

다행히 이번엔 자신도 공감할 수 있는 취향이었다.

잠시 꽃을 보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렸다. 그가 손님들의 잠자리를 준비하던 하인에게 서둘러 물었다.

“바이올렛은 어디에 있어?”

“예?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까?”

“없으니까 묻는 거 아냐.”

윈터가 바로 성질을 내자 하인이 겁을 먹은 얼굴로 모른다며 고개를 젓고 도망쳤다.

바이올렛은 침실에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응접실에도 없고, 정원에도 없었다. 윈터는 조금씩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바이올렛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택 어디에도 없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아까 하려던 이야기가 뭐였는지 이제는 미치도록 알고 싶어졌다.

결국 윈터는 마차를 타고 곧장 블루밍 공작 부부의 저택으로 향했다.

윈터의 명령으로 그의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하옐이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대표님?”

“바이올렛 여기 안 왔어?”

“예? 여긴 안 오셨는데요?”

“수도. 수도로 간 마차 없어?”

“아직까진 없었습니다만…… 진정 좀 하세요, 대표님.”

“아내가 사라졌는데 내가 어떻게 진정…….”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던 때였다. 윈터가 갑자기 심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욕설을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하옐이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금방 멀쩡해진 윈터가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아.”

“하인들 전부 불러서 작은 마님 계시는 곳 찾으라고 할게요.”

“아…… 생각해 보니까 바다 별장 간다고 했다. 이제 기억나네.”

“예, 예에? 아, 제발 부탁인데 그런 건 좀 귀담아들으십쇼. 저도 지금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옐이 안심해 투덜거렸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윈터는 블루밍 공작 부부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의 걸음이 에쉬 로렌스의 앞에서 멈췄다.

여러모로 얻을 것이 많아 윈터에게는 제법 사근사근 대하는 에쉬가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윈터.”

“아내를 벽장에 가뒀다며. 어머니와 합세해서.”

그가 대뜸 하는 말에 에쉬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러나 이런 건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반적인 귀족들에겐 익숙하고 가벼운 벌이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자네가 익숙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준 벌이라는 뜻으로 들리는군.”

보통 귀족들이 원래 그렇다고 하면 짜증내면서도 그냥 넘어가던 윈터의 대답에 에쉬가 멈칫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지금 윈터의 눈빛이며 말투가 마치 바이올렛 같았다.

다소 긴장한 그가 변명하듯 말을 쏟아 냈다.

“바이올렛이 자네와 이혼하고 싶어 하는 건 알아? 자기 마음대로 굴다 못해 이제는 이혼까지 하겠다잖아. 캐서린 부인께서 눈물까지 보이셨어.”

“우리 일이야. 이번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니 그냥 넘어가지만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가만히 앉아서 이혼당하겠단 거야?”

“말했잖아. 우리 일이야.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평소의 윈터 같지 않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그가 돌아섰다. 그러다가 밤이 되어 제 몸이 선명히 비치는 유리 벽을 보고 멈춰 섰다.

에쉬도 키가 큰 편이었으나 보통 사람들보다 훌쩍 크고 어깨가 벌어진 그와 비교하니 오히려 자그마하게 보였다.

그가 다시 에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가 옆에 있으니 내가 아주 남자다워진 기분이 드는군.”

“……뭐?”

에쉬가 무슨 말인가 잠시 생각하다 표정을 있는 대로 구겼다. 에쉬가 그의 말을 이해했을 때 윈터는 이미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윈터는 곧장 오늘 오는 손님들을 위해 불러 둔 사설 마차 한 대를 잡아타고 영지를 떠났다.

*

아내가 사라졌다며 하옐에게 소리를 치던 도중 갑자기 어지럽다, 싶더니 시야가 바뀌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윈터는 또다시 찾아온 두통에 힘겨워하며 테이블에 이마를 기댔다.

“젠장, 왜 또 이러는 거야.”

그곳은 바다가 보이는 별장이었다. 가까스로 고통을 추스른 윈터가 욕설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곳에 있으니 못 찾지.”

괴롭긴 해도 아내가 있는 곳을 찾았다는 사실에 일단 안심했다.

그때, 그곳으로 별장지기가 달려왔다.

“작은 마님! 혹시 총성 못 들으셨습니까?”

“총성?”

“에구머니나! 이게 왜 여기 있대!”

별장지기가 기겁을 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어 들었다.

그게 왜 거기 있는지는 지금 윈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왜 바이올렛이 여기에 있는 건지, 그 이유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자신에게 하려던 말이 도대체 뭐였는지.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고자 윈터가 별장을 달려 나왔다. 그러나 거기에 마차는 없고 말이 한 필 묶여 있을 뿐이었다.

말을 전혀 타지 못하는 그가 막막하게 서 있다가 욕설을 퍼붓고는 별장지기를 불렀다.

“할멈! 당장 마차를 불러!”

“예, 예에! 작은 마님!”

고함에 화들짝 놀란 별장지기가 전신 연락으로 마차를 부르러 달려갔다. 그사이 윈터는 1층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있었다.

바이올렛이 제가 말을 탈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자신을 이 먼 곳에 데려다 놓은 걸 보니 아무래도.

아내가 제 몸을 훔친 모양이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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